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와이드미디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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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의 함정으로써, 상업논리와 싸구려 감상주의로 관객을 돌대가리로 만들어준다는 신파극 장르는 위대한 이성의 힘을 믿는 이들로 하여금 저주를 퍼붓게 만들었다. 도식화된 구조, 무력한 주인공, 항상 최악으로 향하게끔 되어있는 이야기. 신파극은 분명 세상의 진실을 담아내지만 비판자들에게선 인식적으론 편파적이고 정치적으론 위험하다는 그 자체로 도식화된 탄식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 다음 영역에 도착해 있는 영화다. 신파극을 조롱하는 오래된 비판들에 대한 이 뻔뻔스러운 영화의 반격은 간결하면서도 명민하다. 그것은 형식적인 견지에서 뮤지컬이란 장르를 차용했다는 것과 그 양식을 뮤직비디오의 박력으로 밀어부치는 방법론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 시각적 쾌감으로 충만한 씬들은 서사적으론 가장 처절하고 잔인한 순간들로 선택되어져 있다. 이야기의 비극적 카타르시스가 터져나올 때마다 마츠코의 환상을 살려내는 뮤직비디오적 감각은 온통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뽐낸다.

강력하게 제기될 정치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노골적으로 노리고 있는 최고의 순간은 마츠코의 지옥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도는 동시에 그 지옥이야말로 마츠코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었음을 설파한다. 그녀는 버림 받고 또 버림 받지만 끝없이 사랑한다. 그래서 무기력한 성적관념에 물든 대부분의 백수떨거지들의 표상인 마츠코의 조카, 완전히 상관없는 타인이었던 그가 그 무한에 가까운 마츠코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드디어 영화는 신학적인 영역으로 들어선다. 완전한 타인이자 누구와도 관계 없는 외톨이로 알려졌던 마츠코, 종국엔 홀로 쓸쓸하게 내팽개쳐진 채 어이없게 죽어가야 했던 마츠코는 천국의 계단에 도달한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과연 나의 존재를 기억해줄 이가 몇이나 될까. 단순히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는 한줌도 안되는 이들에 대한 질시가 아니다. 세상엔 정말 많은 수의 사람이 있고 대부분은 모른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애써 의미를 찾아보자. 가족, 친구, 연인, 단골 가게 점원. 하지만 허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숫자적인 만족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고독하고 외로워진 순간, 누구도 자신에 대해 이해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매달리고 싶어지는 순간. 무엇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의 절망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일, 어떤 이는 돈, 어떤 이는 섹스, 어떤 이는 꿈, 어떤 이는 종교에 매달린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렇게 되어버리는 우리들의 이야기, 결국 홀로 죽어가야 하는 모두에 대한 화사하면서도 절절한 위로다. 51년이라는 세월, 전후 개발시대의 음지에서 흙탕물을 튀기며 살아간 마츠코와 그녀를 둘러싼 외로워하는 열외자들의 판단착오로 쓰여진 두시간. 마침내 그들은, 그리고 마츠코는 실패한 채로 굴러가는 것 같은 세상이지만 모두가 가치있다는 진부하기에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설득력 있게 달성하며 그 누구도 다다르지 못했던 길에 들어선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진짜 신파, 모든 무의미한(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삶들에 대한 숨막히는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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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01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좋다좋다 말들은 하는데, 아직 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디비디까지 사실 정도로 좋았던 영화였나 봅니다.

sweetmagic 2007-08-0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너무 좋았어요, 아직도 노래가 귓가에...가슴이 징.........

hallonin 2007-08-0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디비디를 산 건 아니고, 디비디방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디비디방 안엔 묘한 것들이 많더군요....


뻔한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정말 기억에 남죠.
 
