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Emma 10 - 완결
카오루 모리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엠마]에 대해선 부채의식 비슷한 게 좀 있다. 예전에 7권이 나오고 나서 이 만화를 맡았던 편집자분이 디시 만갤이나 블로그에서 엠마가 7권으로 완결이 아닌데 완결 났다는 얘기가 잔뜩 도는 통에 매상에 타격을 입었다는 편집자로서 무척이나 가슴이 아픈 뭐 그런 비슷한 심정 고백들을 한 걸 아주 심심찮게 접했기 때문에, 당시 7권으로 엠마의 이야기는 끝났다고 리뷰를 썼던 본인은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루머라는 LPG 가스통에 지포라이터불을 붙인 범죄자가 된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며 유리구슬처럼 심약한 가슴이 긴박하게 벌렁거렸기 때문이다. 아니 뭐 난 '엠마'는 이제 결혼하니 퇴장하고 조연들이 주연으로 나와서 펼쳐지는 번외편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전제하에서 '엠마'의 이야기는 끝났다는 뜻으로 그렇게 쓴 거였지만. 근데 10권 보니까 엠마 다시 나오네요?

....

암튼 이제 진짜 끝이다. 끝. [엠마] 끝. 238페이지라는 볼륨으로 밀어부치는 10권의 주역은 다시 빅토리아시대 최강의 된장녀 엠마라고 할 수가 있겠다. 수록된 8편 중 절반인 4편에서 주연으로 등장함으로써 제국의 역습이랄까 뭐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데 작가가 별 상관도 없는 에피소드들을 단지 빅토리아시대덕후다운 열정으로 가득 차 그리고 싶다는 이유로 집어넣었던 지난 번외편 8, 9권에서의 주변적 즐거움들을 즐겼던 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사실 [엠마]는 그 주변적 즐거움을 중심으로 치환시켜서 자신의 가치를 확보한 이야기였기에, 엠마라는 캐릭터에게만 집중되었던 본편에 비해 당대의 다양한 풍경을 포착하는데 열중한 번외편에서의 생명력이 더 활달하게 느껴지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작품 자체의 시작에서부터 내재적으로 가졌을 당연한 결과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그렇기에 엠마가 중심축으로 등장하는 10권은 이미 예고된, 예정된 해피엔딩씬으로 향하는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의 평탄한 전개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양으로 다뤄지는 존스 가문과 빌헬름 가문의 고용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간 번외편에서 보여줬던 능숙한 긴장감과 신중한 인간관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어울리지 않게 정치적으로 들어가자면 [엠마]는 세계 민중의 골수를 쪽쪽 빨아먹던 제국주의시대의 정점인 양식을 철저하게 매혹적인 시선으로 드러내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짧막한 언급은 9권에 실린 번외편 9화에서 인도의 아타와리 왕의 대사로 얘기되고 있다. 과객과 친구의 두 대립 개념에 대한 이야기. 그 이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더없이 따뜻하지만, 껄끄러움을 미끈하게 벗어나려 한다는 비판 또한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그정도가 매혹과 정치성의 양립에 대한 타협이 아녔을까 싶지만.

10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시대의 전환에 대한 침착한 직시이기도 하다. 바퀴가 세개였던 자전거가 두개가 되고 적막하기만 했던 시골길 구석까지 열차가 들어오며 나이 든 하인은 은퇴를 한다. 평생 먼지떨이를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메이드는 자신의 역할에서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의 생의 의미를 확보하고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는 충성스러운 집사는 언젠간 올테지만 자신은 보지 못할 미래를 꿈꾸며 신분의 엄격함에 집착하던 아버지는 결국 말 안 듣는 아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메이드였던 엠마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엠마] 10권의 말미는 그 모든 변화들이 한자리에 모여 과거와 미래를 축복하는 축제를 벌이는 이야기다. 예고된 이벤트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차분하게 즐길 가치가 있다. 그것이 미래를 향하는 자세 아니겠는가. 마치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올 정원의 아름다움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데 이 작가, 표지에서 엠마에게 또 메이드복을 씌워놨음.... 정작 10권 내에선 메이드복 입은 엠마는 단 한 컷도 안 나온다.

