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월드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대니얼 클로즈 글.그림, 박중서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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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월드]가 날 뿅 가게 만드는 것은 시작 페이지에서 세 컷째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니드는 수류탄 떨어뜨리듯 단박에 말한다. "소닉유스가 누군지만 알면 다 '첨단'이냐?"

아, 난 소닉유스 별로 안 좋아해서 다행이다.... 라기 보단 뭐랄까. 적절한 동지의식? 그러고보니 소닉유스는 [심슨가족]에도 나와서 낄낄거리는 거 보여줬었지. 스프링필드, 고스트 월드.

푸른색의 2도 인쇄를 통해 지향하게 된 차가운 입체감을 통해 모노톤보다도 더 건조하고 해부적이며 그래서 날카로워진 장면들과 쏟아지는 듯한 공격적인 수다로 채워진 방만한 텍스트가, 컷의 반을 채우는 문답식의 말풍선 배치를 통해 [고스트 월드]의 황량함을 차곡차곡 구조해주는 동시에 내용적으론 세계를 바라보는 날선 시선의 정서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니드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등의 즐거움이란 걸 찾아볼 수 없는 90년대 미국 교외의 어느 뻔한 중산층 마을이다. 시시껄렁한 개그쇼들과 휴일날 틀어주는 지리한 특집 프로그램들로 채워진 텔레비전 브라운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착되어버린 너절한 감정들과 지긋지긋하게 적막스러웠던 첫 섹스의 경험으로 점철된 이 세계에서 이니드와 레베카는 스스로의 망상과 아집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고 붙이고 유희한다. 그녀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비난의 대상이다. 패션잡지든 셀러브리티 프로그램이든 정치적 참여의지든 골수 우익들이든 기성적인 모든 것은 그녀들의 혀를 통해 박살나고 문질러진다. 그러나 스너프 비디오가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위장한 나치주의자들과 얄팍한 트집으로 관심이나 끌어보기 위해 복제된 자극들을 좇는 인간들, 연쇄살인범에게 팬레터나 보내는 싸구려 정서의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 그래서 자극의 창고형 매장이 된 세상에서 그녀들의 유희란 떨어져서 보면 기껏해야 동네 식당에서 본 아무 연관 없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사타니스트의 지위를 선사해주는 정도의 일일 뿐이다.

세계는 뒤집혀지지도 않고 박살나지도 않을 것이며 단지 지긋지긋하게 지속될 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쓰여져 왔던 고발과도 같은 낙서 'GHOST WORLD'처럼.

그래서 그녀들은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들이 모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첫 에피소드의 끝에서 한바탕 수다를 끝내고 '병신 같은 년들'이 줄줄이 나오는 잡지를 까대는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이니드의 모습. 그녀는 단발적인 욕설과 저항, 그리고 체제에의 적당한 순응 통해 생활을 지탱한다. 관련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당혹스러워하고 화를 내던 레베카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로, 이니드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함께 대입 준비를 위한 공부를 은밀하게, 그리고 제법 성실하게 치뤄낸다. 물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지긋지긋한 세계에 대한 도피욕구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대학입학이라고 하는 방법론이라니, 이 안온한 해방구는 그녀가 평소에 쏟아내는 날카로운 얘기들하곤 많이 다르다. 모순이다.

모순. 그녀들은 웃으면서도 울고 싶어하고 비웃으면서도 진실을 찾는다. 무턱대고 부여한 의미가 엉망진창으로 깨질 것이라고 스스로 먼저 방어기제를 치지만 은근히 그 소망의 성립을 기대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모든 모순들은 [고스트 월드]의 이야기를 헝클어놓지 않으며 총체적으로 그녀들을 구성한다. 또한 그 꾸준한 모순의 일관성들은 [고스트 월드]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짜여진 작품이란 걸 증명한다.

모순들은 그녀들이 관계에 대한 서투름에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걸 알려준다. 이니드는 자신만의 곡해와 아집으로 채워진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이 그녀의 뜻을 쉬이 따를 리 없다. 그래서, 결국 상처를 받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숫총각' 조시의 집에 피임기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스트월드] 안에서의 어느 장면에서보다도 서럽게 우는 이니드의 모습을 보라. 고통에 대한 책임에 익숙하지 않은 고독은 순식간에 자아를 습격한다. 그리고 자기혐오. 애초에 방향이 없었던 증오가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아오게 된다. 모순 없이, 순수한 고통으로.

