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과 7일 아이들의 학교가 재량휴업일이었다. 휴가를 내고 친정엘 갔더니 앞선 휴일에 들렀다는 동생이 아이들의 어린이날 선물이라고 종이백에 책과 이것저것들을 넣어주었다. 환경직 공무원인 동생의 선물이다. 무엇이든 해야 하는 마음과 충돌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고, 나는 아이들의 책을 꺼내 읽는다. 모두 서양인 저자들의 책-https://blog.aladin.co.kr/hahayo/603247 , 나는 고릴라 이스마엘을 읽고 피식민지 동양인이었던 감정으로 서양인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이다. 다시 식민지가 될 수는 없는데, 라는 충돌하는 감정이 닥친다. 야만에 굴복했던 문명인이 야만을 학습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가운데, 다시 그 야만이 뒤늦은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삐딱하게 읽는다. 아무리 시스템과 체제와 위기에 대해 말해도, 두려움이 더 크다. 물러설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다. 


1. 기후에 관한 새로운 시선

중3인 딸의 종이백에 있던 책. 6개월 간 열심히 공부하고 썼다는 일러스트가 많이 들어간 책이다. 정치와 시스템에 대해 말하는데, 나는 정치와 시스템에 대한 확신이 없다. 왜 사회주의가 실패했는가?(실패했다고 하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 빠진 거 같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위태로운데,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에 대항해야 한다는 말은 뭔가 공허하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 하는 정치적 선택이 과연 환경에 이로운가, 회의하는 순간이 훨씬 많다. 더 싼 전기요금에 대한 요구가 더 환경친화적인 전기생산에 대한 요구보다 클까? 

개개인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분리수거, 일회용품줄이기-이 개개인의 만족을 높이지만, 실질적인 효용은 없다고 산업과 시스템이 문제라는 말이 나는 공허하다.  

 

2. 내일을 지키는 작은 영웅들 

초5인 둘째 가방 속에 있던 책. 드라마틱한 순간과 사람을 묘사하는 이야기. 

가득 들어찬 화려한 문화 가운데, 역시 또 냉소적이 된다. 새우양식을 위해 해안가의 맹그로브 숲을 파괴하는 것에 저항하는 운동가, 원자력발전소에 저항하는 운동가, 벌목에 반대하다가 살해당하는 운동가, 운동가들의 이야기에 나는 말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사라질 것들인가, 싶어서. 나도 나의 아이들에게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있지 못하다. 도시는 아니지만, 도시인처럼 살고 있고, 아이들은 많은 시간 유튜브를 본다. 또래가 보는 문화 안에서, 지금 저 운동가의 삶의 방식은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티끌처럼 작고, 다음을 상상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싶은데, 숲이 잘려나가는 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저항하는 어떤 삶의 태도가 다음 세대에 전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3. 내일을 바꾸는 작지만 확실한 행동

초2인 셋째 가방 속에 있던 책. 그림이 들어갔지만 글밥도 많다. 서양인 저자의 책이고, 어쩌면 태도를 가르치기 위해 이런 저런 짧은 글들을 담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역시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서양인이 쓴 생태주의 책에서 보이는 어떤 단정적인 태도, 자신만만함이 나를 물러서게 한다. 서양인이 쓴 동화에서 묘사되는 공포스러운 자연,과 다른가, 생각한다. 



노력하는 중일 텐데, 나는 겁이 난다. 인간을 위해서 환경도 자연도 지켜야 하는데, 언제나 경계가 분명하고 적이 필요한 사고방식 가운데, 나같이 미적지근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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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을 돌리다가, 영화당( https://www.youtube.com/watch?v=LWBM33mmx0c )을 봤다. '경계선'과 '포제서'라는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경계선'을 소개할 때만 봤다. 보면서, 거슬리는 부분이 계속 생겼다. 인간이 아닌 트롤, 인간과 동물사이의 존재, 동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인 트롤, 들로 계속되는 묘사가 거슬렸다. 

