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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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본능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것중 하나가 바로 인간 자신에 대한 흥미다. 물론 그것은 사자가 탐슨가젤을 노릴 때의 흥미라고도 볼 수 있겠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고파 하는 측면에서의 흥미라고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의 정보집약체로서 연구할 가치가 있으며 얘기할 가치가 있고 또 굳이 그런 가치들을 분석적으로 따지기도 전에 우리는 매일마다 나가는 일터에서 누구랑 누구가 어젯밤 사무실에 남아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하루의 즐거운 이벤트로서 자연스럽게 탐구하고 또 추적하기 마련이다. 패리스 힐튼의 너절한 일거수일투족이 '팔리는' 이유는 별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 본능 어딘가를 은근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자는 탐슨가젤을 잡아먹기 전에 그 가련한 생물의 감정과 생리상태, 사상과 철학등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사자는 그 탐스러운 동물을 먹어치우기에 용이한 정보만을 선별하여 습득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언어라는 도구를 빌어 타자, 혹은 타생물체에 대한 담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물론 그것이 우리모두가 저녁밥상에 올려질 등심살의 주인이 자신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에 대해서 신경 쓸 정도로 정보로 인해 인류가 섬세해졌다는 걸 뜻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들의 사정을 듣고서 적극적인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있으니 완전히 소용이 없는 경우라곤 말할 수 없는 터일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보다 효과적으로 똘스또이를 씹어먹으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들춰보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여기 이 국적상 오스트리아인이자 저명한 보헤미안이었던 우울증환자가 쓴 글을 보라. 그가 글쓰기의 세 대가들을 논하는 것을 보라. 인물을 향한 저열해질 수도 있는 말장난의 함정을 피해 담화에 예술의 왕관을 씌울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츠바이크가 이뤄냈다는 데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그 가련한 대상들을 핥고 빨아들여서는 입 안에서 굴리다가 결국 잘근잘근 씹어먹는다. 그는 사냥꾼이다. 우울했지만 더없이 당당했던 텍스트의 사냥꾼이었던 그는 온갖 정보들-재료들의 상찬으로 만들어진 두터운 글판 위에서 너무도 유혹적이고도 현란한 춤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판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리고 같이 춰보자고 부추긴다. 그 거침없는 태도로 인해 카사노바와 스탕달, 똘스또이는 가차없이 재단되고 속절없이 제 몸뚱이를 드러내보인다. 츠바이크는 그들의 육체와 의식을 아우른다. 그는 그 인물들의 저열함과 위대함, 고상함과 천박함을 마음껏 드러내보임으로써 그들을 위한 커다란 웅덩이를 만든다. 장대한 글쓰기의 여정에서 하나의 세계, 더 나아가 모든 이의 세계로 공유될 방대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은 츠바이크가 만들어낸 웅덩이 속에서의 벌거벗은 농탕질로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 츠바이크는 여기서 글 속에 숨겨진 사람을 끌어낸다. 그렇다고 글이 의미가 없어지느냐,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글을 통해서 사람을 보고 사람을 통해서 다시 글을 보게 된다. 츠바이크는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있게 그 두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가교를 마련해보인다. 그것은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작가가 만들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황홀경이자 작품과 작가가 분리되야 한다는, 이제는 고전적인 문구가 된 법도를 무시하는 독자 입장에서의 은밀한 소원성취의 순간이다. 츠바이크의 혀와 손가락을 찬양할지어다. 그는 남의 이야기로 자신의 영역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 공간의 매혹적인 손길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달콤하니, 설혹 만에 하나 진실에서 벗어난 울림이라 하더라도 츠바이크는 온전히 압도적인 사기극을 마련한 것이리라. 그는 독자로 하여금 카사노바에게 질투하고 스탕달에게 위안을 받으며 똘스또이에게 경이를 느끼게 만들었으니 그 또한 그들의 전설을 마련하고 다시금 확정시킨 것이며 그것을 가능케 한 츠바이크 자신의 힘을 영원히 기록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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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 - 200ml
보령메디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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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땡땡땡, 하고 쳐놓고도 도대체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변명을 위해 말하건데 나로선 최초로 해야하는 화장품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 부단한 고심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둬야겠다. 따라서 내가 이 물건을 받은 이후 이토록 오랜 시간이 다음에야 리뷰를 작성하는 것은 순전히 그 지난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했음이란 것을 이 글을 읽는 이에게 이해시키고 싶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곤란한 것이다. 해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일에 낯설고 어색해하며 그에 따르는 심적 부담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선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저 제목, 하얀 추억이라니!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난 [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을 쓰면서 이렇다 할 신비하거나 음란한 추억 같은 건 전혀 가져보질 못했다. 이것을 나쁜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그것은 순전히 제품의 기능성과는 완전히 무관한 영역의 얘기니까. 시장 골목에서 산 싸구려 녹색 스킨로션을 가지고도 사람에 따라선 얼마든지 추억이 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부작용으로 인한 여드름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다음 번 로션 이벤트에서 한 번 더 당첨되길 바라는 선량하고도 소소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라 싼값에 모르모트가 되어 기꺼이 구할 수 있었다는 것도 그랬거니와 실제로도 유난히 엉망인 피부에 비추어 고마운 성능을 보여줬던 이 제품에 대해서 별 다른 해로운 감정이 없다.