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에는 인장이 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다다르고 싶어하는 자신만의 무언가, 한 번 보면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작가 자신만의 독보적인 아우라를 다이앤 아버스는 성취해냈다. 그녀의 사진은 보는 이에게 왜곡과 비슷한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다이앤 자신이 피사체를 속이고 얼르면서 찍어낸 수없이 많은 필름들의 실험을 거친 끝에 뽑아낸 영역이다. 그 결과물이 온전히 피사체가 품고 있던 자연스러운 원형의 이미지라고 단언하긴 힘들다. 말했듯 그녀의 사진 작업에는 속임수와 진한 노동강도와 시간과 필름의 낭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다소곳해서 되려 기괴하게 보이게 만드는 직사각형 안에 인화된 광경이 그 누구도 뽑아내기 힘든, 다이앤 아버스만이 뽑아낼 수 있었던 이미지라는 것을 증명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어보인다. 그것은 결국 피사체가 갖고 있던 어둠, 감추고자 했던 영역의 직설적인 현현이다. 그래서 그 성과, 모종의 비밀마저 가지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어두운 사진들은 우리에게 그녀가 수행한 작업의 비의스러운 면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여기서 전기의 역할이 등장하게 된다. 전기란 기본적으로 완전체로 삼아진 대상에 다다르려 하는 한계를 안고 있는 끊임없는 복원의 서술이다. 그것은 1차적으로 매혹을 근거로 하며 2차적으론 집요한 의지와 노동에 바탕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다이앤 아버스를 다룬 이 책은 양쪽 모두를 충실하게 수행하며 다이앤 아버스에 대한 집착을 그려낸다. 물론 아직 다이앤 아버스와 관련된 많은 중요한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 또한 전부 공개가 안 된 상황에서 이 전기가 다다르려 하는 곳은 아직 멀찍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드물다고 할 정도로 완고했으며 삶과 사람 또한 흔치않은 고통과 경험으로 채워진(그것을 예술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예술가였던 한 여성이 창조해낸 세계에 대한 이해의 초석을 치뤄내는데는 훌륭한 입문서가 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그녀의 사진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삶과 사고에 대한 방대하고도 촘촘한 추적의 결과다.

스스로 다이앤 아버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경험을 겪어내야 했던 당사자인 퍼트리샤 보스워스가 쓴 이 집요한 전기에 따르자면 다이앤 아버스는 사실상 타고난 로맨티스트였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쾌락주의자였고 그 순수를 가능케한 감각의 모든 극단적인 민감함은 그녀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걸 알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민감함은 동시에 그녀에게 고통을 선사해준다. 그녀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을수록 역으로 스스로의 세계로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타인과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독한 소심함과 카메라만 들고 있으면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곳까지 파고 들어갔다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녀를 본 이가 그녀에 대한 묘사로 하는 말들 중 줄기차게 이어지는 것은 '소녀 같지만 놀라울 정도의 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각의 천국에서 그녀는 판단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그것은 그녀가 자라온 부유층으로서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느껴야했던 죄의식, 그녀가 견지했던 예술가와 돈은 상극이라는 입장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지게 된 경계의 소거는 그녀의 감정의 양면성과 어두운 미학의 법칙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상인의 모습이나 장애인의 모습은 다를 게 없었다. 경계를 붕괴시키고 양면성, 혹은 다면성들이 가진 각자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 순간 그녀는 예술로써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다.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해한 시점에 있어서 본질에서의 차이없음을 발견한 그녀가 흥미롭게 여겼던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반응들이었다. 즉, 그녀는 구경꾼들의 음험한 시선도 포착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 시선은 또한 자신의 시선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항상 의심에 시달렸으며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고통을 통해서만이 예술이 성립된다고 믿었던, 자학적이면서도 도피적인 예술가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자신의 피사체들을 이해한 만큼 피사체들이 그녀를 이해해줬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그녀는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버려지고 저주받은 세계로 편입해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들이 이 낯설고 아름다운(다이앤 아버스는 확실히 그랬다) 이방인을 대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욕망이거나 호기심 차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의 전기는 다시 중요해진다. 이해의 문제에서, 그녀의 작품을 대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모종의 우울과 공감이다. 마치 포티쉐드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우울증에의 공모가 놀라울 정도의 흡착감과 광범위한 지지를 불러온 것처럼, 어둠은 보편적인 우리 안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해받지 못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녀가 포착해낸 비틀린 이들의 세계란 소위 보통사람들의 어둠이 체화된 영역이기도 했다. 그녀의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화학효과는 그만큼이나 모든 이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진정으로 이해를 갈구했던 이가 아니었는지. 그저 말이나 닿지 않을 몸이 아닌 분명한 이미지로써, 그녀가 찾고자 했던 것은 우회해서 드러난 공감과 이해에의 갈망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그녀의 정신적 쌍둥이로 얘기되며 이제는 다이앤 아버스의 오빠로 더 유명해져버린(아이러니한 예언처럼) 하워드 네메로브가 이 기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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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 앙꼬 단편집
앙꼬 지음 / 새만화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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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보면 [열아홉]은 어떤 종류의 혼돈을 지향하는 것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우선 오프라인 매체에 발표됐던 단편들이 보여주는 심해를 흘러가는 듯한 둔탁하고 우울한 감각, '즐거운 맛'이라는 분류로 묶여진 앙꼬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사 만화들(무지막지하게 웃긴다), 그리고 말미에 실어놓은 작가 자신이 겪고 있는 솔직하고도 혼란스러운 토로기인 '나의 일기장'이라는 구성은 이 작품집의 완결된 구성력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마치 어떤 이의 일기장을 집어들어서 휙하니 펼쳐놓은 것 같은 낯선 감각이 내내 지배하는 이 파편화된 이야기들은 그 사소설적인 경향을 봐서도 독자의 감성적인 이해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싫든좋든 [열아홉]은 단편 '거문도를 가다'가 보여주는 그 하릴 없는 시간낭비에 대해 깊숙이 이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적합하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어떤 목적도 계획도 없이 오직 열망 하나로 거문도로 가서는 별 일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돌아오는 걸로 끝난다. 

