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있는 앨범들 중 그나마 제대로 돌아가는, 그러나 정말 끝내주는 스타일리쉬한 음악들을 들려주는 밴드 핑크 마티니의 앨범. 12명에 이르는 밴드 멤버들과 영어, 프랑스어, 일어, 심지어 아랍어에 이르는 10여개 국어를 구사하며 그에 해당되는 민속적 특성 또한 유감없이 끌어냄으로써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적 포지션을 성취해 낸 이들의 다채로운 트랙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카바레사운드적 아우라(엄청나게 달콤한)라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속함으로써 '핑크마티니의 음악'이라는 정체성에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1994년에 결성하여 13년 동안 단 세 장의 앨범을 내놨을 뿐이지만 세련된 하이브리드에 관한 더없이 분명한 인장을 심어준 양반들의 세번째 디너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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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원소]에서 나왔던 믹싱으로 채워지고 쪼개진 스페이스 디바의 일렉트로니카 성악곡이 내용적으로 차지한 그 어마어마한(비대한) 지위에 비해 영 촌스럽고 구닥다리처럼 보였던 이유는 그것이 뤽 베쏭의 오래 묵은 SF적 열정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미 우리 모두가 비요크의 노래를 들은 다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데뷔하면서부터 지난 세기의 마지막 오년여 간을 거의 모든 여자 보컬리스트들이 따라잡아야 하는 경지, 혹은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될 대상, 아니면 그 기이한 열정에의 매혹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다. 마녀와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합쳐서 아연으로 간 다음 오래된 턴테이블에서 돌려서 만들어낸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고안해 낸 불협화음의 엇박자적 조화는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인 순진함과 기괴함이 뒤섞인 이계적인 공간감을 구성해낸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무가 되고 녹슨 쇠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물소리 같고 메아리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독특하고 독보적이어서 누군가가 그녀의 노래를 따라 하면 두가지 대답이 있을 뿐이었다. 비요크를 베꼈다는 소리거나 어설프게 베꼈다는 소리거나.

물론 타인의 매너리즘도 온전히 그녀만이 가진 독자적인 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비요크의 노래는 지겹다던지, 이제는 신선하지 않다던지. 너무 강렬할수록 쉽게 익숙해져버리는 후각의 명민한 게으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 의한 자극은 잦아들어갔다.

 

그러나 비요크는 멈추지 않는다. 그해의 워스트 드레서상을 휩쓸기에 충분할 정도로 괴이한(그리고 웃기는) 패션센스를 지나치게 과감하게 보여주는 그녀의 거리낌없음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길이 어떤 평가를 받든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없어보인다. 결과적인 걸 제외하고 음 자체로 볼 때 그녀는 어지간한 아방가르드 음악을 훌쩍 뛰어넘는 전위적 음악세계로 쉬이, 그리고 꾸준하게 침잠해 들어간다. 하물며 그녀의 메가히트 트랙인 'hyper ballad'조차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화음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이가 우리를 놀라게 만든 주안 아니었던가. 음의 실험에 있어서 그녀의 욕구는 그칠 줄 몰라 보이고 그런 추구는 그녀에 대해 어떤 평가가 떨어지든 아랑곳 하지 않고 지속됐다. 뒤늦게 그녀를 일컬어 포스트 일렉트로니카라고 부르는 표현이 정확한 이유는 그녀가 항상 '그 뒤'를 향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이제야 한국엘 온다. 올해로 마흔을 넘어간 나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순진한 아이 같고 동시에 여전히 천진한 마녀 같다(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목소리 또한). 마치 수줍은 얼굴로 오래된 기담을 노래하는 것 같은 그 얼굴과 목소리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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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2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기억나는 영상은 태국공항에서 인터뷰하는 여기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바닥에 패대기를 쳤던 동영상이랍죠..^^

hallonin 2007-11-2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전후로 비요크 엄마 집에 폭탄이 배달되기도 했고 좀 정서가 많이 불안정했던 걸로 기억되는군요.
 

http://www.siwan.co.kr/community/board_list.asp?db=board_&page=1&ftype=&ftext=

일단 음악 관련이니까, 내용은 좀 멀지만. 소위 마이너 음악계의 두 거두의 분쟁. 이런 게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the world of oz] 앨범 구하려고 시완레코드 홈피 직매장 코너 들어갔더니 지난 달 중순부터 사고가 터져 있었네요. 여기는 어찌된 게 페이지 식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곤란한 분들이 있을텐데 10페이지 부근에서부터 페이지수 잘 외우면서 찬찬히 읽으시면 뭔 사정인지 대강 알게 될 겁니다. 1980년대에서부터 현재까지를 관통하는 양측 간의 알력에 대한 어두운 얘기들이 유구하게 펼쳐짐. 전영혁씨 입장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보이더라고요.