세상이라는 대전제는 바뀌지 않지만 시간은 흐르고 세계의 부분으로써의 인간은 바뀐다. 대학입학과 그로 인해 예정될 이별 때문에 이니드와 자신 사이에 생기는 거리감을 못 견뎌하던 레베카 '도펠갱어'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마침내 혼자 서게 된 장면을 이니드가 확인하는 시점에서 [고스트 월드]의 삭막한 동화는 끝난다. 그리고 이니드는 막연한 소망처럼 미래를 향해 떠난다. 어떤 확신도 얻지 못한 채, 여전한 불안을 안고서.

그것 또한 삶의 뻔한 풍경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너무도 잔인한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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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8-02-1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전 이 책을 삼십대 아저씨한테 선물했더니 읽고나서는 십대 여자애들의 내면세계를 잘 몰라서 그런지 이해가 안된다고 말하더라구요. 이거 은근 소녀들 정서인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hallonin 2008-02-12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 정도가 아니라 100% 소녀만화죠.

sudan 2008-02-1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소녀의 정서를 이해못하는건 저였던거군요. -_-

hallonin 2008-02-1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럼 난 뭐지....
 
플라워 오브 라이프 4 - 완결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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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난 완결까지 본 만화가 의외로 별로 없다. 중간에 끊고 또 중간에 끊고. 대개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는 작품 자체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서가 대부분인데 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기본적으로 세월에 대한 장기전을 요구하면서 그 과정에서의 들쑥날쑥한 변화를 필연적으로 예정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 좋았던 만화는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술진보 시대 탓인지 동인문화 때문인지 만화 말고 할 게 많기 때문인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해서 제대로 된 연재력을 갖춘 작가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이쪽 업계의 풍경인데, 그런 와중에서 요시나가 후미란 작가의 존재는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조용한 돌발성을 잡아내는 데 출중한 재주를 타고난 이 칼로리 매니아가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했던 어느 청소년기에 대한 직시인 [플라워 오브 라이프]가 (그 분량에 비추어 상당히)오랜 시간을 거쳐 결말을 냈다.

요시나가 후미는 막바지에 이르러 생의 불확정성에 대해 얘기한다. 길지 않은 이 마지막권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은 모두 확정되지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관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틀리거나 역전되고 잊어버렸다 싶었던 악몽이 되돌아온다. 몇 컷 전의 눈물은 곧 웃음, 혹은 무감함이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삶에 갑작스럽게 끼어들기도 한다. 시간은 엄청나게 축소될 수도, 혹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불안투성이로만 보일 수밖에 없는 일련의 사고들은 우중충하고 거칠게 펼쳐지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문제들은 평온한 생활에 대한 일종의 테러다. 그래서 그에 해당되는 이들은 모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폭주 직전까지 들어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소위 요시나가 후미적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관조적인 시선이다. 결국 삶은 그런 거라고, 그리고 꽃다운 시절이라고 불리는 것은 마치 예쁘지만 더없이 불안정한 벚꽃처럼 간신히 지탱되는 어떤 시절이라는 걸. 홀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음 때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지막 컷에서 바로 앞의 컷과 대비되어 컷 안에 혼자 남게 되는 그 누군가가 보여주는,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특유의 그 표정이 전해주는 위로는 마땅하다.

[플라워 오브 라이프]의 마지막 권의 구성은 분명 납득이 가지만 그 전개와 마무리에 있어서 요시나가 후미답지 않은 급한 감이 있다. 청소년기라는 익숙치 않은 소재, 다층화되고 확장된 에피소드들에 대한 관장의 실패였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부조화마저도 마지막에서 제시된 흘러감에 의해 담보된다고 한다면, [플라워 오브 라이프]의 이전 권들이 보여줬던 즐거운 시간을 잊기란 더욱 힘들 것이다.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한 시절의 종국 전에 겪을 수 있었던 '꽃다운 시기'였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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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거리
아사노 이니오 지음, 이정헌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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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무대인 빛의 거리는 특별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또한 딱히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곳은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하게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신도시, 대기업 자본과 거대 행정계획이 맞물려서 물질적인 모든 것들이 미래를 향해 진행되어가는 와중에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거의 집단무의식적 친근함에 가까운 이같은 풍경이 담보하게 되는 것은 고독과 상실, 그리고 차가운 죽음의 이미지들.

