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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헬스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8월
평점 :
두어 달 동료의 차에 동승하여 출근했다. 습관처럼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 날이었다. 10여 분이 넘게 남은 시간. 책을 뒤적이거나 휴대폰으로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때론 주변을 둘러보다가 담벼락에 조금씩 올라가는 담쟁이를 보고 사진찍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에 눈에 띄는 구름이 있었다. 풍성한 구름 위에 인간처럼 보이는 누군가 딛고 서 있는 모습. 얼른 사진을 찍어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전송했다. 난데없는 구름 사진에 ’?‘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단박에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리스의 어떤 신 같다’는 이도 있었다. “제우스 같지 않아?” 하니 그제야 “맞다, 그 신!!”하며 반응해주는 이들. 서로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도 사진 하나를 보고 같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와닿았다.
<구름은 하늘 위에 있어> 책제목부터 가슴을 울렸다. 저자가 궁금했다.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을 보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헤세에게 구름은 어땠을까. 우리의 머리 위, 높디 높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우리가 애써 눈여겨보지 않는 구름. 대문호 헤세는 구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시시각각 색과 모양을 바꾸는 구름이 그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궁금했다.
구름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드는 건 바로 그 움직임이다. 우리 눈에 죽은 공간으로 비치는 하늘에서 거리감과 크기,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구름이다. -9쪽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책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 그 흔한 목차도 없다. 어쩌면 목차가 필요없는지도 모르겠다. 짤막한 글과 시가 섞여 있고 하나의 글마다 연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그 모든 글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구름’이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구름을 잘 알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혹은 이 세상에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말해 보라! - 19쪽
실제로 구름은 노래하고 있었다. 노래하면서 날아갔고, 가수인 동시에 노래 그 자체였다. - 50쪽
새털처럼 가벼우면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구름을 노래한 헤세. 그를 의 시와 편지, 소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의 일부를 발췌해 놓았는데 반가우면서도 ‘이런 대목이 있었나’ 싶어 당혹스러웠다. 분명 읽었던 대목인데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줄이야. 하지만 무엇보다 놀랍고 의외였던 건 <페터 카멘친트>라는 작품이었다. 헤세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됐다. 소년 페터 카멘친트가 성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겪는 우정, 사랑, 방황, 죽음 등을 다룬 소설인데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타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바로 이 작품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위에 있는 구름을 따라 <페터 카멘친트>에 닿아야겠다.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제껏 내가 본 세상은 그저 좁은 틈새로 흘낏 들여다본 한없이 작은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 이제야 나는 구름의 아름다움과 서글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구름은 한없이 머나먼 곳으로 정처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 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