확실히 메이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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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소년 - 하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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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세기 소년] 1권을 봤을 때의 충격은, 비록 [몬스터] 1권을 봤을 때 만큼의 크기는 아녔지만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당시 우라사와 나오키는 [몬스터]의 막바지를 한창 진행중에 있었는데 [20세기 소년]의 첫 권이 보여줬던 흡입력은 [몬스터]와 맞먹을 정도의 '물건'이 나왔음을 직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확실히 [20세기 소년]의 전반부는 우라사와 나오키라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증명해냈던 시기로 두 '물건'을 동시에 관장하는 작가의 기획력과 전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후 무려 8년에 걸쳐서 이어지리라고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을 듯싶다.

[몬스터]는 그 출중한 흡입력에서뿐만 아니라, 작가적으론 우라사와 나오키 3기의 역동적인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작품이었다. 그 전까지 [마스터 키튼]이라는 단단한 작품의 매니악한 팬들을 거느린 작가이자 [야와라!]와 [해피]를 통해 적당한 대중적 성공을 동시에 수확한, 이미 성공한 작가였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몬스터]를 통해 그 두 영역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키면서 자신의 캐리어의 무게감을 한 단계 상승시킨다. 작화적으로도 비로소 오토모 가츠히로의 긴 자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완성시킨 [몬스터]는 현재까지도 진행중인 총체적인 우라사와 나오키 스타일의 출발점이다.

[몬스터]의 자장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미스테리물로, [20세기 소년]은 소재적인 확장을 통해 우라사와 나오키의 새로운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은 4, 50대가 되었을 이들이 가졌던 고리짝적 추억들로 이뤄진 확대재생산을 통해서다. 기실 [20세기 소년]이 노리고 있는 미스테리적 쾌감과 스펙터클은 주인공들이 겪었던 과거로의 주기적인 환급을 통해 세계대전의 전후 20세기의 경제성장기를 거쳐 온 이들이 가지고 있을 레트로적인 공통분모에 기반하고 있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리들에게도(이크!) 무척이나 익숙한 것들이다. 괴담, 비밀기지, 불량식품, 괴수대백과사전, 변신로봇과 외계인, 사춘기 초입 무렵에 치루게 되는 하드록의 세례와 같은 것들. 그것이 언젠가는 미래의 아이들에게 피시방 온라인게임과 창고형 매장, 힙합, 편의점의 형광등 불빛으로 대체될런지는 모르겠지만. [20세기 소년]은 반갑고도(또는 세대에 따라선 신선할, 그러니 이미 두 개의 공략포인트 확보) 천진스러웠던 노스탤지어적 감정을 자극하는, 삶에 치여 잊어버린 시절을 어떻게든 기억해내야 하는 강박을 가지게 된 중년들의 긴박감 넘치는 후회담이다. [20세기 소년]의 악몽은 바로 그 병적인 고착에 대한 것, 천진한 공상과 추억으로 남아 있었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로 여기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이 꾸준하게 보여주는 '사소한 노스탤지어적 원형으로의 귀환'이란 테마가 다시금 발견된다. [마스터 키튼]의 에피소드들에서 심심찮게 쓰였던 '귀향' 소재도 그렇거니와 키튼 자신은 고고학자라는 자신의 본분을 억지로 접고 보험조사원으로 방황하는 인물이었다(여기서 [마스터 키튼]의 표적은 현대 서구문명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는 비교되게 일본이라는 자국의 역사적 치부는 건드리지 않는다. 전체적인 양상으로서의 귀환 테마와는 상반됨과 동시에 서구(주로 유럽)문명에 대한 비판을 통해 성립되는 이 '원형'에 대한 외면은 이후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의 정치적 좌표-[몬스터]는 네오나치에게 쫓기는 선한 일본인의 억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에 대해 심심찮케 의심을 품게 만드는 꾸준한 일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 유럽을 다 말아먹을 것 같았던 요한의 발걸음이 비로소 멈춘 것은 자신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던 시골 구석에 있는 오랜 옛날 지옥의 한 현장에서였다(그 상대적으로 소박했던 결말에 적지 않은 이들이 불평을 쏟아냈던 걸 기억해볼만 하다). [20세기 소년] 또한 마찬가지다. 아예 구조적으로 과거소급을 깔아두고 전개되어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길었던 이 이야기는 때가 되면 튀어나오는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반전 행렬과 함께 그 주기적인 환급이라고 하는 구조 자체가 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반복되면서 서스펜스의 패턴화를 불러왔다. 그 결과, 때 되면 나올 반전에 대한 예정된 기다림으로 인한 긴장감의 결여는 소위 나오키 매너리즘의 어떤 증표로 굳어버리는 상황까지 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종 관성마저 떨어질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체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물음표는 [20세기 소년]을 끝까지 끌어 온 중요 동력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1세기 소년]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의 시작을 우라사와 나오키답게 보여준다. 티렉스의 '20th century boy'와 함께 시작됐던 무척이나 소소했던 그 때를. 깨닫고 후회하고 용서를 빌지만 그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 신기루에게 물어봤자 시간과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즐거웠던 추억이든 비극이든, 시간에겐 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겐 후회만이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죽을 수가 없는 법이다. 이 기구하고 어지러웠던 만화에서 해피엔딩으로서의 인생긍정이 진정 빛나는 부분은 '신령님'의 말씀으로 유쾌하게 끝나는 마지막 페이지다. 비바 볼링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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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8-05-25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작 끝날때 나오던 '친구'의 정체는 관심을 잃어버렸던지 오래..
중요한건 가르쳐줘도 누군지 모르겠더군요 -_-;;

