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만화 보기 좋은날 1
마스다 코스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나고

 

그냥 귀찮으니 본론부터 들어가자면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은 개그물이 갖춰야 하는 특색들, 즉 일본이라는 지역색과 연재되던 당시의 시대상을 작품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말하자면 꽤 한정될 수밖에 없는 소용범위를 가지는 만화다. 원래 사람을 웃긴다는 게 집중적인 공략포인트를 가져야 효과적인 것인지라 개그가 인류애적인 경우는 별로 없어서, 대부분의 유명한 선지자, 예언가, 사기꾼들이 개그를 잘 못하기도 했거니와 자기들 어록에서 개그를 별로 선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1권의 첫 에피소드는 페리제독의 흑선 내항에 대한 패러디이며 주요 등장인물로 찌질한 쇼토쿠 태자와 마츠오 바쇼가 등장하고 의성어로 '트루시에'가 툭하면 튀어나온다. 뭐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녀 안젤리나 졸리는 알아도 미국의 유명한 개그맨이 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나 관심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 그만큼 개그라고 하는 건 한정된 시공간을 어떤 숙명처럼 가지게 되는 것이고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은 그 숙명을 전혀 비껴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숙명을 가지고 2000년부터 소년 점프에서 연재가 시작되서 현지에선 9권까지 나온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이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출판이 됐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뭐 별 거 없다. 인터넷망이 하도 발달하다보니 소비층이 그럭저럭 심층 글로벌화됐다는 거지.

어쨌든 문화에 대한 소화척도가 깊어진다는 건 산업 발전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따리장수 짐짝을 통해 들어왔던 논노가 교과서로 쓰였던 그 옛날 명동 한복판에서부터 슬슬 시대를 올라와서 이제 우리는 하드디스크 안에 방영 당일 [코드기어스]를 차곡차곡 쌓아두기도 하고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들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려놓기 위해 팍팍 사주기도 하며 인조이저팬에서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일본애들이랑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는 그런 시대에 도달했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수요층 대부분은 그런 시대 그런 인터넷을 통해 다이치 아키타로가 감독한 5분짜리 애니판을 먼저 본 사람들일 것이다.

막간극에 가까운 시간틀 안에서 발빠른 센스들을 줄기차게 쏟아냈던 애니판은 UCC시대에 바로 들어맞는 포맷이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마츠오 바쇼가 뭐에 써먹는 호떡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핸드폰이나 PMP 안에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을 박아넣고 다닐 정도로 강력한 소급범위를 보여줬었다. 물론 시대변화를 고려한 애니판은 원작에서 선별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로 인해 일본외 사람들에게도 지역색이 강한 원작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었다. 그에 반해 원작은 원본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일본 문화에 대한 심화된 이해와 독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을 본다는 건 월드뮤직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

월드뮤직이란 장르명에 대한 논란, 그리고 월드뮤직이란 범주 안에서 수집되어지는 음악들에 대한 식민주의적 시선에 대한 우려에 관해선 예전부터 논의가 있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긴 그 전에는 아예 '제3세계 음악'이라고 이름지어졌던 시절도 있었으니 그때보단 취급이 나아진 거지만. 어찌되었든 우리가 현재 월드뮤직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궤적이, 대개는 영미권에 의해 상대적으로 억압되고 핍박받았던 지역에 속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관점의 바탕을 종적인 역사주의 관점에 메여있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 박제가 된 게 아니라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역사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만 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그 함의에서 소비 뒤편에 숨은 의도성을 더욱 의심케 만드는 것은, 시스템적으로 월드뮤직이 흔히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라는 점에서다. 그런 영역의 음악을 부러 찾아서 소비한다는 것은 소비 촉수가 그만큼 다변화됐다는 뜻이며 광범위해졌다는 걸 의미하며 따라서 그 복잡화된 소비 행동의 동선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역사상 정복국가였던 적이 거의 없는 대한민국에서 월드뮤직의 소비라고 하는 것이 트렌드로써 자리가 잡힌다는 것은 어떤 지표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경제 형태의 전환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상대적 경제 선진국의 문화를 소비하며 상대적 경제 개도국의 산업을 빨아먹는 단계로 들어섰다. 그런 차원에서 월드뮤직의 소용은 취향의 다변화 이전에 있는 음악소비 차원에서 한계에 부딪힌 현실과 그로 인해 새로운 음악 소스 소비를 구축하기 위해 경제 종속적 관계 차원에서 발굴된 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월드뮤직이란 단어를 쓰고 그 장르를 즐긴다는 것에 굳이 죄책감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쿠바, 세파르디, 아프리카, 파푸아 뉴기니, 인도네시아, 타타르스탄의 음악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다만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현상 이면의 흐름과 변화인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 나라에서 월드뮤직이란 장르가 트렌드로써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음악 소비층의 편협화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과연 월드뮤직의 수요층이 어떻게 시작됐는가에 대해서, 아니 트렌드라는 단어의 마땅함에 대해서 심각하게....