좋아해서 아무 말도 못 쓴 책 중에 하나인 산해경에서 사람의 범주들에 놀랐던 적이 있다. 인간,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 '이 곳 사람들을 보면 얼굴은 사람얼굴과 비슷하지만 새부리가 달려 있어 고기를 잡기에 좋다'-환두국 사람-, '이 곳 사람은 피부가 숯처럼 까맣고 장생불사한다'- 불사민국 사람-,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겨서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셋이나 달려있다.'-삼수국 사람-, '삼신국 사람은 머리가 하나에 몸통이 셋 달려 있다', '일비국 사람은 팔이 하나뿐이고 눈도 하나에 콧구멍도 하나다.' '반체국 사람은 비록 팔은 하나지만 2명이 몸을 나란히 붙이면 비목어와 비익조처럼 함께 걸을 수 있다'.... 산해경을 읽고 있을 때, 이비에스 지식채널 e- 이상한 쇼 (https://www.youtube.com/watch?v=iG-r37qH4cI - 가슴과 엉덩이가 큰 아프리카 부족의 여인이 프랑스의 쇼에서 전시되다가 사창가를 거쳐 해부되어 126년 만에 고국에 돌아가는 슬픈 서사가 있다)를 봤기 때문에 그 대비가 더 극명했던 걸 수도 있다. 

아이가 '인간도 동물이냐?'고 물으면 나는 '동은 움직일 동'이거든, 인간도 움직이니까 당연히 동물이지,라고도 대답할 거다.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과학적 발달을 더디게 했다는 동양의 한자문화권 안에 사는 나는, 서구인이 언어가 가지는 한계 때문에 human과 animal을 구분해내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영화 클립 안에 트롤은 왜 인간이 아닌가? 왜 살아있는 벌레를 먹어서? 얼굴이 못 생겨서? 후각이 예민해서? 동물과 교감해서? 도대체 왜? 계속 묻는 거지. 산해경 속에서 머리가 셋이어도, 몸통이 셋이어도 팔 하나에 눈 하나에 콧구멍이 하나여도 사람이라고 되어있던데, 도대체, 서양사람들은 저런 이유로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생각하는 거다. 

human과 animal 사이에 ape가 있었다가-지식채널 e 이상한 쇼,에서 서구인들은 그 여인을 진화한 유인원이라고 보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찾기 위해 해부했다고 한다-, 이제 트롤이란 걸 개발했나보네,라고 생각했다. 경계에 대해 질문하는 좋은 영화라는 소개가 무색하게도 나는, 전형적인 서구인의 태도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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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1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구인들의 기본 인식체계가 일단 분류하는데서부터 시작되는거 같아요. 동양적 세계관과는 차이가 많이 나죠. 움직이는건 다 동물이니 사람도 동물이라고 아이와 얘기하는 모습에서 아 그렇구나싶기도 하네요. 글 읽으면서 동의할 부분이 많아 잠시 인사하고 갑니다. ^^
 
