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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호프
그레첸 올슨 지음, 이순영 옮김 / 꽃삽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지난 8월말이었다. ‘정신적 고통이 물리적 고통보다 더 심하고 오래 간다’는 기사를 봤다. 미국과 호주의 대학연구팀에서 공동으로 조사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정신적이나 물리적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실험참가자들에게 과거 일정 기간에 벌어진 일 중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무엇이고 어떻게 느꼈는지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물리적 고통을 겪은 사람보다 정신적 고통을 겪은 사람의 고통수치가 더 높고 강하게 나타났을 뿐 아니라 일부는 옛 기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게 단순히 회상만 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정신적 고통이라니 괜히 어렵게 느껴지는데 기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넘어지는 것보다 더 아프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이 기사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굳이 과거 몇 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바로 그 날 하루만해도 내가 아이에게 얼마나 크고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줬을까, 아마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정도의 충격...이었을 거란 생각에 순간 섬뜩했다.
연두빛 바탕에 만화풍 그림의 표지, <HOPE, 내 이름은 호프> 이 책의 주인공은 열다섯 살의 소녀, ‘호프’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기의 아이들이 부모와 크고 작은 문제로 갈등을 겪듯 호프도 엄마로 인해 갈등하고 상처를 입는다. 엄마가 무심코 툭툭 내뱉는 말, ‘바보’ ‘멍청이’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같은 언어폭력으로 인해 호프는 고통스러워한다. 학교에서 하는 야영캠프를 앞두고 호프와 엄마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호프는 야영캠프에 가고 싶어하지만 엄마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하는데 그때 호프는 그동안 가슴 속에 꾹꾹 눌러 쌓아두었던 말을 쏟아내는데....
15살의 호프가 엄마의 언어폭력, 언어학대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씩씩하게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세심한 심리묘사와 함께 담은 성장소설 <내 이름은 호프>. 호프는 ‘희망, 소망’란 이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간혹 실수를 하지만 엄마에게서 ‘불쌍한 낙오자’란 말을 들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엄마를 바꿀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대견한 아이였다. 또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학살당해야 했던 유태인의 모습을 담은 <인생은 아름다워>나 <안네의 일기>를 보며 자신의 삶은 그보다 낫다며 호프가 스스로 위안을 삼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얼마나 위축되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 자신이 예전엔 아이였으니까. 나 역시 엄마의 모진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어 숨죽이고 울곤 했다. 어른이 되면 절대 엄마같은 사람은 안될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의 느낌이나 결심을 곧잘 잊어버린다는 거다. 막상 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된 지금, 내 모습은 예전의 엄마 와 흡사하다. 소름이 끼친다. 이게 무슨 조화야....
이 책을 읽고 며칠 지나서였다.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최진실이 자살했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여배우로 군림하던 그녀의 자살소식에 온나라가 들썩였다. 한때 너무 가난해서 매일 수제비로 끼니를 때웠다며 웃으며 말하던 ‘똑순이’였던 그녀가 자살을 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엇이 그녀를 낭떠러지로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말 한마디가 넘어지는 것보다 더 아프다고 했다. 그런데도 오늘 나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것도 아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 좀 봐. 너도 좀 노력해봐!’라고...무심결에 내뱉고 나서 늘 후회하고 미안해한다. 몇 번이라도 좋다. 차라리 귀에 못이 박히더라도 거듭 되새겨야할 말이다. ‘말 한마디가 넘어지는 것보다 더 아프다.’
이렇게 해야 해. 이렇게 해야 해. 이렇게 해야 해. 나는 그 말이 싫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이 정말 바보처럼 느껴졌다. - 97쪽.
“언어 학대는 신체 학대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하게 상처를 주는 거예요. 한 마디의 언어 학대를 극복하려면 스물다섯 마디에서 서른 마디의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해요. 언어 학대로 생긴 상처는 신체적인 상처만큼이나 깊게 남아요.” - 135~136쪽.
소리를 지르고 때리는 나쁜 행동은 나쁜 마음씨처럼 엄마에게서 딸로, 손자 손녀에게로 세대를 통해 이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도 그 사슬을 만드는 하나의 고리가 될까? 그런 말들이 얼마나 상처를 주고, 빈정거림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며, 쏘아보는 눈빛이 얼마나 목을 메게 하는지 잊지 않기를....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슬의 고리는 절대 되지 않을 것이다. - 229~2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