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 시간을 초월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였다. 잠자다가 텔레비전 소리에 잠이 깨버렸다. 눈을 떠서 본 텔레비전 영화에선 어떤 남자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 마음아파 언니에게 물었다. ‘저 남자가 왜 저러냐고’...그랬더니 언니는 ‘저 남자 애인이 사고로 죽었는데 그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남자가 여자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갔다고...그치만 실패해서 저렇게 울고 있는 거라고’ 얘길해줬다. 더불어 이 말과 함께 “이제 그만 자라. 쬐끄만 게 뭘 다 알려고 그래?”


그래. 난 어렸었다. 그 영화의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걸보면 많아봐야 초등학교 저학년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까지 살리려고 했던 연인을 순간의 착오로 살리지 못한 남자의 애절한 슬픔은 그후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언제든 그 영화를 꼭 한번 더 보고 싶었는데...



1. 소년과 소녀. - 마짱과 슈이치 만나다.


새해를 맞아 친구네 집으로 놀러간 마짱은 카드 놀이 중에 친구의 사촌인 슈이치를 만나게 된다. 어릴때 사자자리 유성군을 봤던 자신의 기억을 멋있고 의미있는 것이라 말해준 슈이치에게 마짱은 사랑을 느끼고 슈이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짱을 닮은 감회색 세일러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 다쿠보쿠 카드그림과 생일을 기억에 남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을 채 고백하거나 키우지도 못한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슈이치가 마짱에게 건넨 책에 끼어있던 글귀. <텐 예다 프뤼링 핫 누아 아이넨 마이>. 그리고 마짱과 슈이치가 일하던 공장에 폭격이 가해진다.


....너무 일러. 슈이치, 모두들 어떻게 되는 걸까. p170



2. 소년과 여인. - 마짱과 무라카미(슈이치) 만나다.


병원에 입원한 남자, 카세트 라디오에 녹음을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과거, 미즈하라 마스미와의 사랑을 남긴다.


소학생에게 책을 빌려준다는 마스미를 만난 무라카미는 그녀가 왠지 낯설지 않다. 꽃그림 우표를 매달 모으는 것을 계기로 만남은 지속되고 중학생이 된 무라카미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전생에 슈이치였다는 것을.


“당신은 지금, 어떤 실수로 인해 옛날 일을 떠올렸어. 나는 괜찮아. 슈이치랑 쏙 닮은 남자 아이가 있었다. 아주, 기분 좋은 아이, 착한 아이, 그것만으로 됐어...” p328.



3. 그 후...


열차전복사고로 전생의 연이 마짱이 죽고 난 후, 무라카미는 치약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 보리밭 길을 거닐며 노래를 부른다. “..덴 예다 프퓌링...” 그때 그에게 달려든 세일러복을 입은 소녀, 그리운 멜로디의 노래를 부르는데..“하트 누아 아이넨 마이”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러봤다...말할 것도 없다. 이 사람이 너희들의 엄마다. p374.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환생한 마짱과 슈이치,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리셋>은 무척

잔잔한 느낌을 준다. 어린 시절 내가 봤던 영화속 사랑이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였다면 마짱과 슈이치의 사랑은 잔물결이 일렁이는 호수...같은 느낌?


게다가 이 책은 읽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이야기 속으로 쑤~욱 몰입되지 않고 자꾸만 겉돌았다. 리셋을 읽으면 내 머리가 리셋이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 이유는 바로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문제였다. 일본 그들이 시작한 전쟁임에도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 듯 서술한 대목들이 눈에 거슬렸다.



힘든 상황에 처한 동맹국 독일 국민이 이 소식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 p123.


독일의 히틀러 총사령관이 영미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고 나와 있었다. 그날 밤 라디오로 ‘독일 역사상 최고의 영웅, 사라지다’라는 히틀러 총통의 서거가 전해졌다. p147


“독일이 왜 졌을까. 거기서 배워야 한다는 거다” p165



문학이 먼저인가, 민족의식이 먼저인가...하는 갈등 속에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펼쳐들었다. 연거푸 두 번째 읽었을 때서야 비로소 눈에 거슬리던 부분보다 마짱과 슈이치의 사랑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얘기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시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싸움입니다’라고 하니 중국 사람도, 필리핀 사람도 모두 우리에게 감사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지. 조선 사람들의 심정도 생각하지 않았어. 이겼으면 지금도 그랬을 거야. 궁핍함 역시 알지 못했지. p316~317.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모두들 공부하지 않으면 안돼.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마스미씨’나 그 친구들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이걸(군용기)를 만들고 있었다고 생각하면....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올라. p397.



그리고 내가 이 책에 몰입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가지 더 있었다. 편집이나 번역자의 성의 부족이다. 소설 속에서 일본의 싯구절이나 특별한 해석이 필요한 부분엔 주석으로 따로 설명을 해 두었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작 중요한 한신대지진이나 쇼와 0년...하는 부분엔 설명이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내가 일본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나라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땐 그 내용뿐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조금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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