자, 글을 쓰기 위해서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옛 선현의 작법을 베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가.

'15자의 글자를 발음하면서 나는 내 혀끝이 몇 번이나 입천정에 닿거나 이빨끝을 쳐대는지 세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혼미한 행위의 과정 속에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너, 안타까운 이름이여. 세-바-메-드-모-이-스-춰-라-이-징-바-디-로-션....'

아무리 생각해도 업적으로나 취향적으로나 존경받을 만한 이 양반의 글은 이 제품의 너무 긴 명칭과 독일어적 단단함에 맞부딪쳐서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현자의 목소리를 빌려봐야 할 필요가 있다.

'5월 22일 수요일 오후 3시 45분 23초가 되었을 때, 마룻바닥에 누워 편안히 자고 있는 내 머리 속으로 곰사나이가 정중하게 노크를 한 다음 들어왔다. 나는 그를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는 서커스단에서 속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새로이 창간되는 제주도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낼 SF소설을 3일에 한 번 정도의 주기로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이보게 친구. 오랜만이라고 말하진 않겠네만 자네가 오랜만이라고 좀 해주면 안되겠나.> 나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게 오랜만이라고 말해줬다. 그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폈기 때문에 그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새로 만든 듯 깨끗하게 제도된 아이보리색 명함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이름은 [세바메드 모이스쿼라이징 바디로션]이었다....'

역시 무리다. 그런데다 이렇게 쓰면 90년대 초반에 많이들 그랬던 것처럼 분명 표절논란에 휩싸일 것이었다. 이미 한 문단을 뻔뻔스럽게 만들어버린 나로선 그 일본작가께서 관심을 가졌던 수많은 현대의 공산품들 목록에 세바메드 시리즈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자자, 이제 글이 벌써 몇문단을 채워놓고 있다. 그리고 자, 도 두 번씩이나 썼다.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나는 이 제품의 리뷰를 대체 어떻게 써야 될 것인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 해답을 다오 미네르바여, 아니 1981년생 아드리아나 리마여.

<[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은 언뜻 점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촉감을 주지만, 그건 착각이다. 단 몇 초 사이로 피부 속으로 흡수되는 놀라울 정도의 흡수력은 로션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으로 약하면서도 부담없는, 그래서 흡수 이후엔 거의 남지 않는 향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이 제품이 베이비로션에 가까운 저자극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흰색으로, 썩 특징이 없이 만들어진 제품 디자인도 그렇거니와 그에 호응하는 간단하면서도 깔끔한 캡의 여닫음 장치가 더해져 [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은 튀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온순함, 그러면서도 제 역할은 충실하게 다 해내는 잘 만들어진 현대 화장품 화학의 즐거운 수확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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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5-05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미있는 리뷰에요.
롤리타를 발음해보는 험버트 험버트? 두 번째의 현자는 하루키인건가요? (좀 자신 없어요.)

hallonin 2006-05-0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어렵지도 않았던 터라, 바로 맞춰버리셨군요.... 나름대론 광고효과를 노렸습니다만.
 
안녕, 절망선생 1
쿠메타 코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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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쿠메타 코지, [제멋대로 카이조]로 진정한 폭주의 미덕을 보여주면서 소수의 열광적인 팬덤을 이끌어낸 자폐형 루저 만화가인 그가 [마법선생 네기마]와 같은 잡지를 통해 근 8개월여만에 비실거리며 복귀했다. 여전히 자신감 결여로 가득한 작가후기에서의 말들과는 상반되게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마법선생 네기마]의 구조를 통째로 패러디하고 있는 [안녕, 절망선생]은 어느 봄날, 모처의 모고등학교에 담임교사로 전근 오게 된 이토시키 노조무의 벚꽃나무숲 자살씬으로 시작된다.