'거문도를 가다'가 [열아홉]을 이해하는 분명한 열쇠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을 소모한다는 경험에 대해서, 비록 그 시간의 길이는 다르지만 독자에게도 동일한 경험의 재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에 대한 10페이지 짜리 회고인 '거문도를 가다'는 거문도로 가는 여정의 고난함과 도착해서 겪게 되는 허무감, 그리고 소득 없는 복귀라는 결말을 통해 온전히 독자 자신의 동감이 아닌 한엔 그 소모의 여정이 끼어있을 필요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여기에 시간에 대한 작가의 통시적 관념이 있다.

[열아홉]은 총체적으로는 삶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의 흘러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안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은 시간에 대한 강박을 보여주고 있다. 시한부 에이즈 환자의 이야기,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개의 이야기, '할머니'와 '찔레꽃'으로 변주되는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표제작인 '열아홉'이라는 숫자의 명징한 의미. '즐거운 맛'에서 자신보다 적게 산 사람들을 질투하는 작가의 모습은 '나의 일기장'에서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보내는 이들과 자신과 비교하며 4년 넘게 불안해하고 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거문도를 가다'의 무의미함은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자신의 가장 서글픈 풍경일 수 있다.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막연한 기대만 갖고 시작했지만 그 준비 없는 여정에서 발견된 것이 공허함일 때,막연한 절망은 일이 시작된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반성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열아홉]에서, 그곳까지 이르렀을 때의 판단은 긍정과 부정의 줄타기에서 대개 부정으로 떨어진다. 순환되는 오류와 후회의 연속은 자신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바깥에서 인지할 수 있을 때야 찾아오지만, 마땅히 대답을 내어놓으라고 하면 결국은 저 시간의 흐름밖엔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는 결론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고독의 결정이다. 마치 표지에서 푸른 빛으로 새겨낸 '열아홉'의 한 장면, 저 가로등이 놓인 다리를 외로이 걸어가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처럼. [열아홉]에서의 시간은 그 지점에서 매번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