[빛의 거리]는 그런 이미지들을 착실하게 쫓는다. 다수의 실패한 아버지들과 그 숫자만큼 망가진 아이들, 그리고 관조자로 이뤄진 이야기를 장식하는 인물군은 하나같이 빛의 거리에서 거기서 거기일 뿐인 자리를 멤돈다. 그들은 모두 삶에 대해 일찌감치 지치거나 혹은 갈 데까지 가서 지쳐버린 탓에 더없이 외로워하거나 지겨워한다. 그리고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꿈틀거리는 폭력과 죽음 속에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빛의 거리]는 [고로시야 이치]가 아니다. 폭력의 쾌감을 노골적으로 쫓는 대신 은밀한 폭력의 세계를 서글프게 드러내는 이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는 빛의 거리는 그 이야기의 어두움과는 반대로 내내 따스한 햇빛과 맑고 푸른 하늘을 보여준다. 오직 타스쿠만이 유일하게 빛의 거리 바깥으로 나가서 어둠과 차가운 비를 경험한다. 그리고 마치 주박에 걸린 것처럼 그들은 다시금 자신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온다. 고통스럽고 지겨운 생활이 있는 곳으로.

그렇다면 왜 사는가? [빛의 거리]에서의 삶에 대한 대답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다. 오히려 그런 차원에서 고된 숙고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붕괴의 시작이 된다. 원래부터 없던 의미를 수복하기 위해 가상의 유의미를 강제로 생성시키는 순간 종국, 즉 죽음이라는 '의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생활-삶이라는 일련의 작용이 끝나고 있을 원점회귀의 결과가 가상의 의미에 의해 계속 결여되어 있을 무언가로의 복귀라면 그것은 스위치가 되어 소거행위로서의 완전한 파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존재하지도 않을 의미에 의해 종속될 시간에 무엇을 믿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라는 조언을 한다. 그것은 연인간의 사랑일 수도 있고 동지애일 수도 있으며 가족적인 애정일 수도 있다. 너무 긍정적이고 뻔하지 않냐고? 걱정할 것 없이, 그 모든 것은 흘러간다. 오래된 것이 지워지면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무언가가 나타난다. 그 연속성과 유지 자체가 삶인 것이다. 

삶의 문제에 대한 아사노 이니오의 보다 훌륭한 대답은 우리나라엔 먼저 소개됐지만 연표로 보면 후속작인 [소라닌]에서 내려진다. [빛의 거리]가 간혹 소재의 무거움을 치뤄내기에는 다소 가벼이 여겨질 정도로 도식적이고 거친 전개를 보여주는 것은 그 성숙도와 진중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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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 2008-01-2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의미에 대한 강박 역시 하나의 믿음으로 대치되지 않을까?
책이나 문학을 신으로 삼는 것도 하나의 <문학부흥종교군>같은 느낌으로.

의미의 존재 여부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그보다도 그런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삶쪽이 좋은데.

그보다도 옆의 푸코 얼굴이 너무 웃긴다 깔깔

hallonin 2008-01-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서 잔뜩 썼다가 지워버린 게 의미의 강박으로 인한 문명과 종교의 성립에 대한 거였음ㅎㅎ 플라톤주의자를 마땅히 경멸하라야? 플라톤은 사람들에게 망상을 심어줬을지 몰라도 그 자신은 남들이 믿게 만들 망상을 만드느라 충실한 삶을 보냈으니 진정한 가치는 그쪽에 있는 건지도.

근데 푸코 좀 무서운 남자였음.
 
플랫폼
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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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40대의 공무원. 별 열정 없이 문화계획시안에 도장을 찍어주는 걸로 월급을 버는 독신남. 일이 끝나면 핍쇼를 보러 가서 자위를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화자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굴러 들어온 유산 덕분에 여유로운 주머니를 가지고 태국으로 섹스관광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레리를 만난다.