 

얘기가 약간 빗나갔는데 암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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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베리 숏케이크 Strawberry Shortcakes - 합본형 애장판
나나난 키리코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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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시에서 살아가는 네 명의 여자들 이야기. 그러나 딱히 그들이 같은 자리에서 얽히는 이야기로 묶여 있지는 않다. 그들중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는 친구 사이인 치히로와 토우코 두 사람. 나머지 둘인 사토코와 아키요는 부딪힐 일이 없는 이들이며 실제로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들로 진행된다. 심지어 목차는 각 캐릭터를 중심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니까 [스트로베리 숏케이크]는 도시와 사랑과 고통이란 키워드로만 묶인 철저한 타인들의 이야기다. 완전하게 단편집도 아닌 것이, 이 불편한 형태는 왜 그러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철저한 타인들을 한자리에서 묶어낸 낯설고 거친 구성은 되려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을 것 같은 이 타인들의 이야기가 광의적인 차원에서 공명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그들은 미묘하게 반복된 같은 꼴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나난 키리코는 삭막하다. 그녀의 그림은 미니멀적이고 도시적인 삭막함을 안고 사랑과 이별과 그에 따르는 고통에 대해 계속 얘기해왔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에서 가장 강렬한 아이러니가 발산되는 부분은 바로 그녀가 만든 모노톤의 세계 속에 자리한 주인공들이 미소를 지을 때다. 흔한 유행가 가사처럼, 그녀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지나치게 부드럽고 예쁘장해서 동시에 공허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 웃음을 보는 이는 깨닫게 된다. 그 인물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며 기만적인지. 그래서 항상 그 텅 빈 웃음은 불길함을 간직한다. 무언가 뒤틀려가고 있다는 불길함. 그리고 [스트로베리 숏케이크]는 시작한지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바로 그 웃음을 보여준다.

[스트로베리 숏케이크]는 그렇게 뒤틀리기 시작한 이들이 아니라 이미 비뚤어진 이들의 도중을 곧바로 보여준다. 공허라는 괴물의 입에 담긴 이들은 어쩔 줄 몰라하거나 자살을 꿈꾸거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됐다. 아래로 끌려 들어가는 나선의 끄트머리에 선 이들.

그리고 모두가 아파하고 모두가 빗나간다. 어떤 이는 후회로, 어떤 이는 욕망으로, 어떤 이는 머뭇거림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선택으로. 슬픔이 넘쳐난다는 걸 청승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스트로베리 숏케이크]는 그 청승을 냉정하고 건조하게 직시한다는 점에서 신파극의 틀을 탈출해낸다(사토코라는 장치가 그렇다). 어떻게보면 [스트로베리 숏케이크]는 그 제목처럼 짧은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웃으며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고 얘기하다가도 다시금 비슷한 고통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 않는가. 그것이 현상이며 또 마치 감기약처럼 그에 대한 위로가 가끔씩 필요도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스트로베리 숏케이크]의 짤막하고 효과적인 기능. 기간한정 해피엔딩.

