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은 빛 ㅣ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간밤에 악몽을 꿨다. 난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발이, 다리가, 몸통...급기야 가슴이 조여오고 턱까지 빠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아, 이게 죽는 건가. 갑자기 다가온 죽음에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억울했다.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위눌림과는 달랐다. 잠깐이지만 코와 입으로 호흡하지 못하고 숨이 막혔던 게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어둠에 사로잡힌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어둠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새 바다로 이어지 는 하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섬, 미하마. 행정구역상 도쿄에 속하지만 찾아오는 이가 적어 한적한 섬에 노부유키와 동갑내기 아름다운 소녀 미카,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는 다스쿠가 있다. 특별한 유흥시설이 없는 섬에서 유일한 오락거리는 담배와 포르노잡지뿐. 우연히 리카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노부유키는 온종일 미카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런 노부유키를 다스쿠가 그림자마냥 졸졸 따라다니지만 노부유키는 다스쿠가 귀찮고 불결한 존재에 불과했다. 한껏 몸이 달아오른 노부유키가 늦은밤 미카를 만나기 위해 다스쿠와 신사로 향하던 날, 잠이 든 듯 고요하던 바다는 순식간에 거대한 쓰나미로 돌변하여 깊은 잠에 빠진 마을을 덮친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삼켜버렸다. 생존자는 신사에 있던 세 명의 아이와 다스쿠의 아버지 요이치, 등대 할아버지, 미카의 집에 머물던 손님 야마나카 뿐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노부유키와 미카. 그들에게 또 다시 위기가 닥친다. 한밤에 야마나카가 미카를 덮치는 걸 목격한 노부유키는 야마나카를 죽이고 시체를 감춰버린다. 그리고 구조대의 헬리콥터를 타고 섬을 떠난다.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섬을.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된 그들은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노부유키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미카는 시노우라 미키란 이름의 배우로 화려한 날을 보낸다. 하지만 다스쿠는 과거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심한 노부유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내의 정부가 되어 관계를 맺는데 노부유키는 그걸 알면서도 내색조차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다스쿠의 집에 요이치가 나타나면서 표면적으로 잠잠하던 그들의 일상은 또 다시 큰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하는데....
인간의 어두운 내면과 폭력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보여주는 <검은 빛>. 미우라 시온의 이 작품을 읽고 한동안 가슴앓이를 했다. 음식을 허겁지겁 먹다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명치가 아팠다. 왜 이렇게 괴로운걸까. 이유는 분명했다. 그건 책이 전하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었다. 섬 주민 대부분을 몰살한 끔찍한 쓰나미로부터 살아남은 노부유키와 미카, 다스쿠. 똑같은 공포와 절망을 경험한 그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이야기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굳이 불편한 진실로 우리를 이끌었다. 쓰나미로 미하마섬을 떠난 이후 저마다 다른 궤도에 접어든 그들이 어떤 삶을 이어가는 보여준다. 사랑하는 미카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노부유키는 미카를 위해서 또다른 살인도 불사하지만 노부유키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미카는 그에게서 잊고 싶은 과거가 떠올라 등을 돌리고 폭력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노부키는 결국 폭력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다.
책장을 덮고 나니 왠지 땅을 딛고 선 발아래에서부터 축축한 기운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는 것 같다. 옷이 물기를 머금어 무겁게 느껴진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묵직함에서 벗어나기 힘들겠지. 첫 만남에서부터 호되게 휘둘렸지만 난 어느새 그녀에게 매료된 모양이다. 그녀의 문장과 또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는 걸보면....
폭력을 헤쳐 나가며 너와 나는 살아남았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몇 번이라도 죽여줄 테니, 안심하고 숨 쉬면 된다. 너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죽여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