구제불능. [열아홉]이 덤덤하기 때문에 세심한 이야기들 속에서 무심코 담아내고 있는 것은 일상의 무거움과 그 무거움에 대한 작가의 빈약한 비명소리다. 그 조각들을 살펴보는 건 태도와 입장의 이율배반이 빚어내는 침울함이 작가 자신의 눈에서 얼마나 정직하게 그려지느냐라는 속죄의 차원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그런 스스로 동떨어지는 입장에서의 관찰이 이 작품들의 또다른 면모를 보장하게 만든다. 유머스러운 독백과 관찰들로 이뤄졌던 전작인 [앙꼬의 그림일기]가 보여줬던 대단한 센스의 개그는 여기선 작품들 곳곳에 드물게 들어가는 특유의 기묘한 페이소스와 유머로, 그리고 묶음인 '즐거운 맛'으로 이어져서 그 일상적 무거움을 일상적 즐거움으로 상쇄시켜 준다. [열아홉]이 전반적으로 과민한 감성의 고통을 담아내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치 삶처럼, 적막과 자발적인 통증만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빈 시간은 때때로 느긋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며 [열아홉]은 그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필리핀으로 떠나버렸다는 그녀가 돌아오게 되면 보다 즐겁게 자신의 일기를 써주길 바라는 맘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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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1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단편집이군요. 삶과 시간의 흘러감에 대한 이야기..
흥미로운 책이네요.

hallonin 2007-06-1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고맙습니다. 한참 뒤진 다음에야 확인했습니다...-_-
 
루트 225
후지노 지야 지음, 박현주 옮김 / 지식여행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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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트225]의 첫인상은 노을이다. 두 남매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시점, 놀이터의 빈 그네가 내는 삐걱거림만이 남아, 한순간 아무도 없어진 낯선 공간을 풍만하게 장식하는 적갈색 색채는 무언가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순간의 모호함과 다채로움을 내비춰준다. 그 낮과 밤의 어정쩡한 경계에서처럼 [루트225]에서의 공간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경계 그 자체를 보여준다. 변해버린 강과 알 수 없는 거리, 사라진 부모들. 이제 끝났다고 생각된 관계가 복원되고 죽었다는 아이가 살아 돌아온다.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혹은 완전히 뒤집혀져 버린 일관성 없는 패러렐월드에서 내가 유령인가 그들이 유령인 것인가. 아니면 모두 다 유령인 걸까. 노을은 이제 유령들이 움직일 시간임을 경고해주는 표식이기도 하잖은가.

미묘하게 이상해진 세계에서 모든 것은 불일치를 향해 흘러간다. [루트225]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대상에 대한 시선이 왜곡을 거듭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카하시 요시노부의 체지방도에 대한 의견은 끝까지 합치되지 않으며 아이들이 닿은 세상이 어떻게 되먹은 건지에 대해서도 그저 각자가 가진 시야에 갇힌 의견들이 나올 뿐 어떤 결론을 짓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확인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확인하고자 해도 안되는 것들이다.

275페이지지만 아담한 판형에 담긴 이 길지 않은 이야기는 동화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불려져 오는 것은 루이스 캐럴이지만 여기서 발견되는 낯설음과 당혹감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가 보여줬던, 현실에 느슨하게 걸쳐진 채로 의도적으로 유리된 환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파생된다. 즉 그 비틀린 세계의 기반이 아이들이 머무르고 있던 현실에 기반하여 알 수 없는 이유로 변동되어있는 것이며 그 돌발성 탓에 언제 또 바뀌어 자신들이 시공간의 미아가 되버릴 수 있다는 상상이 이 소소한 모험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루트225]가 보여주는 카프카적 상상력은 독자를 가혹하게 시험하지 않는다. 컨셉면에서의 클리셰적 한계에 봉착할 위험을 안고 있는 이 방황하는 남매의 이야기는 그들의 내면적인 고독과 그들 나이가 가지는 독특한 사고, 일상에서의 실제적 충돌과 아기자기한 의식들에 대한 면밀한 묘사들에 의해 풍부해진다. 애초에 제목의 의미가 15의 제곱을 뜻하는 숫자에 접질러진 길의 의미를 붙인 다의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경계선 상에 선 아이들의 방랑에 대한 시선을 가리키고 있는 이 소설은 그들이 이제 유년기의 끝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호한 태도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화자이자 남매의 누나인 에리코는 이제 열 다섯 살이 됐으며 특유의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내지만 그 때문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그로 인해 몇가지 관계가 비틀린 상태다. 동생인 다이고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가면서 바뀐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흔들고 있는 변화에 아직 익숙치 않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변하는 걸 피할 수는 없다. 이 거부감이 그들을 덮친 모험의 동인일까? 그마저도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모호함이 뿌연 안개처럼 소설 속의 관계와 방향을 내내 유동하게 만든다. 모호함과 유동하는 세계,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선. 이것들이 한데 모여 그들이 겪어내고 있는 유년기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총체적인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루트225]는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대신 그 머뭇거림에 대한 세심한 관조를 통해 이야기의 가치를 획득해내는 고전적인 현명함을 보여준다.

