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앨범을 들춰봤다. 살림이 어렵던 시절이라 사진이 그리 많진 않지만 나의 유년 시절을 돌아볼 수 있을 딱 고만큼의 사진. 그것도 형제가 많아서 혼자 찍은 것보다 언니들이나 동생과 함께 한 사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있기에 매년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지난 시절을 잊지 않고 지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위로 두 명의 언니들(언니는 모두 5명이지만 어렸을땐 이상하게 1,2,3번째 언니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과 함께 세 명이 쪼로록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선 6백만불의 사나이와 원더우먼이 최고 인기였고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머슴애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고 두 팔을 천천히 흔들면서 뜨드드드드..... 6백만불의 사나이가 달리는 시늉을 했고, 기집애들은 은박지나 두꺼운 종이에 별 모양을 그려 머리에 쓰고서 원더우먼 흉내를 내고 다녔다. 거기에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나는 정의의 사나이, 슈퍼맨이 가세하면서 서로 누가 최고냐를 두고 다투기도 했다. 영웅놀이, 고무줄 뛰기, 숨바꼭질, 다망구...쉴새없이 뛰고 구르면서(그때의 나는 혹시 백만돌이?) 놀았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때쯤, 동네에 불쑥 나타나 하얀 연기를 내뿜는 소독차 뒤를 신나게 쫓아다녔다. 매일 똑같은 놀이가 반복됐지만 지겨운 줄도 몰랐다. 일찍 찾아오는 밤이 야속할 뿐이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작가’ 혹은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더 타임스)'라고 알려진 그 유명한 저자를 이제야 만났다.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돌아보고 그때를 회고한 글들이다. 우리나라가 한창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1950년대, 미국의 중부 아이오와 디모인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렸을 때 지하실에서 우연히 번개 무늬가 그려진 낡은 스웨터를 발견한다. 그것을 보고 저자는 그때부터 자신이 다른 별에서 온 초능력자 ‘썬더볼트 키드’라고 여기게 된다. 번개 무늬 스웨터에 망토를 두른 그는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고 장난꾸러기 말썽쟁이 친구들과 온 동네를 누비며 다니는데 태어난 시기도 나라도 다르지만 그의 어린 시절과 나의 유년 시절은 참 많이도 닮았다.







다른 아이보다 우월해보이고 싶은 욕심에 일단 도전하고 보는 그 대책없는 무모함, 머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도 두려워하지 않는 살짝 비껴나간 용감함, 하지만 어처구니 없을만큼 순진해서 때론 뒷마당의 딸기덤불과 작은 벌의 날개짓에서조차 죽음의 공포를 실감할 정도로  바보처럼 순진했던 저자의 어린 시절을 읽으면서 쿡쿡 웃음이 터져나왔다. 유쾌한 내용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정치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에서부터 식사하기 전의 음주를 비롯해 담배가 자신들을 더 건강하게 해준다고 믿었고 ‘의사들이 즐겨 태우는 담배’라며 광고까지 했다고 한다. 또 방사능 낙진이 몸에 해롭지 않다고 했던 미국 정부를 비꼬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가진 것은 언젠가 버려지기 마련이며 1950년대에 우리를 특별하고 남다르게 만들어주던 것들을 지키지 못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른 도시에는 없는 것으로 가득한 도시, 옛날의 디모인은 그렇게 멋진 세상이었는데 이제 그런 도시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두가지에 감탄했다.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변신시키는 저자의 유머넘치고  맛깔난 문장과 정말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놓은 엄청난 자료수집은 독자로 하여금 그 당시의 풍경을 저절로 떠올리게 했다. 어린시절 날 무지 괴롭혔던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섬머슴애가 떠올라 유쾌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안타깝다. 지금 내 아이들,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터에서 골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어노는 게 아니라 학원순례에 바쁜 요즘 아이들이 이담에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될지 생각하면 마음이 찌릿하게 아파온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행복하고 특별한 유년시절, 즐겁게 뛰어노는 놀이를 돌려줄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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