죽기 직전까지 끝없이 삶을 추구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무기력하고 일종의 '이미 죽어버린 자'에 가까운 존재다. 투쟁영역에서도 멀찌감치 벗어나 있으며 성적인 욕구는 충만하나 그걸 금새 인스턴트적으로 때워버릴 수 있는 의식과 행동의지를 가진, 현대사회의 회로 끝자락이 만들어낸 능률 안 좋은 단말체적인 존재. 그러나 그가 아버지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섹스다. 여성의 생식기. 어머니의 생식기, 이슬람 여성의 생식기. 그는 그 사실을 단 두 줄로 해치워버릴 만큼 무덤덤하게, 때로는 적개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더이상 얘기되지 않고 금방 치워진다.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벅차기에.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자이기에.

미셸 우엘벡이 바라보는 세상은 여전하다. 그의 시선은 서구 유럽 사회, 특히 프랑스 사회라는 미시적인 영역에 대한 경멸적인 판단으로 드러난다. 그는 서구사회가 전파해 온 소위 '지성적인' 선택들이 실패였다고 꾸준히 얘기해왔다. 그리고 증거로 그 잘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평이란 것이 얼마나 쉬이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인지를 잡아내는 데 귀신 같은 솜씨를 발휘해왔다. 그가 여기서 들이미는 카드는 여행이란 개념이다. 우리에게도 아주 낯익은 경험인 섹스관광을 소재로 삼으면서 그는 그 문제에 도덕성을 묻는 이들에게 되묻는다. 어째서 그들은 섹스관광을 떠나는가. 인간의 본능인 섹스는 왜 그토록 어려워져버렸는가. 인식이 본능을 제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가 정당한 것인가. 작가는 세상에 만연한 불평등을 잔인하게 잡아낸다. 그리고 이성이 아닌 본능의 합리성을 제안한다. 그것은 사업가적인 감각이다.

바로 그렇다. [플랫폼]의 반쪽을 차지하는 건 사업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도덕적 판단의 차원을 훌쩍 넘겨버린 채 우리는 중반부에서부터 섹스관광을 합법적인 차원으로 올려서 돈을 벌려는 인물들의 재간을 볼 수 있다. 마치 [소립자]에서 보여줬던 SF적 과격함처럼, 사고를 넘어서서 행동의 경지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주먹구구식이었던 욕망과 쾌락의 제도화를 꾀한다. 그것은 가짜 위로지만 서구적 가치의 추구가 불러온 마지막 도착지이며 종말 직전에서 머뭇거리는 망설임이다. 잔인하지만 처연하진 않은 이 인식의 도살과정. 그리고 여기서 영토와 자본의 이야기가 제시된다.

섹스관광에 대한 직시와 그 활성화 방안에 대한 작가의 제시는 역설적으로 섹스관광에 낭만을 가져야 하는 현대인들의 고독에 대한 직시기도 하다. 미셸 우엘벡에 따르면 현대의 프랑스에서 서구사회 지배 인종들 간의 섹스는 너무나도 고도의 행위가 되버려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얘기된다. 그래서 섹스는 인종 간의 경제격차, 혹은 지배격차에 의해서만 행위된다. [플랫폼]에서 법적 프랑스인들끼리의 섹스로 이뤄지는 경우는 오직 나와 발레리뿐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 나머지는 SM이거나 난교, 아시아인이나 아랍인들과의 지위-경제적 격차로 매개되는 섹스들뿐이다.

그래서 발레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 [플랫폼]의 축이자 나머지 반쪽이 된다. 발레리는 투쟁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다.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피로를 모조리 짊어져야 할 운명인 그녀는 자신이 차지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이라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투쟁영역의 확장] 텍스트 자체의 인간화다. 끝없는 소모전 속에서 그녀는 나와 사랑을 나눈다. 섹스를 하고 난교를 하고 어떤 것도 제한 없이 행동으로 몰아부치지만 그녀와 나는 서로를 잊지 않고 향한다. 그러나 그녀는 SM에 대해선 혐오반응을 보인다. 합치될 수가 없는 관계가 증명되었을 때 향해야 할 고통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발전시킨 행위를 접하고 그녀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온갖 수단을 통해 본능을 외면하면서 파멸되지 않기 위해 잔인해지는 세계에 대한 분노다.

