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산책 - 바람과 얼음의 대륙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고경남 지음 / 북센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넌, 그 상황에서 책이 눈에 들어 오냐?”

달리는 차 안에서, 혹은 밤에 아이 잘 때 옆에서 취침등 켜두고 책을 읽고 있으면 신랑은 내게 묻는다. 그것도 아주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 상황에서 책이 눈에 들어 오냐고...그럼 난, “어, 지금 아니면 언제 읽을 수 있는데?”하고 대답하지만 사실...요즘 부쩍 눈이 피곤하다. 그다지 시력이 나빠진 건 아닌 것 같은데...괜히 침침해지는 것이...혹시, 노안??

 

그러고보니 나의 가시거리가 엄청 짧아진 것 같다. 거의 100미터 이내의 것만을 보고 생활하고 있으니까...더 이상 눈이 나빠지기 전에 내 시야를 넓혀야겠다. 뭔가 탁, 트인 곳을 바라보고 싶다....

 

서울에서는 한 순간도 멈춰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멈춰있지 않았으니까.

잠시라도 멈췄다가는 곧 뒤쳐져서 도태될 거 같았으니까.

그래서 폭풍우 때문에 한 발자국 내딛기 힘들 때조차

앞으로 나가려고 아득바득 헤맸었다. - 40쪽.

 

뒤뚱뒤뚱 펭귄 한 마리가 다가온다. 아니, 자세히 보니 한 마리가 아니다. 세 마리의 펭귄이 마치 거울을 마주 보고 있을 때처럼 줄을 지어 걸어온다. 뒤뚱뒤뚱...거리면서.

 

귀여운 펭귄들이 나를 마중 나오고 있는 듯한 표지의 <남극산책>. 이 책은 소아과 의사인 저자가 남극 세종기지에 1년간 의료담당으로 머물면서 남극의 자연과 생물들을 바라보며 사색하고 체험한 것들을 사진과 함께 기록한 남극 체험기다.



얼마만인가. 아이 그림책을 제외하고 글보다 그림이 더 많은 책을 바라본 게... 뒤뚱거리고 멈취서 있는 펭귄의 사진 위로 쓰여진 단 한 줄, “나는 뒤뚱거리거나 멈추어 있었다”는 프롤로그를 보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 풀어지듯 맥이 탁 풀렸다. 그래, 이제 긴장을 좀 풀자구...하는 마음으로 이 책 앞으로 다가섰다.

평소보다 책을 좀 멀리 두고 이 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남극의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인 노을과 부산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눈보라, 블리자드. 잠에 취해 완전히 골아떨어진 해표, 바다에 떠오른 푸른 하늘(저자는 이걸 바다는 푸른색의 거대한 데칼코마니...라고 표현했다. 정말 너무 멋지다!.), 그리고 수많은 펭귄과 갈매기....

 

한국에 있을 때는 새를 잊고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새들이 날 수 있다는 걸 잊고 살았다. 서울에 있는 새들의 절반은 나는 법을 잊어버린 비둘기이고 나머지 절반은 양념통닭 아니면 안동찜닭이니까. 남극에 와서 진짜 새들을 만났다. 그냥 만난 게 아니라 함께 살았다. - 102쪽.

 

사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 남극의 색채는 얼음과 펭귄의 하양와 까망이 전부일거라 여겼다. 하지만 나의 오산이었다. 남극은 흑백이 아닌 다양한 빛깔이 어루러진 칼라의 세계였다. 순백의 얼음 속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갖가지 푸름이 깃들어 있었으며 노을진 하늘은 옅은 주황에서 빨강으로 불타올랐다. 또 펭귄의 빨간 주둥이와 황제펭귄의 금빛 가슴털....


거기에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빙하와 보기만 해도 아찔한 빙벽, 가지각색의 빙산들을 보고 있으니 자연이란 참으로 위대하구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사진만 봐도 이 정돈데 실제로 보면 어땠을까...

 

누구라도 빙벽을 한번 보면 가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한 조각을 간직하게 된다. 빙벽은 세월을 품은 채 바다로 밀려온다. 시간의 아울렛, 빙벽. 그 앞에 서면 30여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내 몸의 유효기간이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 - 131~132쪽.

몇 년 전 대학원을 졸업한 시동생에게 남극 세종기지의 근무제의가 들어왔었다. 그 곳의 열악한 환경에 우려와 반대의사를 내비치는 시댁어른들 속에 “좋은 기회 같은데요.”...하는 내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그게 지금 너무나 후회가 된다. “적극 찬성!! 절대 찬성이에요!!”하고 목청껏 외쳤어야 하는건데...

남극....그 곳에 가고 싶다. 그 곳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싶다. 나도, 저자처럼.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경과 장엄함 앞에 나 자신을 비워내고 한껏 낮추면...나 역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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