[제멋대로 카이조]는 처음 시작은 어떻게 보면 그즈음에 쏟아져나왔던 그저 그런 폭주물들, [이나중 탁구부]와 [멋지다 마사루]의 뒤를 이었던 [하이퍼 레스토랑]이나 [하레와 구우] 같은 영역의 답습으로 보였다. 후에 후루야 미노루는 소위 '엽기물'과는 다른 독자적인 작가적 경지를 개척하게 됐고 [하이퍼 레스토랑]은 소리 소문 없이 얘기가 끊겼으며 [하레와 구우]는 보다 건전을 지향하게 되면서 성공적인 소년물로 자리잡는 등 모두가 생존을 위해 나름의 길을 선택했지만(다만 우스타 쿄스케는 시부야케쪽 친구들과 노느라 바빴는지 되는대로 그리는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로 복귀할 때까지 별 소식이 없었다) 땜빵용 연재작이라느니 오타쿠 개그만 구사한다니 하는 소리들에 시달려야 했던 [제멋대로 카이조]는 정반대의 길, 완전히 맛이 가버리는 길을 택함으로써 [코난]의 작가가 취재하러 휴재하게 되면 나도 취재차 쉬고 싶네요라고 지면에서부터 당당하게 씹어버리는 만화가 됐다. 연재 후반에 이를수록 절정에 달하는 그런 배째주의식 태도로 온갖 트러블을 다 일으켰으면서도 26권이라는 길고도 긴 여정을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의 매니악한 팬층을 놓치지 않음과 동시에 지면채우기로서의 기능성을 잃고 싶지 않았던 소년 선데이 편집부의 간악함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아무튼지간에 그 덕에 우리는 한 만화가가 자신의 만화를 거의 개인블로그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지난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 - 책날개에 있는 멀티 건강 식품회사의 엘리트 사원 노조무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작가의 헛소리니 진지하게 읽고 싶다면 진지하게 읽어주자. 각장의 제목은 패러디다. 그외에도 쏟아지는 패러디들에 최대한 주석을 달려고 노력한 번역자의 열정이 아름답다. 1권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자폐증, 외계교신자, 히키코모리, 스토커, 문자메일매니아, 이중인격자, 꼬리 페티쉬, 변형결벽증, 불법입국자, 비교적 정상인 소녀 등등이다. [제멋대로 카이조]의 후반부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각장의 메이킹 독백이 여기도 실려있다.

[제멋대로 카이조]의 연재 중반에 이르면서 쿠메타 코지는 재미도 없고 인기도 없으며 점점 엉망진창이 되가는 만화를 질질 끌고 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로 형편없는 내용의 연재를 계속하다가 결국 자신을 폭발시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찾게 됐다. 결국 자학이며 당최 해결이 안 보인다는 점에서 대책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사우스파크]를 위시한 미국형 이죽거리기, 더 나아가서는 역사상의 오래된 패러디의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구수, 걸직, 공격적인 패러디와 비꼼과는 다른 영역의 자폐적이고도 우울한 이죽거리기의 영역을 확보하게 됐다는 건 확실하다. 지극히 현대적이며 은근한 병적 기운을 담보하고 있는 [안녕, 절망선생]은 후기의 [제멋대로 카이조]가 보여줬던 현대(일본)백과전서적 지식에 바탕을 둔 소심하지만 줄기찼던 수다와 열외자적 이죽거림에 익숙해 있는 이들에게 확실한 만족을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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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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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페르세폴리스]에서 우리를 처음 매혹시키는 것은 저 빨간 표지 한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가진 소녀의 무심한 표정이다. 소녀는 이제는 이슬람 여인들의 전형적인 대서구적 아이콘이 되버린지 오래인 베일을 쓰고 있으며 그녀가 그려진 칸의 외부선은 이슬람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렇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란 사회에서 이란인으로 살아왔으며,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호메이니와 석유, 우리나라 건설기업의 단골 대형 토목사업 수주국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위시한 영화적 성과들, 아랍전쟁의 당사자, 악의 축, 핵무기로 이미지화 되는 이란은 마르잔 사트라피의 손에 의해서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1980년이 시작될 즈음, 왕조가 몰락하고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교차점에서 시작되어 이라크와의 전쟁이 점점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던 80년대 중반까지의 이란의 풍경들이다. 진보적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이제 막 열 살이 넘은 우리의 소녀는 체 게바라와 마르크스에게 푹 빠져있었고 밤마다 하느님과 대화를 하며 마지막 선지자가 되길 꿈꾸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으례 그렇듯, 소녀의 꿈을 지속시켜주지 않는다.

