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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종말 리포트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때 <혹성탈출>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이 파란눈이 정말 근사했던 찰턴 해스턴이란 것과 결말이 충격적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우주에서 길을 잃은 그가 유인원이 지배하는 어떤 행성에 추락한다. 자신과 같은 인간이 하등동물이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탈출을 시도한다. 다행히 그는 탈출에 성공하고 어느 해변에 도착하지만 그 곳에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진다. 처음엔 이 결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언니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데?” “어, 저 사람은 저기가 지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지구였거든.” “어떻게 지구란 걸 알았는데?” “,,,,니는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에 있다는 것도 모르나?”
마거릿 애트우드의 <인간 종말 리포트>를 읽으면서 어릴 때 봤던 <혹성탈출>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충격적인 지구의 미래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지만 그 충격의 강도는 달랐다. <혹성탈출>은 그냥 영화일 뿐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비해 <인간 종말 리포트>는 좀 더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책을 읽는 동안 충격적이다 못해 소름이 돋았고 결코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책은 눈사람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진행된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이상한 생명체들, 눈사람이 툭하고 던지듯 내뱉는 의미가 이어지지 않는 말들...로 인해 머리는 일대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지미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때부터 책은 눈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오리무중 같은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눈사람이 ‘지미’란 이름의 소년이었을 무렵 지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무엇이든 가능해진다. 장기주식회사에 근무하는 과학자들은 장난삼아 취미활동처럼 동물간의 유전자조작 실험을 한다.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동물을 창조하면서 그걸 신나는 일이라며 즐겼던 그들은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한다. 그런 가운데 지미는 글렌(크레이크)이란 천재소년과 친구가 되고 성인이 되어 둘은 같은 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된다. 크레이크는 자신의 연구과제인 모든 인간의 꿈인 젊음을 오래도록 유지하면서 최고의 쾌락을 줄 수 있는 ‘환희이상’이란 알약과 인간들의 파괴적인 본능과 병적인 요소를 제거한 완벽한 유전자로 이뤄진 ‘크레이커’ 인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오릭스. 지미와 크레이크에게 사랑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크레이커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환희이상’ 알약을 먹은 사람들이 이상한 증상을 호소하면서 죽어가기에 이른다. 곧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는 가운데 몇몇 크레이커와 지미(눈사람)만 살아남게 되는데....
사실 책은 몰입의 정도에 있어 다소 느리고 지루하게 여겨졌다. 이야기가 사건의 진행과 맞물려 진행되는 게 아니라 눈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서술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혼란과 의문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이 어떻게 해서 멸종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많은 인간 중에 왜 눈사람 혼자 살아남았는지, 크레이커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었고 그만큼 진행속도도 더디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에서 풀어내는 세계는 정말 놀라웠다. 순전히 작가의 상상과 공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지금의 현실과 어느 정도 흡사하고 닿아있는 것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책에서는 이종 동물간의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너구컹크, 늑개, 뱀쥐가 탄생했듯이 현실도 비슷하다. 사람 귀가 달린 쥐, 장기이식용 돼지, 인간용 인슐린을 생산하는 돼지와 같은 유전자조작 동물들이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로 다뤄진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책에서 오래되거나 노화된 피부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거나 유전적으로 완벽한 ‘크레이커’를 만드는 것은 마치 현실에서의 현재진행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책의 띠지엔 이런 글귀가 있다. 처음엔 왜 무엇을 ‘지옥’이라고 여기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남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도 어떤 면에선 지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가시가 박힌 것처럼 내내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걸 다행으로 여긴다. 저자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