hallonin 2008-05-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그럭저럭 언급되던 친구던데요. 하지만 확실히 문제는 그 전에 이미 관심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는 거지만.

배가본드 2008-06-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은 물론이고 당연히 '주인공은 켄지였다'라고 할거라 예상은 했지만 스토리는 칸나가 다 끌고가놓고 마무리는 당연히 주인공이 깔끔히 정리해버리는 결말은 괜히 보기에 껄끄러웠습니다. 차라리 '피의 그뭄날?'에 같이 돌격했던 친구들中 하나가 '친구'였다고 하는게 스토리상의 완전성?이 더 높았을거라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뭐 결국 문제는 너무 질질 끌었다는것.

 
용의 이
이영수(듀나) 지음 / 북스피어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듀나의 작품들이 꾸준하게 실망을 줬던 이유 중엔 그 이름에 부여되고 있는 몇 안되는 현역 활동중인 국내 SF작가라는 딱지에서도 비롯된 바가 있다. 그 정치적으로 중차대하고 무게감 팍팍 나가는 간판에도 불구하고 듀나의 글은 영상시대의 셀러브리티-스노비즘을 지향하는 면모를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었고 그것이 작품 근저에 개인 취향에 따른 정보유희에 기반한 오타쿠적 신변잡기 인상, 그래서 품게 되는 일말의 가벼움을 끊임없이 떠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무겁디 무거운 간판을 듀나가 달아달라고 해서 단 건 아니지만 독자 입장에선 그만큼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듀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기대감이 온전하게 채워진 적은 없었다. 아이디어는 괜찮아도 그 착상이 충분하게 활용된 바는 썩 없었고, 호흡 조절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는 듯한 플롯이랄지 현학적이라기보단 수다스럽다는 차원에서 과잉스러운 문체, 대화에서 너무 빈번하게 쓰이는 "~니?" 어미가 새침스럽게 만들어내던 구어체와 문어체 사이의 어색한 경계감과 같은 것들은 반복되던 문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의 이]는 듀나의 단점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집이다. 그러나 또 실망만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의 이]는 듀나의 확고한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너네 아빠 어딨니?]에선 듀나 특유의 스노브적 글쓰기를 재확인할 수 있다. 건너 뛰어서 [용의 이]는 전반부의 압도적인 흥미진진함을 후반부에서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썩 아름답지 못한 균형미가 느껴지며 보너스로 저 "~니?" 어미 대화가 등장해준다(트라우마). 그러나 거기까지.