그러나 정말로 [스트로베리 숏케이크]는 335페이지 내에서의 해피엔딩을 지향한다. 독자들이 완전히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끔 친절한 배려를 한 나나난 키리코는 네 명의 여자들에게 각자 구원을 선사해준다. 그래서 처음처럼 여전히 빛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도시 미궁 속에서 그들은 행복이라기 보다는 만족을 얻게 된다. 그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그렇게 모두 무언가를 잃고 또 얻고서 이야기들은 차근차근 정리된다. 불길한 시작을 남겨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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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 Watchmen 1 시공그래픽노블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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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은 '시계'처럼 정밀한 세공품이다. 그것도 최고급수로 조율된. 아마도 이 책은 단순히 한 번 읽어선 완전히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그 텍스트양과 다양하게 심어진 장치들을 봐서도). 앨런 무어와 데이브 기븐즈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작품을 통제하며 [왓치맨]을 완성했다. 컷의 운동성에 집중하는 일본만화와는 달리 그래픽노블의 전통 안에서 의미의 유기적 흐름에 관한 집중적인 설계를 추구한 [왓치맨]은 컷 하나를 다룸에 있어서 작화적 정밀을 기한 정도가 아니라, 컷 안의 모든 소도구와 텍스트까지 장기적인 작가적 통제 범위 안에 넣고 있다. 여기선 어떤 소재들도 의미 없이 쓰이지 않았으며 어떤 대사와 텍스트들도 의미 없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시공간을 수평한 상태로 직시하는 닥터 맨해튼의 시각을 세계 속에 일치시킨 의도로, 모든 가치와 모든 의미에 대한 '평등한' 주관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의미의 쉼없는 연쇄작용을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다. [왓치맨]은 보면서 계속 앞으로 돌아가게끔 지시하고, 무심코 지나쳤던 씬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 모든 것이 구성해내는 것은 끝도 시작도 없는 세계다.

그러나 긴장 바짝 차려야 한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도상적인 정밀함과 텍스트의 유희와 같은 것들을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직사각형의 단조로워 보이는 '평등한' 배분의 컷들(그러나 충분히 풍요로운)로 디자인된 흐름에 일단 방향타가 잡히면 달리 복잡한 부분을 생각 안하고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왓치맨]은 잘 짜여진 드라마기도 하다. 이야기의 톤을 태생적으로 무겁게 잡아주는, 하나 같이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비틀린 히어로들의 모습은 작품이 발표된 당시 1980년대 중반에 DC코믹스에서 이뤄지던 수퍼히어로물에 대한 해체와 재구축 작업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왓치맨]은 그들의 의미를 좀 더 정치적으로 밀어부친다. 자경단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우경화 경향과 함께 그들 중 가장 극단적인 힘의 존재-닥터 맨해튼과 극단적인 사상의 존재-코미디언에 의해 [왓치맨]의 세상은 날선 갈등의 장으로 바뀌어 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코미디언을 주목할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세계야말로 그가 가장 즐기고 바라마지 않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후드에 대한 고착이 현실에 대한 적응과 부적응의 준거점이 되버린 대부분의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서 그는 자유롭게 세상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와 관련해 [왓치맨]이 제공하는 틀 중 한가지를 빼서 생각해보자. [왓치맨]은 거대한 농담인가? 첫 컷과 마지막 컷의 일치는 세계의 진실-광기를 간파하고 거기서 개그를 찾아내려 했던, 그러니까 이 세계의 철저한 유희자였던 코미디언의 핏방울 묻은 상징이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사실 그의 상징은 표지마저 점령하고 있다). [왓치맨] 세계에서 미국은 수퍼 히어로들의 도움을 통해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이고 덕분에 닉슨이 아직도 대통령 자리에 있으며 그로 인해 냉전의 갈등은 극한까지 이르러, 누구도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핵미사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우리는 그때의 현실이 여기서와는 약간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당대의 소련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그로 인한 냉전의 갈등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코미디언은 그런 공포의 시대 한복판을 유유자적 즐기면서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는 현실 안에서 잔인한 농담을 캐내는 데 능했으며 때론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의 존재는 극단적인 세상에 대한 반영임과 동시에 바로미터였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개그라는 유희로 치환해버릴 수 있는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는 완벽하게 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철저하게 그 틀의 극한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작중의 모든 이에게 사건의 동기로든 심적인 변화로든 어떤 원인으로써 작용한다. 그러니까 [왓치맨]의 엔진은 결국 코미디언이 지배하는 잔인한 농담일 수도 있다. '재미있는 개그는 아니지만 역할론으로서 동조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씬에서 얘기되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는 게 농담처럼 취급 당하는 부분은 현실에선 레이건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이미 이뤄져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왓치맨]에 대해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 해석도 [왓치맨] 안에서 부여되고 있는 수많은 의미와 이야기들의 하나로 얘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앨런 무어의 서사 디자인이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완고한 작가적 통제에도 불구하고 [왓치맨]을 다각도로 해석해낼 수 있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선 망가진 결과를 가져오는 진실을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잔인한 거짓의 승리를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도 없다. 일견 극단론자들을 비판하고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왓치맨]의 일단락을 맺는 것은 극단의 방법론에 의해서다. 어느 한쪽으로 쉬이 결론을 낼 수 없게 만드는 사건들과 그림-텍스트 전반에 농밀하게 깔린 의미들의 점층은 "끝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닥터 맨해튼의 대사를 그자체로 만족시켜준다. 닥터 맨해튼이 스스로 만든 자신의 표상, 뫼비우스의 띠,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 짓는 진실에 대한 모호한 희망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질문. 검은 개미가 좋으냐 붉은 개미가 좋으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이들은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왓치맨]이 지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위태로운 영역이다. 검은 개미와 붉은 개미 중 어느 쪽이 좋다고 반드시 말해야 할 때, 당신은 과연 어떤 태도를 갖출 것인가. 선택을 위해 심각하게 고민할 것인가, 그저 농담처럼 얘기할 것인가. 아니면 질문 자체를 부숴버릴 것인가.