강제적인 신뢰관계를 폭력을 통해 구축해야 하는 SM과 달리 완전히 정반대의 위치를 가진 둘이지만 그 둘의 관계는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로맨스 소설인가? 맞다. 너무나도 이상적인 커플로 그려지는 나와 발레리의 사랑의 과정에서 동인을 가지는 건 발레리 쪽이다. 그녀는 계산적인 성녀다. 나는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되묻는다. 자신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든 무언가가 있었는가. 대답은 항상 없다, 로 나온다. 끝까지 제시되지 않는 발레리가 그를 향하는 이유에 대해 소설은 딱 그정도로 의문을 끝내버린다. 그들의 위치 자체가 그들의 상황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게 만들기에, 이 환상극 부분은 소위 소설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서 내가 맞이하는 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세상에 대한 아주 조용하고도 사근사근한 소멸이다. 마치 처음이 그랬던 것처럼. 방치되서 죽은 아버지와 상반된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나게 된다. 저항의식이라면, 유전자가 후대로 배달되지 않았다는 아주 미약한 위안. 징글징글한 연쇄의 끝.

미셸 우엘벡은 유혹하지 않는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재발견해낸다(마치 소설 안에서 화자 '나'의 입을 빌려 말하는 예술론처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 복잡하거나 어딘가에 숨어있는 비의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잘 만든 소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미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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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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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오타쿠가 가지는 게토적 성질은 새로운 세대의 단초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카타리파 수도자들처럼 멸종해버릴 운명인 것인가. 적어도 일본의 경우, 현재의 웹문화의 상당 부분이 그들로 인해 구축되어있는 만큼 전자의 경우로도 볼 수 있지만 그 정치적 의지결여는 그들의 고착을 지속시킨다. 마치 지하 속을 면면히 흘러왔던 일렉트로니카의 역사처럼 일본에서의 오타쿠는 점진적인 자기패러디와 확장을 통해 세계를 유지한다. 여기엔 새로운 문화, 쓸만한 상품으로서의 오타쿠의 가치를 발견한 기성세계에서의 구애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것은 그대로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파이 확장과 직결된다. '오타쿠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과 자기혐오가 뒤섞였던 것은 어느 쪽이 더 함량초과든 간에 그들만의 특질이란 것을 유지시켜주는 바였다. 그러나 지금 오타쿠들은 3세대까지의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고집과 팔리는 트렌드로서의 오타쿠와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전에 관련 페이퍼에선 서사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으로 [카우보이 비밥]과 그외의 애니메이션에서의 성과를 섣불리 생각했지만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는 장르 자체가 다른 영역, 즉 미소녀게임에서의 서사적 특질에 주목하고 그것을 서사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의 일례로 제시한다. 서사의 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고전적 영역을 벗어나 보다 데이타베이스 집중적인 퍼스널 컴퓨터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비중 있게 제시된 칸노 히로유키는 벌써 오래 전 양반이고 그의 작품들이 오타쿠의 데이타베이스적 사고를 훌륭하게 체현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의 시대가 아니다.

3세대 이후 오타쿠층에 있어서 작가적 아우라의 단절은 서사 붕괴 현상에 대한 직설적인 표상이다.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명징한 작가군이라고 한다면 안노 히데아키쯤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 오타쿠붐의 핵이었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이르러 제작자들인 교토애니메이션은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되지 특정한 작가의 의지가 표명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한 작가성에의 주목이 미소녀게임계, 나스 키노코로 옮겨가서 가장 강력했던 팬덤을 구축했던 사실은 의미심장하고 아즈마 히로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페이트] 이후 미소녀게임계 또한 관성적인 자기복제를 거듭하며 긴 휴지기를 맞이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쪽으로 현재를 다시 생각해보자. 2007년 9월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2년에 걸친 또 한 번의 리믹스를 시도한다. 현재 오타쿠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교토애니메이션의 [럭키스타]는 끊임없는 자기패러디로 서사 없는 오타쿠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다음에 선보일 작품은 오타쿠 서사의 궁극을 지향했던 키의 미소녀게임 [클라나드]의 애니화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거침없는 속도감은 오타쿠서사의 응축화가 드러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보여준다. 이 현상들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 서사의 붕괴 이후 서사라는 측면,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라는 고전적 영역이라는 부분에서 충분히 흥미롭다.