[용의 이]의 창작과정에서 나왔다는 [천국의 왕]과 [거울 너머로 가다]는 세련된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B급 공포영화와 고리짝적 소프 오페라, 스페이스 오페라의 세례 속에서 탄생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두 이야기는 어지간히 머리 쓴 참신한 설정들과 더불어 장르의 자기반성에 느슨하게 기대면서 듀나가 마침내 가지게 된 작가적 절제를 통해 추출된 반짝거리는 유희와도 같다. 그 소재적 완성도들은 [용의 이]에서도 이어지고 있는데 백년천년을 살았을 지 모를 무심한 소녀의 시선을 통해 외딴 행성의 세계를 그려내는 데 있어서 듀나의 스노브적이며 통시적인 문체와 성향은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을 설정적인 면에서의 (더쿠적) 철저함으로만 국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 클라크는 '라마'의 내부를 그리는 데만도 한 권을 다 써버릴 수 있었다(그것도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SF에서 발명에 가까운 개념의 개발은 플롯을 끝까지 끌고 갈 수도 있는 중요한 동력원이라는 걸 확인한 이라면 [용의 이]가 보여주는 듀나의 성과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에 더해 [용의 이]의 전반부에서 확인되는 건 장편소설 작가가 가져야 할 긴 호흡으로서의 미시적 감각 서사를 통한 성공적인 서스펜스의 포착이다. 그 가능성은 듀나에게 비로소 '다음'도 기대해 볼 만한 SF작가라는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하다.

물론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자잘한 불만거리들은 있다. 구성적인 면에서 본체에 가까운 장편보단 장편의 파편이 세공되어져 만들어진 단편의 힘이 더 강력했다는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앞의 작품집들을 실망스럽게 읽었던 나에게 있어서 [용의 이]가 보여주는 분명한 발전상과 성과는 충분히 흥미롭다. 그 미래에 점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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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인격탐정 사이코 1 - 아마미야 카즈히코의 귀환, NT-novel
오츠카 에이지 지음, 서범주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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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노벨라이제이션화는, 오츠카 에이지의 입장에서 보면 적당한 책임의식이 가미된 모종의 상업적 흐름과 썩 기대는 않지만 자신의 사고 영향력의 확장을 꾀한다는 두 축을 두고 쓰여진 듯하다. 그래서 책의 발매 경위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시작을 알리면서 서두를 마감한 이야기는 3권에서, 이라크전쟁의 의미를 두고 아사히신문 기자와 설전을 벌이면서 결착을 못 낸 것이 못내 아쉬운 오츠카 에이지의 정리로 끝난다. 여기서 내가 굳이 이야기라는 범주 속에 그 모든 것을 통째로 아우른 이유는, 나로선 그 저자 후기까지 모두 하나로 연결되는 큰 이야기, 혹은 의식체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오츠카 에이지는 그 모든 것에서 넘쳐나도록 자의식을 드러낸다. 그것이 오오에 키미히코라는 화자가 진행하는 소설 부분에서든 저자 후기라는 부분에서든,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정에 가까운 목소리다. 목소리는 극을 진행하면서는 상황을 폄하하고 의미를 축소시키며 이면에 감춰져 있는 저열하고 별볼 일 없는 진실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 후기에서 목소리는 독자에게 거기서 멈추지 말라고 얘기한다. 겉으로 보이는 의미를 넘어 서서 사고를 확장하고 행동을 취하라고 말한다.

소설 본편과 후기까지를 이르는 태도들은 오츠카 에이지의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모종의 계도적 인상이 일관되게 풍기면서 굳이 라이트노블을 선택해야 했던 저자의 의도에 의한 구분의 틔미함을 형성한다. 어떤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이 소설이 속한 매체적 특성에 대한 자기반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라이트노블이라는 상업적으로나 장르적으로나, 그리고 수용층에 있어서나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에 자신을 위치시켜 놓으면서 저자는 이것이 도착지가 아니라 다른 길로 나아가는 하나의 다리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라이트노블이란 장르의 한계를 명백하게 인지하고 거기서 머물지 않게끔 하려는 나름의 의도다. 마치 일본만화가 데츠카 오사무 이래로 갖게 된 그 데포르메적 포맷이 갖는 숙명에 가까운 의미의 퇴행적 파쇄현상과 자기유희화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고민했던 것처럼.