[페르세폴리스]를 보며 신선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외부에선 종교적 억압으로만 이뤄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이란이 가진 내부적 개방성과 풍요로움일 것이다. 주인공 마르잔의 가문과 주변엔 진보적 좌파들이 득세하고 있고 그녀 자신은 마이클 잭슨과 아이언 메이든을 즐겨 들으며 가족들과 친지들은 폭격의 와중에서 포도주와 함께 하우스 파티를 즐긴다. 이것은 마르잔 집안의 남다른 진보적 면모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비지스와 핑크 플로이드의 테이프를 파는 암시장이 존재할 정도라면 그만한 수요가 그 사회 안에 끊임없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이 작품이 가진 면모가 이란사회의 그저 특수한 경우의 한 일례라고만 말하는 것은 과격한 일반화일 수 있다. 여기서 보여지는 풍경들은 분명히 이란이 가지고 있었던 또하나의 면모인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가 상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외부와 내부에 걸친 폭력에 의해 비틀려가는 사회 속에서 그녀는 하느님, 마르크스, 가족들, 친구들을 차례로 잃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가혹해지는 폭력 속에서 사라지거나 살해 당하거나 도망을 간다. 결국 그녀는 조국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세상의 왜곡과 폭력이 만들어내는 변화에 대항하여 사실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페르세폴리스'에서 살았던 이라는 것과 그곳에서 가지고 있던 경험들을 견지하려 하는 회고록이자 고백담인 이 작품이 또한 탁월한 관찰기이기도 한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눈엔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가진 기쁨과 즐거움, 모순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용서는 해도, 잊어서는 안 된다." 라는 말로, 상실에 저항하는 기억을 추구한다.

이 작품이 자극할 수도 있는 그 모든 우울증 유발요소들을 감춰주는 것은 더없이 매력적인 페이소스를 뿜어내는 작화와 적절한 유머의 쓰임이다. [페르세폴리스]엔 두터운 모노톤과 온순한 데포르메만으로도 '페르세폴리스인'들을 온전히 매력적으로 재현해내는 그림과 더불어 이야기 내내 풍요롭게 받춰주는 인물들의 능청과 기구한 현실이 만들어내는 유머가 자리하고 있다. 표지에 그려진 소녀에 대한 매혹은, 그렇게 끝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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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1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6-03-0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을 기다리게 만들어주더군요.... 이미 해외에선 2권이 나온 상태이고, 아마도 성장한 작가가 겪는 이야기가 될 듯.
 
로버트 크럼의 아메리카 미친 세계와 그 적들 1
로버트 크럼 지음, 김제민 옮김, 김수박 글씨쓴이 / 새만화책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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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67년부터 95년까지의 작업들 중 미국에 대한 것을 골라서 수록한 크럼의 노골적인 구토물인 [아메리카]에 실린 이야기들 중 1970년대에 만들어진 에피소드에서 보여주는 현대 미국에 대한 비판이 2000년대인 오늘날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은 보는 이를 흥미롭게 만든다. 미국인들의 과소비 성향, 환경오염 문제, 비대해진 매스미디어와 생각 없는 군중, 나태와 폭력성, 인종차별과 배금주의 등등은 30여년이 지난 2005년의 미국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 일맥상통한다. 변한 게 없다.

