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읽는 기술 - 문학의 줄기를 잡다
박경서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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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무수히 책탑을 쌓았던 적이 있다. 하루에도 무수히 쏟아지는 신간들을 살펴보는 데서 재미를 느꼈다. 그러다 나의 책을 읽는 속도는 고려하지도 않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나 흥미로운 책, 지적 허영을 채워줄 수 있는 책, 어쩐지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책들을 부지런히 장바구니로 옮겨 담았다. 나름의 기준을 갖고 책을 구입했지만 모두 성공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동기나 목적이 분명하지 않아서인지 많은 책들이 금방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책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지만 그럼에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1년에 200권이 넘는 책을 읽어도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돌아서면 허물어질 모래성을 끊임없이 쌓고 또 쌓고 있는 기분이랄까.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나의 책읽기는 분명 문제가 있어, 고민해보아도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속도 늦추기였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속에서는 주변 풍경이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듯이 책읽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책을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내달리던 것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잠깐 멈춤하기도 했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한동안 붙잡고 있기도 했다. 읽고 있는 책의 배경이나 작가의 자서전을 곁들여 읽기도 했다. 책읽는 속도가 느려지니 읽는 책의 양이 줄었다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책읽고 나서 느껴지는 헛헛함이 예전보다 줄어든 건 확실하다. 이것만해도 어딘가.


 

<명작을 읽는 기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땐 제목의 기술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책을 읽는 기술이란 게 있을 수 있나 싶다가 지난날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책이든 거기엔 저자가 의도한 바가 분명 있을 것이고, 당시 배경이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녹아 있을텐데 예전엔 그런 부분에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 문학의 줄기를 잡다는 부제였다. 저자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짐작할 뿐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수박 겉핥기식의 개론서도, 전문 독자를 위한 이론서도 아니라 깊이 있는 독서의 대중화를 지향한다는 저자는 문학의 뿌리에서부터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문학의 줄기를 잡아서 명작을 제대로 읽어보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2부 문학을 한다는 것’ ‘3부 문학은 삶에 대해 알고 있다이것만 보면 어쩐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문학입문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서구 문화의 뿌리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대 문학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시작된다거나 고대 그리스의 희비극에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담겼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종종 들었지만 헤브라이즘? 학창시절 헬레니즘이나 헤브라이즘은 미술이나 건축양식을 설명할 때 들었지만 문학과 무슨 상관일까.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독자가 많다는 걸 아는지 저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뜻하는 헬레니즘과 유대교, 기독교에 바탕을 둔 문명인 헤브라이즘은 건축뿐 아니라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알아야 서양 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순간, ! 하고 무릎을 쳤다. 지금까지 내가 유독 종교와 관련된 부분, 특히 중세는 거의 죽음, 읽어도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게 모두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될 줄이야! 특히 플라톤이 의외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플라톤의 서양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의 2000년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듯이 수많은 작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손꼽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를 아직 읽지 못했는데 그 유토피아가 소설에 등장하는 섬 이름이었다는 점도 놀라웠다. 어원을 살펴보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향을 유토피아라고 했다고 한다. 더불어 3대 유토피아 소설과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 중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이 있어서 곧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룬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운이 없는 늙은 어부가 바다에 나가 모처럼 청새치를 잡지만 상어한테 다 뜯어먹히고 만다는 내용이다. 사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200번이 넘는 탈고를 한 끝에 탄생한 작품이고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처음 읽을 땐 감동이란 걸 느끼기 어려웠다. 그점에 대해 저자는 ‘<노인과 바다>를 문학적으로 온전히 이해하려면 빙산 이론과 하드보일드 문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217)’고 짚어준다. 작품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빙산의 일각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고 문체에 감정을 배제하고 간결하게 비정한 문체로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은 내가 책을 겉핥기로 읽었다는 거다.


 

책에 대한 책, 책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을 때면 항상 본문에 언급된 책 중에 내가 읽은 건 몇 권일까 세어보게 되는데 매번 내가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아서 실망했었다. 하지만 이 번엔 읽은 책이 읽지 않은 책보다 많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괜히 기분이 우쭐했지만 곧이어 든 생각은 다시 읽어야겠다는 거다. 이번에 읽을 땐 좀 제대로 짚어가며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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