그리고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특성상 작가의 속내가 드러나는 후기라는 선까지 보지 않으면, 인간의 본능에 살인이란 것이 마땅히 들어있어서 당연스럽게 살인을 저지른다는 작중 화자의 말과 인간을 죽이는 게 당연시되는 세상이 되가는 것에 대한 저자의 우려가 어떻게 상충하는지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세계 자체가 이죽거림을 체화한 날선 풍자며 소용으로 보자면 엉뚱하게 지지하는 이마저도 낚으려는 의도로 충만한 결과물이기에 그 상충하는 부분은 해리성 장애의 영역이 아닌 비판으로 향하는 유기적 흐름의 일환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책은 가상의 냉소적 독자가 가지고 있을 망가지거나 부족한 사고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말마따나 처음 시작이 나온지 십년이 넘은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낡은 이야기이며(사실 다중인격이란 현상의 유행은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소재기도 했다. 다만 당시에 제기되던 오타쿠의 분열증적 자기정의와 관련한 논의에 있어서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출현은 폐부를 찌르는 바가 있었다) 같은 시간, 아직은 불안정한 존재였던 소년소녀들을 위해 함께 달려갔던 이야기였다. 아직 약을 먹을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꿀을 발라놓은 컵처럼.

다시 돌아가자면, 작가는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써, 보고 버리기 위한 산물로써 이것을 만들어냈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렇다. 라이트노블이라는 펄프픽션적 성격을 필연적으로 가지는 매체를 선택한 것에서부터, 소비재로서의 소설을 얘기하는 그에게 현실은 냉정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조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소비 자체가 사고의 목적을 이루는 바도 있다. 잔인한 얘기지만 프랙탈 이론으로 인해 안겨지는 죄책감처럼 우리의 동선을 역으로 파고 들어가면 끝이 없는 원죄의 영역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과연 선한 나라인가. 우리가 먹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콜럼비아 커피농장 아이들의 피가 얼마나 담겨 있을까, 설탕이라든지 소금의 말도 안되는 원자재 가격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인정하자. 조금만 위치를 바꾸면, 우리는 산더미 같은 죄 위에 서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 자체가 죄의 광막한 시스템의 말단이며 또 시원이 된다.

어떻게 보면 소비를 통해 우리는 죄책감을 가지고 반성의 단초에 서게 된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항할 가치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츠카 에이지는 징검다리가 될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를 아마존 밀림을 깎아먹는 환경재해의 말단으로써 부정하는 것이 아닌 최소한의 쓸모있는 의미로써 받아들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을 향하는 행동이야말로 그 대답이 된다. 

'허나 예를 들어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영혼의 진실을 엮어낸 것이어야 할 책에도 바코드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바코드가 찍혀서 통용되는 같은 이야기, 같은 음악을 몇백만이라는 숫자로 미친듯이 소비하고 있음에도 누구나 다 그 이야기나 음악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건 우리의 마음이 이미 대량생산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대량생산된 이야기, 대량생산된 음악, 대량생산된 사상, 그것은 당신들의 마음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당신들의 마음에 바코드를 새기기 위해 발신된 시스템의 선물인 것이다.
이 이야기도 포함해서.
그러니까 대량생산된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마라.
그저 소비하고 그리고 버려라.
그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선물하는 유일한 말이다.'

-261p~262p

 

저자가 만든 또 다른 포맷의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인 [시작품신화]도 들어오길 기대한다. 번역된 문장에 대한 불만도 조금 작용했음을 염두에 두고. 이 시리즈의 세 권 중 최고는 1권 [아마미야 카즈히코의 귀환]이었기에 여기에 리뷰를 단다. 사실 뒤 두 권은 구성적으로 다소 허약한 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애정이 그것을 막아줄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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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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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 자신을 죽은 것으로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5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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