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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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이 생물학? 정말요?”

날 만나는 이들에게 늘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황인지 황당인지, 혹은 놀라움인지 알 수 없는 반응에 난 이렇게 답했다. 대학 원서를 쓸 때 친구의 “언니가 생물학과인데 재밌어 보이더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고 평소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을 좋아했기 때문에 호기롭게 생물학도가 되었다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의 다른 버전쯤 되는 얘기에 사람들은 큭큭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생물학에 대한 어떤 정보나 예비지식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지만 때론 의문이 들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어이없는 것이었나? 그러다 책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알게 됐다. 과학자이면서도 깊은 인문학적 식견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 바로 최재천 교수였다.

어떻게 척추도 없는 저 작은 곤충이 우리 인간이 이룩해놓은 문명사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사회를 구축하고 살까. - 10쪽

얼마전 출간된 <최재천의 곤충 사회>는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최재천 교수의 강연과 출판사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수록된 글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미국 유학을 가면서 <동물의 왕국>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너 학교 잘못 왔어. 우리 ‘동물의 왕국’ 안 하거든. 우리 생태학 해.”란 대답을 들었다고. 이 말을 듣고 당황한 최재천 교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당시 생태학, 진화생물학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는 수강편람을 뒤적이다가 ‘사회생물학’을 접하게 됐는데 거기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솔제니친 <모닥불과 개미>을 떠올리고 인생의 길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그 엄청난 공포에서 벗어난 개미들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통나무 둘레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일까. 많은 개미들이 활활 타오르는 통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통나무를 붙잡고 바둥거리면서 그대로 거기서 죽어가는 것이었다.”- 28~29쪽

‘하버드대학 박사’, ‘저명한 교수’란 타이틀만 보면 ‘천재’가 연상되지만 그가 털어놓은 일화를 보면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최재천’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위해 기울인 노력은 놀라웠다. 흰개미의 사회성 진화를 연구하고 싶어서 흰개미와 사촌격인 곤충으로 그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2밀리미터에 불과한 ‘민벌레’라는 곤충을 연구하게 됐는데 ‘개미 박사’로 알려진 그가 민벌레를 연구했다니. <개미제국의 발견>으로 처음 최재천을 알게 되어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열대예찬> <통섭의 식탁> 등 많은 책으로 만났음에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가진 자’잖아요. 우리는 이미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발자국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 내디뎌야 해요. - 97쪽

<최재천의 곤충 사회>는 제목만 보면 과학서적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책장을 넘겨 본문으로 들어가면 최재천이 생태학자로서 어떻게 학문의 길을 걸어왔는지 그동안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라고 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술술 넘어가는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커다란 강연장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고 그 앞에 선 작은 체구의 웃는 얼굴을 한 최재천 교수의 강연을 실시간으로 듣는 기분이 들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 내용은 영상으로 먼저 접했지만 글로 읽으니 새삼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고 인류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는 책을 취미로 접하지 말고 모르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기획 독서’를 하라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2밀리미터의 민벌레로 연구를 시작한 그의 시선은 어느새 호모 사피엔스에 닿고 있었다. DNA의 존재까지도 알아버린 대단한 존재인 인간이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생물이 사라지는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 적어도 다섯 번에 걸쳐 거대한 대멸종 사건이 있었습니다. (...) 지금 제6의 대절멸 사건은 비교적 조용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천재지변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구의 막둥이 격으로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이 저지르는 장난질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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