크럼의 만화는 비틀려진 미국과 그 안의 인간성들에 대한 노골적인 환부절개를 그림에서부터 필설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보여준다. 왜소한 중년들, 과장된 세미드레스의 청년들, 멍청한 마초들,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거대한 여자들과 [재즈싱어] 포스터를 옮겨온 것 같은 희화화된 아프로 아메리칸들, 머릿 속에 돈 생각만 하는 유태인 등등. 이것은 그의 직설적인 화법과 결부되어 노골적인 캐리커쳐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분명 이런 접근법을 섬세하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비록 세련되진 못하더라도 그의 만화의 목소리는 작가가 위치한 언더그라운드라는 영토를 이용하여 소위 풍자적 '이죽거리기'의 기법이 자극적으로 발현된 근간의 성과들의 원류가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불안과 혐오, 적대감은 과장법을 통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또한 그 망상 자체로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그의 만화의 시의성은 그가 보여준 정치적 의도성과 표현상의 방법론에서도 동시대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크럼의 개성적인 작화로 빚어진 복잡미묘한 캐릭터들(을 이루는 선들)과 묘사로 인해 묵직한 방점을 찍어놓는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크럼만의 독특한 작화는 천박하고 지저분하며 자신이 경멸하는 요소들을 입자단위로 확장시킨 결과물이다. 혐오감을 미학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성과인('카프카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의 만화 속 인물들은 멍청하다고 표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거나 절망밖에 안 보이는 내일을 안고 불안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군상들뿐이다. 모순이 생활화 되어 있으며 그 사실에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못하는 현대 미국의 인간들은 그의 눈엔 일종의 미치광이들이다. 물론 여자의 무릎 장딴지에 환장을 하는 크럼이란 작가도 그에 못지 않은 미치광이라, 그의 만화는 미치광이가 미치광이들을 욕하는, 스스로도 모순의 굴레에 잡혀있음을 부정하지 않는 자기비하적 잔인함의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간 히피문화의 상징으로 대접받아왔으며 실상 그자신도 60년대의 히피붐과 함께 올라 온 작가인 줄로만 알려져 있던 크럼은 이 작품에서 그 '히피'들도 여지 없이 '까'버린다. 사실 사회주의자에서부터 액티비스트, 기업가와 자유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측면에서 그의 비판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거의 없는데 이것은 그의 정치적좌표가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그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죽이 잘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 부분이다)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보자면 그에게 있어선 소위 정치적 의지라는 것 자체가 불순한 것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대안은? 크럼은 스스로 오들오들 떠는데도 바쁜 사람일지 모른다. 그의 정치적 희망은 인간의 자발적인 공동체 수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꿈에 가까운지는 그의 만화들이 줄기차게 보여주는 폭력적 절망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마치 자신의 우툴두툴한 그림처럼 타고난 원죄를 씻어내려고 계속해서 떨고 있는 그에게(그래서 계속 죄를 짓게 되는) '그럼 넌 어쩔 건데?' 라고 묻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잔인한 일일 수도 있다. 커트 보네것이 그를 좋아하는 게 이상할 거 하나 없다.

 

- 일전에 김수박의 만화를 소개한 포스트를 올릴 때, [아날로그맨]의 그래피티적 성향을 생각하면서 떠올리려고 했던 작가가 마츠모토 타이요와 바로 이 크럼이었다. 김수박의 만화가 보여주는 연출과 작화들은 크럼의 무덤덤함이 보다 매끈해진 그림을 타고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마침 그는 이 작품집에서 글씨쓴이로 참여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관련 포스트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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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17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알찬 리뷰군요.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들도 많구요. 김수박, 이라니 첨 듣는 만화가인데, 궁금합니다. 땡스투도 못 하고 산 <하나오>를 오늘 받았는데, 애니북스에서 나온 표지 중에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캣츠비> 표지 보고 홀랑 깼거든요. 갑자기 마츠모토 타이요, 하시니 생각나서. <새만화책> 잡지도 보셨어요?

hallonin 2006-02-17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오는 결국 오늘, 저도 샀습니다. 문화상품권 받은 걸로-_- 좀 더 숙고해보고 리뷰 지를까 생각중. 핑퐁만큼의 박력과 충격은 없지만 아기자기하고, 뒤로 갈수록 즐거워지더군요. 컷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만화책은 아직 못봤고.... 지금 확인해봤는데, 위에 얘기한 김수박도 작가로 참여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마츠모토 타이요가 새만화책에서 언급이라도 됐나요?

blowup 2006-02-17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오. 위의 글에서 마츠모토 타이요 이야기 하셔서, <하나오> 샀단 걸 말씀드린 거구요. 새만화책은 로버트 크럼 책 나온 출판사라서. 연결고리가 모호했군요. ㅋㅋ
타이요의 다른 책들도 다 출판되면 좋겠어요.

hallonin 2006-02-17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그런 거군요.
음, 마츠모토 타이요 만화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내줄텐데.... 하나오도 뭐, 그리 썩-_- 팔리는 것 같진 않더군요. 철콘근크리트가 정식판으로 나올 날은 요원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