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기
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뭉크. 대표작인 ‘절규’를 비롯해 어둡고 음울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여인의 관능적이고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는데 바로 ‘마리아’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소설 <광기>에 그려진 뭉크의 ‘마리아’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뭔지 모르지만 뭉크의 그림과 미묘하게 달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서야 알았다. 머리카락이 달랐다. 아래로 축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소설표지에선 가시돋힌 덩굴식물의 줄기를 연상시켰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휘감아오를 무언가를 기다리는 덩굴...
책은 아길라르가 호텔 방문을 연 순간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던 아길라르는 당시 콜롬비아의 상황과 아내를 가까이에서 돌봐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대학을 나와 애완견 사료를 배달하며 살아간다. 아내가 간혹 정화를 해야 한다며 온 집안에 물 잔을 늘어놓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출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랬던 아내가 불과 나흘의 출장을 다녀오고 나니 갑자기 변해있었다. 정신이 나가 흥분하고 사납게 구는 아내의 모습에 아길라르는 혼란을 겪는다. 대체 자신이 없던 나흘 동안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떤 일이 잠자고 있던 아내의 광기에 불을 지른 걸까. 아길라르는 그 나흘 동안의 일을 추적해가기 시작한다.
아구스티나는 부유한 집에 태어나지만 폭력적인 성향의 아버지로 인해 어둡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았으면서도 여자 같은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막내 리치에게 툭하면 폭력을 휘두른다. 그럴때마다 아구스티나는 동생 리치를 다독이며 의식을 치르면서도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소망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소피이모와 불륜관계라는 애써 감췄던 비밀을 드러나면서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광기에 휩싸이고 마는데....
소설의 주인공이자 핵심인 아구스티나의 광기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원인과 근원을 추적해가는 <광기>를 정말 힘겹게 읽었다. 1인칭과 3인칭이 왔다갔다 하는 서술형식인데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있어서 한참 읽다가 서술자나 이야기의 시점이 어긋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앞으로 되짚어가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게다가 주제 사라마구처럼 문장에 따옴표가 없어서 대화인지 독백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마지막부분 아구스티나가 아길라르에게 남긴 쪽지에 따옴표가 등장하는 걸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이게 최초이자 마지막인걸까? 앞으로 돌아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온갖 부패와 혼란, 광기가 뒤섞인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워 그만뒀다.
이 작품을 주제 사라마구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위대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 이유가 본문 중에 그의 작품인 <발타사르와 블리문다(국내엔 <수도원의 비망록>)가 등장해서거나 그의 문장을 닮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결코 쉽지 않은 소설이란 건 확실하다. 책장을 덮고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출간작을 검색해보니 <열정의 섬>이란 소설이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한다는 저자의 명성과 작품세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그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솔직히 고민이 된다. <광기>에서처럼 또 미로에 갇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다음에, 다음에 또 읽을 기회가 있을거야. 그때 확인하자고 뒤로 미뤘다. 언제가 됐든 반드시 다시 읽어야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