여기서 연결해낼 수 있는 재밌는 사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서사의 붕괴를 계속 얘기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서사 그자체라는 점이다. 서사의 붕괴가 이른 시점에서 장르의 사형이 선고되고 서사라는 왕관은 다른 장르의 다른 소화양식을 찾아 통통 튀어가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그것은 단순히 장르의 대체라기보단 새로운 활력의 탐색에 따른 결과와도 같다. 여기서 유희적 인간, 이야기를 원하는 인간이 재확인된다. 서사라는 힘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에 더 밀접하게 접근지어지는 이 흐름의 다음은 아직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일본쪽의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오타쿠문화가 가지는 담론에서부터 트렌드까지에 이르는 전반적인 수입편향은 오래 전 [마징가제트]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마징가제트]의 국적이 밝혀지고 [태권브이]의 표절성이 드러난 사건은 우리에게 강력한 트라우마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끊임없이 극복에의 강박을 가지게 됐다. 영화는 헐리우드를, 애니메이션은 일본을. 이 강박은 미국 애니메이션에의 진한 영향 아래에서 대체역사를 꾸며내서 현재의 가면 쓴 세계, 포스트모던한 독자적 영역(아이러니다)을 구축해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더 나아가 가짜고유성을 확보해낸 오타쿠 문화를 가진 일본과는 다른 점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도 언급되고 있고 김준양의 저작 [이미지의 제국]에서도 지적되는 바이지만 우리가 일본의 원천기술, 데즈카 오사무의 발명품쯤으로 알고 있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은 실은 2차 대전 이전에 이미 미국에서 풀애니메이션에 대한 예술적 반발로써 존재했던 기술이며 그것이 전후에 일본에서 기술적으로 차용이 된 바이고, 2차 대전 이전의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마치 지금의 우리나라가 가지는 무형의 강박처럼 디즈니에 대한 질투와 동경이라는 강박으로 가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그 영역을 가짜 역사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너무 늦거나 일렀다. 그래서 우리의 강박은 계속해서 개발성취적인 영역으로 회귀한다. 이와 관련된 극히 최근의 사건들, 황우석파동과 [디워] 논쟁은 여전히 우리가 그 영역에 고착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른바 독자성이라는 환상이다. 대체할 역사를 꾸며내지 못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바닥을 알아버린 이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꿈과 같은 것.

사실 이 부분까지 오면 우리나라에서의 서브컬쳐 소비층의 전반적인 차원에서 해당되는 문제다. [트랜스포머]의 성공과 [디워]의 옹호층이 로봇물과 괴수물 팬덤의 숫자를 증명한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아즈마 히로키가 설명한 오타쿠의 2세대와 3세대 어느 가운데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서브컬쳐 양상처럼도 보이지만 문제는 그렇게 딱딱 나뉠 것 같지 않다. 인터넷 유토피아라는 범세계적 망상에 발맞춰서 국민의 정부에서 전략적으로 주도했던 인터넷망의 비정상적인 확장은 가짜역사의 확립 또는 역사의 재발굴이 없는, 컨텐츠 부재 상태에서 이뤄지면서 대한민국 인터넷망 안에 정보의 무차별적인 수입과 평준화를 통한 기이한 공백을 가져온다. 이것은 2세대적 인간상과 3세대적 인간상의 혼잡스러운 동시출현이다. 그 결과는 그야말로 유희적 유희라는 차원에서의 온라인 게임, 컨텐츠의 범람으로 보여지고 있다. 소비풀로서의 우리나라는 가히 이상적이지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고색창연한 묘사라고도 할 수 있는 '창조적 견지에서의 빈한함'이다. 내게 이것은 뒤죽박죽인 혼돈 상태로 보인다. 소위 일본에서의 한류라는 짧은 유행이 복고성 때문이었다는 지적은 그래서 산업적으로 잔인해보이는 결론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 책은 저자 자신도 거듭 밝혔듯이 뒤늦게서야 도착한 책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적되는 바들은 예리하고 효용성 있으며 여전히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미래의 한조각을 미리 비춰보는 설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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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2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hallonin 2007-08-23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