-내용적으론 최고인데도 별 하나를 뺀 건 누차 얘기하고 얘기된, 뒷 부분 찍찍 떨어져나가게 만든 짜증나는 떡제본 때문. 재판부터는 실제본 쓴다니까 뭐 괜찮아지겠지 싶지만 이미 산 사람들은 이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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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8-09-2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라고 했던건 둘째치고 저걸 봐야되나 말아야되나 고민중임다 ;;

hallonin 2008-09-24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는 있습니다. 주변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아이스 헤이번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대니얼 클로즈 글.그림, 박중서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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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스 헤이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블루벨벳]의 마을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익숙하다. 데이빗 린치가 일찌감치 간파했던 그 병적으로 평온한 마을의 근저에는 알 수 없다기보다는 알기 싫었던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대니얼 클로즈는 데이빗 린치의 괴이쩍은 시선이 빚어내어 이후 모종의 컬트적 아우라를 구축해낸 불길한 소도시 이미지를 차용해오지만 그저 그 지점으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가 차별화를 위해 선택한 것은 만화라는 장르 전통에 기댄 양식적 분열이었다.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듯 [아이스 헤이번]은 각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인물과 사건에 맞춰 개개의 스타일을 달리 한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들의 주체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아이스 헤이번]이 분열된 거울상임을 천명하는 것과도 같다.

만화비평가, (자칭) 계관시인, 이기적인 아이들, 탈출을 꿈꾸는 소녀들, 탐정 부부 등으로 이루어진 [아이스 헤이번]의 인물군은 작가 특유의 무심한 시선에 실려서 각자의 너절한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하나같이 지리한 생활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벌어지는 유일한 사건이라면 마을의 음침한 아이 데이비드가 실종되는 일이다. 작품 내에서 액자 구성으로 제시되는 유괴범죄 실화와 비슷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처음엔 전체적인 이야기가 때되면 틀어주는 범죄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자극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예상도 됐지만 기실 데이비드 유괴사건은 [아이스 헤이번]을 끝까지 관통하는 맥거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그 이전에 아이스 헤이번에 거주하는 인물들 중에 데이비드의 실종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그들은 구조적인 관성으로서의 진실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현상에 대한 소비에만 집착한다. 알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를 귀찮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 빠지는 인간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드라마 동기의 기본인 갈등은 어떻게 제시되는가. [아이스 헤이번]의 삭막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자질구레한 갈등 장치의 정체는 그들 모두에게 일관되게 적용되는 '망상행위'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망상을 갖고 있다. 생활사적인 욕구, 성욕, 명예욕, 변신욕 등등을 안고 드러나는 각자의 망상들은 그들이 장차로 가지고자 하거나 혹은 의심하는 선이미지화된 허상의 욕구들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욕구는 실제로 드러나 '빗나가버림'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리얼할 수 있는 이유는 우울한 마을에 대한 전통적인 묘사들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서 제시되는 추상적인 아이콘들로 구축된 세계가 우리 세계와 진한 정서적 동질성을 확보해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망상조차도.

