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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이제야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만났다. 그의 작품 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출간과 거의 동시에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고 뒤이어 나온 <로드>는 독자들의 반응이 ‘감동적이다’, ‘난해하다.’며 서로 극과 극을 치닫는 등 반향을 불러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인데도 읽어보지 못했다. 왠지 어렵고 난해할 것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코맥 매카시의 작품 중 가장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핏빛 자오선> 이 책은 왠지 다를 것 같았다. 조금의 망설임없이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책에 비해 난이도가 덜할거라고 여겼다. 그.런.데.......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문학성’은 ‘재미’와 결코 같은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를 보라’고 책은 시작한다. 이름이 뭔지 알 수 없는 열 네 살 소년이 가출한다. 무작정 서쪽으로 방랑하던 소년은 세인트루이스에 이르고 다시 뉴올리언스로 향한다. 무리 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이 오가던 어느날 갑자기 소년을 총을 맞는다.(본문을 불과 1장을 넘겼을 뿐인데). 안주인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소년은 다시 길을 떠나고 비정규군으로 이뤄진 부대에 합류한다. 인디언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어느날, 인디언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부대는 몰살당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소년은 다시 여기저기 떠돌다가 감옥에 갇한다.
이후 소년은 토드빈과 함께 글랜턴의 무리에 들어간다. 거기서 큰 덩치, 온 몸에 털 하나 없는 아이 같은 얼굴의 홀든 판사가 만난다. 글랜턴의 무리는 처음엔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벗겨가면 돈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인디언이 아닌 사람들, 이주민이나 멕시코인 같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머리가죽까지 벗기기에 이른다. 그들에겐 아기도, 여인네도, 노인도 없었다. 이미 폭력과 피, 죽음의 맛을 본 그들에게 타인은 모두 사냥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행진을 거듭하면서 희생자의 피와 내장으로 호수를 붉게 물들였고 황무지는 피에 젖어든다. 이후 책은 시종일관 광기와 살육으로 인해 피가 흥건한 현장으로 이어진다.
책은 19세기 중반, 미국과 멕시코 간의 영토분쟁이 치열했던 때를 다루고 있다. 일단 미국이 승리하면서 국경선이 그어졌지만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경 주변에선 더 많은 땅,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타인을 죽여야 하니 살인에 대한 죄의식은 기대할 수조차 없어 보였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난감했던 적이 별로 없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선혈이 낭자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사람을 난도질하고 머리가죽을 벗기는 걸 마치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눌러잡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책을 읽다 잠들면 꿈에서조차 피가 흥건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전후사정이나 언급도 없는데다 등장인물간의 대화를 나타내는 어떤 문장부호도 없이 쭉 늘어놓은 문장은 책에 몰입하기도 어려웠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정말 어렵사리 읽고 한동안 멍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멕시코와의 영토분쟁을 비롯해 책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실제로 존재했다고 한다. 또 소설의 인물 중엔 역사적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아서 이름을 그대로 쓰기까지 했다는데...그렇게까지 해서 저자는 도대체 이 책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한걸까. 왜 소년에엔 이름이 없었을까. 굳이 '소년'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는 걸까. 판사도 그랬다. 다른이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외모,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그를 보고 난 묻고 싶었다. 소년처럼. 진짜 판사가 맞냐고...결코 잠자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홀든 판사를 통해 뭘 얘기하고자 한걸까. 미국이란 나라는 책에서처럼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로 다져진 땅 위에 세워졌다는 것? 과연 그게 전부일까.
뒷표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영혼을 압도하는 매력적인 문체'. 그런데, 난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다. 저자가 묘사해놓은 정경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다. 잔혹한 폭력 이면에 가려진 흐름을 보지 못한 느낌이 든다. 책에서 판사는 이런 말을 한다. '어휘야말로 힘이다. 자신이 소유한 어휘는 결코 강탈할 수 없다.' 정말이다. 코맥 매카시의 어휘를 강탈은 커녕 마음에 담기도 버거웠다.
<핏빛 자오선>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뿌리채 흔들어놓는다. 종이위에 물감이 번지듯 메마른 사막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스멀스멀 퍼지는 붉은 피. 어딘가로 몸을 숨기지 않으면 내가 선 자리까지 삼켜질 것 같다. 하지만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피할 곳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