-
-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 무위당 장일순 잠언집
김익록 엮음 / 시골생활(도솔)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처음 만난 건 지인의 책장에서였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라는 두툼한 책을 봤습니다. 동양사상인 노자철학에 대해 선생과 이현주 목사의 대담으로 이뤄진 책으로 노자철학을 알지 못하는 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곤 잊고 있었어요.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지요.
그러다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답니다. 제가 읽던 책을 큰아이가 보더니 “엄마, 나 이 사람 알아”하는 겁니다. 저도 만난 적 없는 15년 전에 돌아가신 분을 이제 10살인 아이가 알다니.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 자세히 물었더니 제가 예전에 사준 책 중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인물전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곤 그 책을 제게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엄마도 이 사람 책 있는데!” 이러지 뭡니까. “어? 아닌데, 정말?” 당황하는 제게 다시 큰아이는 책 한 권을 내밀더군요. 장일순 선생의 그림과 일화가 담긴 <좁쌀 한 알>이라는 책을요. 자기 책이랑 제목이 같아서 유심히 봤다고 하는데요. 그제야 생각이 나네요. 지인의 책장에서 봤던 책이 생각나서 그 분에 관한 책을 구입했던 걸.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이 책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께서 생전에 펼쳤던 강연과 인터뷰 내용을 선생의 그림과 함께 엮은 잠언집입니다. ‘둑방길’, ‘서화전’, ‘무위당 선생의 집’, ‘겨울나무 아래서’, ‘원주카톨릭센터 사무실에서’, ‘할아버지의 해월’, ‘골목길’, ‘주교관에서’, ‘한살림’, ‘감옥이 학교’ 이렇게 10개로 나눈 다음 그 아래에 짧은 글과 그림을 함께 수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한 페이지의 절반도 채 안되는 글이지만 그 속엔 선생께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라며 말씀을 시작한 선생은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 군고무마를 파는 이의 서툰 글씨가 ‘진짜’라며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정성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자신이 최고라며 거들먹거리기보다 세상에 가장 하잘 것 없는 게 ‘조 한 알’이라 여기고 마음을 추스르라며 충고합니다. 그런가하면 지구의 모든 자연이 암을 앓고 있는데 자연의 일부인 자신이 아픈 건 뭔가 큰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면서 천지간에 가장 고약한 게 바로 사람들이 모여서 맨날 싸움하는 거라며 따끔한 일침을 가하십니다. 또 교육에 대해 말씀하시길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라며 ‘교육의 본질은 인간다운 삶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상호 공유 작용’이란 걸 짚어줍니다.
책에는 선생의 글씨와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사람의 얼굴을 닮은 난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알알이 꽉 찬 벼가 고개를 숙이듯 살포시 고개를 숙인 난초의 모양새가 마치 명상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붓으로 그냥 휙휙 그린 단순한 그림이지만 그만의 아름다움이 느껴졌습니다. 길가에 돋아난 풀 한 포기, 작은 벌레 한 마리까지 사랑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몸소 앞서 실천하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선생의 글과 그림이 있기에 예년과 다른 이 추위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