전환의 시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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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노동의 소중함, 가족의 소중함, 연대와 이상에 대해 '말'하는 나라였다. 이제 소련이라는 나라는 없다. 인재시교를 읽다가 알게 된 수호믈린스키의 동화집을 읽고 서평을 썼었다.(https://blog.aladin.co.kr/hahayo/12131611) 인재시교의 모든 교육적 조언에 동의하지만, 그 교육적 조언 바탕에 깔린 공산주의 동화의 세계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엄마로서 아이를 키울 때 가져야 하는 마음과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살아가야 할 때 마음이 같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내가 가족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빠에 비해 엄마인 내가 가족의 도덕률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부모가 되기 전에 가졌던 이상적인 조직,을 내가 만들 수 없었다. 왜 내가 동생에게 양보해야 해!라는 큰 아이의 항변에 설명의 말을 찾지 못하는 순간이나, 누나가 무섭게 말한다고 우는 동생에게 역시 할 말을 찾지 못한다. 때리지도 않고 욕도 안 하면 좋은 사이인 거라는 외부자의 조언을 듣기도 하고, 엄마로서 모두 중재하지 못하는 가운데, 형제 간의 서열이 좀 작동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조금은 돌보기를 기대하고, 너무 작은 다툼은 알아서 좀 해결했으면 하고도 바란다. 100대 0은 없는 책임 소재에 대해 엄마의 심판을 원할 때, 내가 늘 비판하던 양비론자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큰 아이의 '왜 동생을 돌봐야 하지'라는 억울은 당연하고, 작은 아이의 '왜 누나 말을 들어야 하지'라는 억울도 어쩌면 당연하다. 가족 내에서 조차 이상적이지 않다. 내가 행사하는 권력이 있고, 가족 내에 위계가 분명히 있다. 위계없는 조직, 동등한 권력을 가진 평등한 조직,을 나는 내 가족으로도 만들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왜 남의 나라 이야기를 이렇게 나쁘게 계속 하지,가 되서 사실 좀 화가 났다. 아마도 언론에 실렸을 칼럼이었을 텐데, 너무 지나간 이야기기도 해서 지나간 이야기처럼도 들리고 정말 그러한가 계속 의심이 생겼다. 내 가족조차도 그렇게 만들지 못한, 그러니까 그런 이상적인 조직의 전망이 없는 나는, 그래 도대체 네가 사는 그 나라는 얼마나 평등하길래 그런 것이냐,-노르웨이를 검색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A5%B4%EC%9B%A8%EC%9D%B4 , 우선 왕정이네, 참 나, 민주주의 지수가 제일 높다는데, 뭐 그런다고 문제가 없겠어?-  라는 삐딱한 심사가 되는 거다. 저자는 소련에서 태어나서 자라 이상적인 국가의 상이 있는가, 생각한다. -막 위키에서 검색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B%85%B8%EC%9E%90 - 한국 국적을 가졌으니 우리나라 사람이기는 한데, 나고 자라서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서 계속 다른 나라에 비해서 이 나라는 이상하다는 말을 자꾸 들으니 막 짜증이 났다. 소련이 정말 좋은 나라였어도 이미 사라졌으니, 국제 질서 상에서 그런 이상적인 태도는 유지할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동안에도 억압적이었고, 문제가 많았으니 유지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고도 있다. 내 자신이 가족 내 도덕률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끔 내가 아이들을 억압할까봐 근심하는 나는, 더 큰 조직이 수호믈린스키 동화 속의 이상적인 태도로 유지될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공산주의 동화를 들으면서 자란 어른이 어떤 태도를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렇게까지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 정도 혼란도 이 정도 미친 놈도 없는 세상이 있는가, 싶은 거지. 미친 놈 한 둘을 들어, 여기가 군사화된 나라, 비민주적인 나라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은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민주주의'에 대한 의심도 솟구치는 중이기는 하다.  

내 가족도 이상적이지 않고, 위계나 권력 편중-지금의 나는 권력 편중이 어쩌면 헌신의 댓가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이 없는 조직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없다. 게다가 책이 나왔던 2018년이 아니라 코로나19가 헤집어놓은 2021년에 보기에 우리나라는 꽤나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나라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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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단발머리님의 "궁금한 거 많을 나이 "

예시로 든 것처럼 제 앞에서 지적하는 사람과 제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 중에 고르라면 저는 제 앞에서 지적하는 사람이 더 좋습니다. 그 사람의 지적이 맞는 말이면 받아들이면 되고, 나와 다른 생각이라면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게 한 마디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뒤에서 험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음 친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몸이 부딪치는 현실계에서의 위선과 인터넷상의 위선에는 좀 더 다른 태도입니다. 현실계에서의 위선은 바람직?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에서의 위선은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선이든 위악이든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상의 공간에서 결국 확인할 도리가 없는 말들 가운데서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게다가 말은 얼마나 쉽습니까?
나쁘다,와 위선적이다,라는 말이 무언가 좋고 싫음으로 옳고 그름으로 판단되려면, 결국 그 다음이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위선적인 걸 더 싫어하는 데에는 그 다음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친절하게 말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를 쳤어. 같은 거요.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면 피할 수나 있지, 같은 거요.
사람의 겉과 속, 행동과 말, 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고 그저 노력하는 것일 뿐이지만, 위선에 더 나쁜 평가를 하는 데에는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위선‘이 더 낫다,라고 말할 때의 위선은 ‘선‘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나 노력같은 거지만, 사람들이 위선이 싫다,고 할 때의 위선은 다른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 같은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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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21-05-03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달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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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님) 저같은 경우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나쁜 사람과 위선적인 사람의 구체적인 실례가 있는 경우이고 별족님은 별족님 경우가 있을테니 그건 무언가가 더 낫다고 생각하기 어렵겠지요.
다만 인터넷상의 위선이 끔찍하다고 하시니 그건 좀 의아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 영양가 없고 내용도 없는 제 글을 읽고 ‘말도 안 되는 말, 하지도 마라.‘ 혹은 ‘김치년들 노답(실제로 제 글에 달렸던 댓글입니다)‘이라고 댓글을 달았다고 하면 그게 별족님의 댓글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생각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그래서 다르게 판단합니다. 말은 쉽죠. 특히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은요. 하지만 별족님마저도 자신의 본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이렇게 긴 댓글을 달고 계시지 않습니까. 별족님이 제게 대해 어떤 판단이나 생각을 하고 계신것과는 상관 없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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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달고 싶지만, 그래도 될 지 자신이 없어서, 그냥 여기다 일없이 단다. 다른 의견을 달았다가, 댓글이 지워진 적도 있고, 조롱을 당한 적도 있다. 나는 댓글을 언제나 환영하지만, 내 서재는 인기가 없고^^, 다른 분들은 서재를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반대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은 거 같다.

