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 앙꼬 단편집
앙꼬 지음 / 새만화책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어떻게보면 [열아홉]은 어떤 종류의 혼돈을 지향하는 것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우선 오프라인 매체에 발표됐던 단편들이 보여주는 심해를 흘러가는 듯한 둔탁하고 우울한 감각, '즐거운 맛'이라는 분류로 묶여진 앙꼬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사 만화들(무지막지하게 웃긴다), 그리고 말미에 실어놓은 작가 자신이 겪고 있는 솔직하고도 혼란스러운 토로기인 '나의 일기장'이라는 구성은 이 작품집의 완결된 구성력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마치 어떤 이의 일기장을 집어들어서 휙하니 펼쳐놓은 것 같은 낯선 감각이 내내 지배하는 이 파편화된 이야기들은 그 사소설적인 경향을 봐서도 독자의 감성적인 이해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싫든좋든 [열아홉]은 단편 '거문도를 가다'가 보여주는 그 하릴 없는 시간낭비에 대해 깊숙이 이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적합하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어떤 목적도 계획도 없이 오직 열망 하나로 거문도로 가서는 별 일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돌아오는 걸로 끝난다. 

'거문도를 가다'가 [열아홉]을 이해하는 분명한 열쇠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을 소모한다는 경험에 대해서, 비록 그 시간의 길이는 다르지만 독자에게도 동일한 경험의 재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에 대한 10페이지 짜리 회고인 '거문도를 가다'는 거문도로 가는 여정의 고난함과 도착해서 겪게 되는 허무감, 그리고 소득 없는 복귀라는 결말을 통해 온전히 독자 자신의 동감이 아닌 한엔 그 소모의 여정이 끼어있을 필요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여기에 시간에 대한 작가의 통시적 관념이 있다.

[열아홉]은 총체적으로는 삶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의 흘러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안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은 시간에 대한 강박을 보여주고 있다. 시한부 에이즈 환자의 이야기,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개의 이야기, '할머니'와 '찔레꽃'으로 변주되는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표제작인 '열아홉'이라는 숫자의 명징한 의미. '즐거운 맛'에서 자신보다 적게 산 사람들을 질투하는 작가의 모습은 '나의 일기장'에서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보내는 이들과 자신과 비교하며 4년 넘게 불안해하고 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거문도를 가다'의 무의미함은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자신의 가장 서글픈 풍경일 수 있다.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막연한 기대만 갖고 시작했지만 그 준비 없는 여정에서 발견된 것이 공허함일 때,막연한 절망은 일이 시작된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반성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열아홉]에서, 그곳까지 이르렀을 때의 판단은 긍정과 부정의 줄타기에서 대개 부정으로 떨어진다. 순환되는 오류와 후회의 연속은 자신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바깥에서 인지할 수 있을 때야 찾아오지만, 마땅히 대답을 내어놓으라고 하면 결국은 저 시간의 흐름밖엔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는 결론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고독의 결정이다. 마치 표지에서 푸른 빛으로 새겨낸 '열아홉'의 한 장면, 저 가로등이 놓인 다리를 외로이 걸어가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처럼. [열아홉]에서의 시간은 그 지점에서 매번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

구제불능. [열아홉]이 덤덤하기 때문에 세심한 이야기들 속에서 무심코 담아내고 있는 것은 일상의 무거움과 그 무거움에 대한 작가의 빈약한 비명소리다. 그 조각들을 살펴보는 건 태도와 입장의 이율배반이 빚어내는 침울함이 작가 자신의 눈에서 얼마나 정직하게 그려지느냐라는 속죄의 차원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그런 스스로 동떨어지는 입장에서의 관찰이 이 작품들의 또다른 면모를 보장하게 만든다. 유머스러운 독백과 관찰들로 이뤄졌던 전작인 [앙꼬의 그림일기]가 보여줬던 대단한 센스의 개그는 여기선 작품들 곳곳에 드물게 들어가는 특유의 기묘한 페이소스와 유머로, 그리고 묶음인 '즐거운 맛'으로 이어져서 그 일상적 무거움을 일상적 즐거움으로 상쇄시켜 준다. [열아홉]이 전반적으로 과민한 감성의 고통을 담아내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치 삶처럼, 적막과 자발적인 통증만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빈 시간은 때때로 느긋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며 [열아홉]은 그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필리핀으로 떠나버렸다는 그녀가 돌아오게 되면 보다 즐겁게 자신의 일기를 써주길 바라는 맘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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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1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단편집이군요. 삶과 시간의 흘러감에 대한 이야기..
흥미로운 책이네요.

hallonin 2007-06-1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고맙습니다. 한참 뒤진 다음에야 확인했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