 

동경을 떠나 한동안, 나는 동경에 대한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이 세계의 동경이 아니라 원래 세계의 동경에 대한 것이지만, 어느 쪽이든 떨어져 있으면 그 경계는 서서히 틈이 생겨, 지금은 어느 쪽도 마찬가지로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장소라는 생각도 든다.

[루트225] 247P~248P

 

유년기는 그 시간에 머무르고자 하는 아이들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강제적으로 끝난다. 사실 그들은 계속 경계에 머무르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이 보여주는 그 모든 헛된 시도들과 별볼일 없는 모험 또한 그 방랑을 위한 동인이다.
그들의 경계를 부수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외적인 힘에 의해서다. 그들이 닿은 세상에서 관계는 복구되거나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또한 그들에겐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돌아갈 곳은 저 너머에 있게 된다. 우연한 죽음에 대한 돌연한 회고처럼, 망각이 그들을 완전히 잡아먹어버리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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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ddkfl3 2007-07-24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세로드러왔어요.
저많히사랑해 주세요.*^0^*
 
NHK에 어서 오세요 - 소설
타키모토 타츠히코 지음, 아베 요시토시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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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대학중퇴, 대인공포증, 광장공포증, 능력전무. 더해서 자살충동 있음. 그러나 근본적으로 겁쟁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뭐가 가장 큰 문제지?
그것은 악의 조직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젊은이의 의욕을 꺾고 방구석폐인으로 만들어주는 거대한 악의 단체 NHK 때문이다. 그렇다, 때문이다. 온 천지가,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선인가?

이 질문은 일본에서 전후에 만들어진 [울트라맨]과 [가면라이더] 등의 특촬물의 세계관이 만들어낸 공식, 어딘가 존재하는 악의 조직과 그것을 물리치는 정의의 히어로라는 환상극적 공간이 어떻게 개인이데올로기로 변주되었는지에 대한 현재 지표다. 꿈꾸는 대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추구와 구체화는 달아날 세상에 대한 현실적인 환상극으로 옮겨간다. 악은 어딘가 존재한다구. 반드시 존재한다구.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골수를 빨아먹으며. 세상을 야금야금 망쳐놓고 있지.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부조리와 불행은 설명되지 않으니까. 우울증에 걸리고 은톨이가 되서 편의점 직원외엔 사람을 만날 일이 없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건 너다.
왜 구할 수 있느냐고 묻지 말아라. 너가 구할 수 있다.
아니 구해야 한다. 세상은 바로 너니까. 그렇게 해야 너의 가치가 있는 거니까. 넌 버러지에 빌어먹는 놈이지만 그렇게 해서 넌 세상을 구하고 너자신도 구원받는다.
악의 조직 NHK에 대항해서.

웃기는 소리란 걸 안다. 하지만 그 농담 같은 이야기가 현실과 병치될 때만이 힘이 나고 웃을 수 있게 되며 자신에 대해 보다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무적이다 무적.

그런데 죽으면 하느님이 관리하는 천국과 사탄이 관리하는 지옥 중 어디로 가게 될까? 더해서 연옥도 있다. 심판날까지 버틸 이들을 위해 준비된 장급 모텔 사이즈 어둠침침 대기실. 그러나 분명 내세 따윈 신경 안 쓰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수도 많거든.

