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마지막 질문 - 나를 깨닫는다는 것 다산의 마지막 시리즈
조윤제 지음 / 청림출판 / 202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子曰(자왈)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하고 三十而立(삼십이립)하고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하고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하고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하고 七十而從心所欲(칠십이종심소욕)호되 不踰矩(불유구)호라.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 스스로 바로 세울 수 있었으니 마흔이 되어서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고 쉰이 되어서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 예순이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노라.


 


공자는 공자였다. 나의 삶은 그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 마흔이 되어 유달리 흔들림이 많았고 쉰이 넘었지만 아직도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노라고 포기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닐 듯 하니 어찌해야 좋을까. 생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 내리막길에 접어들어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다산의 마지막 질문>은 저자의 다산의 마지막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최종 완결편이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에 이어 <다산의 마지막 습관>을 읽었기에 <다산의 마지막 질문>을 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들었다. ‘다산의 마지막시리즈의 처음이 아니라 완결편인데도 제목이 질문이라니. 왜일까.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최고의 학자인 정약용은 그야말로 극과극의 삶을 살았다. 그의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높이 산 정조의 총애를 받아 마흔도 안된 나이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다산이었지만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18년 유배도 모자라 그의 집안은 멸문지경에 이르고 만다. 중심에서 단번에 구석으로 내쳐진 상황이었지만 다산은 민초들의 참상에 눈을 돌리고 본격적으로 책을 써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양지에서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아들은 굴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지만 다산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내가 살아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천명이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 또한 천명이다. 그러나 사람의 도리를 닦지 않고 천명만 기다린다면 이 또한 이치에 합당치 않다. 나는 사람의 도리를 이미 다했다. 그럼에도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천명일 따름이다. - 19~20

 



다산은 늘 [논어]를 가까이 두고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논어]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주석을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 <논어고금주>를 썼다. <다산의 마지막 질문>은 다산의 [논어]에 대한 생각과 관점을 담은 책인데 구성은 단순하다. [논어]의 한 대목을 원문과 의미를 담고 그에 대한 다산의 생각을 저자가 풀어놓았는데 익숙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소개된 문장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로 시작하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의미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문구다. 때문에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이미 알면서도 다산의 글은 울림이 있었다.



 

학이란 알기 위한 것이며 습이란 행하기 위한 것이니, ‘학이시습은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후세의 은 그저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기 때문에 기쁠 수가 없다 36.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속임을 당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위정)편의 글에서 다산은 배움과 생각의 균형을 강조했다. 배움과 생각이 적절하게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중년의 나이에 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았다. 특히 다산의 초서독서법은 나의 책읽기를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일러주는 것 같았다. 그런가하면 子謂仲弓曰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자위중궁왈 리우지자 성차각 수욕물용 산천 기사제)’ (옹야)편의 글에서는 호되게 일갈하는 듯했다. 아비가 착하지 않다고 해서 그의 아들을 매도하는 것은 군자로선 절대 해선 안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반대로도 해석된다는 것. 아버지가 아무리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부당하게 대물림하거나 자식의 삶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모의 학벌이, 곧 자식의 직업과 학벌이 되는 요즘 세태에 누구나 꼭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훌륭한 목수는 서툰 목수를 위해 먹줄을 고치거나 없애지 않고, 羿는 서툰 사수를 위해 활을 당기는 기준을 고치지 않는다. 군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활쏘기를 가르치는 것처럼 활을 끝까지 당길 뿐 시위를 놓지 않음으로써 화살이 튀어나가고 싶게 만든다. - 213

 



책으로 만났던 수많은 이들 중에서 한 명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두어 달 전 독서모임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 발제자가 토론 말미에 던진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지금까지 책으로 만난 위대한 저자가 한둘이 아닌데 그중에 딱 한 명만 고르자니 난감했지만 멤버들은 바로 지금만나고 사람을 꼽기 시작했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의 호메로스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계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를 왜 선택했는지 이유도 함께 털어놓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한 명 고른다면 누굴 꼽을 것인가. 만약 세종대왕과 정조가 장수를 누렸다면 지금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혹은 과거 역사 속 인물이 되어 하루 동안 살 수 있다면 누구를 택할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결정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지금 다시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삶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계속 지금처럼 살 것인가?”라고 마지막 질문을 던진 다산의 생각과 마음자리를 알고 싶기 때문에 그가 되어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내 나이 예순, 돌아보니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가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보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 3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