모든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그들은 모두 변화된다. 인간 자체의 변화라기보단 상황적 측면에서 풍파를 맞이한 인물들은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맞이하며 그냥저냥 무대 뒤로 사라진다. 그런데 [아이스 헤이번]이 구조적으로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이르러서다. 처음과 끝부분에 나오는 만화비평가의 해설은 이 작품이 스스로 알아서 모든 답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만화비평가 장치는 친절하게도 모든 답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이기에 되려 답을 감추는 장치다. 언뜻 스스로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는 액자 구성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 비평가마저도 제삼자가 아닌 아이스 헤이번의 구성원이란 점을 기억하라. 그는 '확실하게' 아이스 헤이번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다. [아이스 헤이번]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봐야 하는 인물은 끊임없이 내부의 구조들 속에서 달아나는 이다. 오직 그만이 '변화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떻게보면 [아이스 헤이번]은 그 누군가의 백일몽 속에 구축된 전지적 시점의 망상 모음집과도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아이스 헤이번]의 진정한 예리함은 이야기들의 단락이 아니라 전체적인 '책'을 통시적으로 봤을 때만이 발견할 수 있다. 끝을 맺는 [아이스 헤이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읊어지는 '시적 승화'는 어떤 종류의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잘 짜인 농담이 그렇듯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종류의 것이리라. 달콤하진 않지만 정교하고 날카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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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령 Day Dream 10 - 완결
사키 오쿠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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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0권으로 완결된 [저속령 데이드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일종의 시체 뒤지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시점이었던 어제, 아키하바라에서 어떤 오타쿠에 의한 대낮 참살극이 벌어졌다. 지난 세기말을 열어제꼈던 악령들은 여전히 저 사회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저속령 데이드림]은 명백히 저 1990년대 말의 냉소적인 감각을 가지고 2000년대의 초입에 나타난(그것도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와 같은 소년 에이스에 연재된), 다소 시대착오적이라고 오해될 법도 한 작품이었다. 매너리즘, [저속령 데이드림]의 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질릴 정도로 낭비된 이미지들. 그런데다 주인공이 SM여왕님이라고? 하이구야.

그러나 [저속령 데이드림]은 매너리즘의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만화가 자신의 길을 나아감에 있어서 지면에 그려지는 달콤하게 팬시화된 캐릭터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야마다 레이지식으로 말하자면 '전후 수십년간 흑백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채 안이하게 굴러 온 세상'에서 작품은 진지해지는 것만이 적절한 공격무기가 된다. 그래서 [저속령 데이드림]은 쉼없는 실패와 타협으로 이뤄진 시스템의 역사 밑에서 피어난 악마들을 불러낸다. 도시괴담이란 형태로 드러나는 위협들을.

그것들은 마치 백일몽처럼, 둥둥 떠다니는 공포들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저속령 데이드림]의 적들은 그래서 작품 안에 내내 느슨하고 나른한 탈력적인 분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공포는 더없이 치명적이다. [저속령 데이드림]은 종종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소름끼치는 씬들을 제공해준다. 햇빛 가득한 오후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헤쳐 열려진 자신의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열심히 빨고 있는 악령의 퀭한 눈과 마주친 순간의 그 낯선 공포. [저속령 데이드림]은 악몽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아는 만화였다.

[저속령 데이드림]의 공포는 또한 제대로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찜찜한 무력감에서도 비롯된다. 영과 퇴마사의 격렬한 전투 같은 쌍팔년도 먼치킨 퇴마물적인 활극감은 엿먹으라는 듯 무겁고 침침하게 악령과 마주하고 그에 빙의되어 텁텁하게 해결(에 비슷한 결말)을 가져오는 패턴을 보여주는 각 에피소드들은 이미 처음부터 틀어진 것들 중에 근본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없다는, 어쩌면 세계의 법칙 비스무리한 것을 은연중에 견지한다. [저속령 데이드림]의 이러한 모호함과 내러티브의 복잡성은 캐릭터성의 빈약함을 견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연인 미사키나 소이치로는 제법 괜찮게 잡힌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영 힘을 못 쓰는 두루뭉실하고 무력하기까지 한 인상으로 종종 남는다는 것에서 확인이 된다.

10권에 이르러 [저속령 데이드림]은 아쉬운 감을 감추기 힘들게끔, 일단 끝을 거둔다. 어지간히 복잡했던 이야기의 일단락적 수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완결편은 어떻게 봐도 어정쩡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훌륭했던 9권까지의 전개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문제다). 그것은 언젠가 다시 시작될 이야기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결국 여기서도 끝까지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과 그것을 기술적으로 관철하는 마인드와는 별개로 갈등들이 너무 빠르게 식어버리는 감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권 내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급작스럽게 진행시킨 건 [저속령 데이드림]의 전체를 봐서도 드문 것으로 어떤 작가적 한계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마 [저속령 데이드림]의 끝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여기서 드러나는 총체적인 모호함과 결론 미루기가 이 세상을 드러내는 어떤 표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직도 악령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속령 데이드림]이 보여준 시대착오적인 세기말적 공포는 여전히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 우울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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