저 개인적으론 어렸을 적엔 주로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하고 김동률씨가 진행하던 프로그램(뭐더라) 들으면 자빠져 자는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전영혁씨는 신해철씨가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넥스트 2집 '오션' 틀어줘서 영광이었다, 라는 얘기를 본 걸로 그 업계적 위치를 어느 정도 느끼던 바였고 성시완씨는 월간 키노에서 레이블이 소개됐던 걸 시작으로 알음알음 지식을 쌓아오던 정도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자세한 코멘트는 못하겠지만 대강 상황을 보니 그럭저럭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아오다가 결국 제대로 폭발한 분위기로 보이네요.

역시나 어깨 너머로 들어본 얘기에 따르면 전영혁씨 지지층이나 성시완씨 지지층이나 은근하게 서로 견제하는 경향이 있다는 소린 들어봤지만 일단 틀어지니 그 골이 의외로 깊어 보입니다. 사람 사는 동네라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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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아니면 그 둘 다이건 굴드의 영상은 보는 재미가 있다. 미셸 슈나이더의 지적에 따르면 충분히 연출된 것이라고 하는, 신들린 예술가의 이미지로써 작용하는 동영상 속의 굴드는 취한 듯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테크닉에 있어선 절대로 흐트러짐이 없다. 그는 때론 협주곡임에도 피아노로 음악을 다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며 그것은 보는 것 자체가 상당한 즐거움이다(번스타인이 협주곡에 있어서 조화를 포기하고 솔리스트에게 모든 걸 떠넘겼던 유일한 예가 글렌 굴드와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보자).

 

이 이중성, 열정 섞인 광기와 치밀한 계산 간의 균열이 보여주는 경이가 굴드가 견지했던 방법론적인 자세였다는 걸 감안하면 그가 '부숴버리는 마인드'(흔하게 록!적이라고 불리는)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순식간에 해치웠던 사건 만큼이나 시대를 앞서서 미디어를 간파하는 식견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선천적인 성격에 일말의 의도가 더해졌을 것이라 의심되는 바이지만 그는 노출횟수를 줄임으로써 영상적인 측면의 자신의 자산 또한 보장하는 방법도 구사했다. 온전히 그의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반한 이가 눈으로 보게될 경이의 창조 순간에 대한 열망을 생각하면 그 선택은 그의 소비자(혹은 노예, 또는 네크로맨틱 그루피, 뭐 어쨌든)가 느낄 소위 짜릿함이라는 감정을 위해서라도 훌륭한 것이었다.

해서, 이 물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또한 적당히 착잡하면서 동시에 음습한 욕망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디지털적인 부활의 증거는 그의 삶이 온전히 피아노(앨범)만 남겨뒀다는 결론에 동의한다면 더욱 괴이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여기서 증발된 굴드의 숨소리를 찾다가 실망하는 이들이 그렇게도 많은 것이리라.

 

 

그 모든 판단이야 어떻든 그의 피아노는 가만히 어둠을 울린다(부활 이전 녹음 한정. 이런 구분까지 지어줘야 하다니). 그가 피아노를 통해 구현했던 수도자적 자세의 결과로 가지게 된 완전한 피아노 소리로의 침잠 만큼이나 가치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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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도 자신이 없어서 꼴랑 500장만 만든 다음 남은 건 아예 폐기처분까지 해버렸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전체 러닝 타임이 33분에서 간당간당할 정도로 짧지만 10개의 트랙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정말 출중함. 그들이 서 있는 시간을 표상하듯 싸이키델릭과 하드록의 예민한 공존에서 비롯되는 때론 몽환적이고 때론 날카로운 긴장감은 밴드 역량이 지탱하고 있는 멋진 멜로디 감각을 통해 강화되어 돌아가는 내내 신나는 드라이빙 감각을 선사해준다. 변방, 밴드가 앨범을 다루는데 있어서 보여준 정확치 않은 이유의 소극성, 그리고 한정된 시간이라는, 모든 면에서 단명을 보장하는 조건들 속에서도 살아남을 운명이었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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