바야흐로 하느님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하느님이 자리한 세계 안에 들어서면 점지된 전사가 되어 악을 물리치게 된다. 운명적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도처에 깔려있다. 온라인게임, 로리타포르노, 통신판매 환각제, [파이트클럽], 정신병원, 종교종교종교, 자기개발서 등등. 구원은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구원은 돈과 등가교환된다. 꿈꿔라, 구원이 있다. 그리고 가난과 자기모멸이 찾아온다. 구원을 손에 넣었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그러니까 [NHK에 어서오세요]는 너무 많이 알아버린, 수많은 자조적 결말들로 뇌가 쩔어버린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온갖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고 파고들며 싸구려 환각제가 만들어낸 배드트립 속 자질구레한 망상 속에 절어살지만 그것들이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다.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죽어버리고 말테다, 라는 말이 입에 붙은 남자는 자신이 시도하는 죽음을 향한 장엄한 모험이 언제나 우스꽝스럽게 끝날 거란 걸 안다. 자신이 구제불능이란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정된 광대극은 꼴볼견인 결과를 가져오고 더욱더 죽어버리고 싶어진다.

어떤 위로도, 치료도, 그 비슷한 무엇도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 모든 치료제의 가치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그 프로세스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지나친 발달 덕에 머릿 속에 리스트로 작성되서 기억되어 있다. 이건 나름대로 기분을 나이브하게 고양시키지만 저건 성욕까지 감퇴하게 만들고, 요건 알콜도수 9도쯤과 섞이면 심장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갈 것이고 조건 내 습관상 세시간동안 다리만 떨게 만들 것이고. 우울증이면 더 우울한 세상에 던져서 반성하게 만드는 거야 시에라리온 같은 동네로. 그러나 아마 뭔가 깨닫기도 전에 총알이 머리에 박히고 반성 없이 나무토막처럼 죽어버리겠지. 고생하면서 살아서 감동적으로 인생승리 달성한 인간극장 단골손님들의 사연을 들어볼까나? 근데 그게 나랑 뭔 관련이 있나?

그렇다. 면역력이 생겼다. 백신따윈 듣지 않는다. 그럼 어쩔래?

그렇게 사는 거다. 질질 끌고 가는 삶, 자신의 DNA를 물려줄 가치마저 없는 삶. 믿었던 모든 것이 붕괴되고 오래된 가치는 모욕 받았으며 수많은 좌절과 악몽을 봤다.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으면 또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 어정쩡한 방황이라니. 아주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악을 만드는 거다. 자신보다 저열한 인간을 만드는 거다. 책임을 떠넘길 원죄덩어리를 만들고 위로받을 수 있는 인간을 굽어보는 걸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과연 NHK. 다시 빙빙 도는 중.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는가.

문제는 여기로 다시 돌아온다. 만족. 차라리 집구석에 쳐박혀 사는 것에 마냥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걸로 모든 게 끝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황만이 아니라 남극에 숨어서 전세계에 특공원정대를 뿌리는 악의 조직만이 아니라 싸구려 환각제에 든 출처불명 전분의 지나치게 높은 퍼센티지가 아니라 그보다 근본적인 무언가가. 그리고 그것은 그 수많은 오류와 방황과 진저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구원에의 의지다.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조차도 그렇다. 자신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행위조차도 그 의지는 어떤 괴상한 종류의 천국을 꿈꾸고 있었다. 핵심은 천국이 아니라 꿈꾼다는 동인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마침내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진다. 전사는 결코 전사가 아니었고 히로인은 오래 전에 망가져 있었으며 조력자는 무책임하게 떠나버린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해피엔딩. 그러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오지만 거기엔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 있다는 것에서, 적어도 누군가는 날 위해 울어준다는 점에서. 이 단순한 것을 위해서 NHK는 분쇄되어야 했다.

 

사실 분쇄된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뭐 어찌되었든, 해피엔딩.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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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7-05-1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일까.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 제목만 봤어요. :)

hallonin 2007-05-10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는 그다지 없습니다만 일부러 모험을 감행하실 필요도 없죠. 헐.

iamX 2007-05-1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C에 어서오삼(무플 방치-?- 위원회)

hallonin 2007-05-1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는 등으로 말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