단발머리님은 내가 하는 말이 ‘위선‘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언제나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말과 행동, 인터넷과 현실. 어제와 오늘. 얼굴 붉히는 부끄러운 말들을 남기면서 지금이지만, 여전히 그래도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선,을 위장하기 위해 말을 꾸민 건 아니다. ‘악‘을 위장하기 위해 말을 꾸미는 게 아닌 것처럼. 현실계에서 천사를 연기하면서 분노를 인터넷에서 쏟아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나의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말하고 싶어한다. 내가 거쳐왔던 날들이고, 내가 어쩌면 반성하는 과거라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말하고 싶다. 인터넷,에서의 위선,이 싫다는 말에는 극으로 치닫는 태도가 싫은 건데 설명하기는 역시 어렵다. 지나치게 높은 선-늑대가 양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처럼-은 인간의 선을 고양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로 하는 극단적인 선,은 극단적인 악,만큼 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쓰기의 공식, 프렙! - 에세이부터 보고서까지 논리적인 구조로 완성하는 글쓰기 비법
임재춘 지음 / 반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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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는 왜 읽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재미있는 게 없나 어슬렁어슬렁 읽는다. 나와 너무 다른 의견은 왜 나오는가 궁금해서 읽는다. 그러면서도 '재미'란 무엇인가 궁리하고, 끝까지 읽었는데도 왜 그런 의견을 가지는지 밝히지 않으면 나쁜 말들을 남긴다. 여기저기 가져다 붙인 미사여구나, 공연히 길다 싶은 말들도 필요한 말인가 질문한다. 결국 자기자신의 무언가 경험과 연결시켜야 해명이 되는데, 그 부분이 비어버린 글들도 만나면, 뭐지 질문한다. 나의 질문은 닿지 않고 결국 수동적인 독자일 뿐이다. 독자인 나도 그저 해야 할 일을 두고 도망가려고 읽는 거기 때문에, 바쁜 마음이 가득해서 평가가 박해진다.  


이 책은 실용적인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먹고 살기 위해 쓰는 보고서, 제품의 사용설명서,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독자가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한 글에도 규칙이 있고 태도가 있다고 말한다.  분명하고 명료하게 쓰라고 그 규칙들은 넓게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책이란 좋은 글이란 그런 글이라고도 말한다. 독자가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 그게 글의 목표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책 말고도 얼마나 많이 읽는지, 당신이 쓰는 글이 읽히고 싶으면, 그렇게 바쁜 독자를 상정하고 쓰라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맨 앞에 쓰고 이유들과 예시들을 덧붙여 문단을 만들고, 그렇게 글 자체를 완성하라고 한다. 자기 과시욕을 억누르는 것,은 글을 쓸 때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보고서를 보는 상사라면 당신이 얼마나 고생했는가가 궁금하지 않다고 수고로움을 쓰는 대신, 다른 걸 쓰라고 한다. 얼마나 어려운 태도인가. 더 많이 쓰기보다 더 많이 지워야 한다. 


좋은 책을 읽고 잘 써야 할 텐데, 잘 쓸 자신이 없어서 펼쳐만 놓고 여러날이 지났다. 

별다섯 책에 쓰지 못한 서평들을 짧게라도 올리기로 하고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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