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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동무 ㅣ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배유안 지음 / 생각과느낌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젊은 청년? 아니, 그보다 좀 어려보이는 두 소년이 나무막대를 휘두르고 있는데 한 명의 차림새가 범상치 않다. 다른 소년에 비해 상당히 높은 신분인 듯한데, 누굴까.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초정리 편지>의 저자 배유안의 신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얼른 책을 구입했다. 제목이 어떤 의민지, 어떤 내용의 책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손에 잡자마자 읽어간 서두에서야 알게 됐다. ‘창경궁 동무’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훗날 정조가 되는 이산과 그의 곁에서 동무가 되어준 정후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후겸아, 기어이 가겠느냐?” 깊은 근심에 찬 어미의 낮은 음성으로 책은 시작된다. 1776년 3월 10일, 새로운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경사로운 날이건만 이들 모자(母子)는 대체 무얼 걱정하는 걸까. 일개 신하인 그가 곤룡포와 면류관을 쓰고 옥좌에 오른 왕의 모습을 존경과 감탄의 눈길이 아니라 가슴을 옥죄는 근심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뭘까.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입니다.” 흐읍,...나는 숨을 멈췄다. 무릎이 꺾였다. 사도 세자의 아들! 왕이 된 후 처음으로 내리는 말이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니... 아아, 그의 한이 이렇게 깊었던가? - 17쪽.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왕의 위엄 앞에 그는 눈을 감고야 만다. 손발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오는 걸 느끼며 그 옛날, 왕과 함께 즐겁게 지내던 때를 떠올린다.
정후겸. 그의 집은 양반가문이지만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이 무척 컸던 그를 위해 부모는 아들을 화완 옹주의 집으로 데려간다. 왕의 사돈댁에 머물면서 원했던 공부를 맘껏 할 수 있게 된 그는 얼마 후 화완 옹주의 양자가 되어 궁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커다란 변화가 연이어 일어난다고 여긴 그는 궁에서의 생활에 자신감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여덟 살의 세손 이산을 만나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고 뛰어놀면서 금세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세손의 운명을 지닌 아이, 훗날 왕의 자리에 앉을 세손을 시기하고 질투심을 느낀다. 더불어 자신이 어부의 아들에서 옹주의 양자가 되었던 것처럼 큰 파도가 다가와 모든 걸 바꿔놓기를, 자신의 운명이 또 한 번 크게 바뀌기를 바라는...은밀한 열망을 가슴에 품게 된다.
옹주가 혼잣소리로 한 말, 나는 그 놀라운 말에 조심스런 흥분을 느꼈다. 세자가 왕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절대적인 일도 바뀔 수가 있다……. 그 말은 나에게 두려운 희망을 주었다. 내가 옹주의 집에 처음 들어가서 느꼈던,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그 희망을 또 느낀 것이었다. 운명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 100쪽.
정후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책은 때로 내용의 전개에 있어 억지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드리운 상대적 어둠과 번민, 고뇌, 열망, 철저히 세손의 반대편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또 백성보다 오직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해 당파를 짓고 분쟁을 일으켜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의 목숨을 빼앗게 하다니, 그 광경을 피눈물을 토하며 지켜봤을 세손의 원통함과 아픔에 가슴이 아렸다.
나는 행운을 불행으로 바꿔 살아온 어리석은 자였다. 나는 졌다. 그에게도, 내 인생에도 졌다.
‘오늘 왕이 되신 전하, 우리가 창경궁에서 막대기 부딪히며 놀던 동무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눈물이 흐르도록 그대로 두었다.- 194쪽.
<초정리 편지>에서도 느꼈듯이 저자의 글맛은 무척 특별하다. 등장인물의 마음이 옮아가는 자리에 따라 담담하면서도 애절하게 풀어쓴 문장과 세밀한 표현은 어디 하나 거슬리거나 막힘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조선 중기, 영조 즉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사도세자의 죽음, 이산 정조의 즉위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낸 <창경궁 동무>.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책을 또 한 권 찾았다. 실로 큰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