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준비를 하는데 초4딸래미가 "오늘이 일본군위안부기림의 날이라는데 뭐야?"라고 물었다. 

일본군위안부,가 뭔지부터 설명을 해야 한다. 

뭐라고 하지. 

전쟁에 대해 말해야 하고, 군인에 대해 말해야 하고, 위안,이 뭐였던가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뭔가 애써서 설명을 하고는, 지금 쓰면서는 검색을 했다. 어떻게들 설명하고 있으려나, 하고. 

"일제시대에 일본이 전쟁을 했잖아. 전쟁을 하는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니까 제정신이 아니잖아. 총들고 있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통제가 안 되니까, 여자들을 데리고 가서 위안이라는 걸 해주게 억지로 시켜. 식민지 여자들이나, 점령지 여자들이나 본국의 여자들을 칸막이 방에다 넣어놓고 군인들을 밀어넣지. 군인들은 그 여자들을 때리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고, 그러니까, 여자들은 방에 갇혀서 계속 군인들한테 나쁜 짓을 당하지. 그러다가 애도 생기고"

"돈 벌게 해 준다고 속여서 잡아가기도 했고, 군인들 도망갈 때 죽이기도 했어."


다 늦게 지금 적으면서, 참 사전이 있었는데, 사전을 찾아서 알려줄 걸, 하고는 사전을 찾아봤다.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 사실과 관련된 문제를 국내외로 알리고, 피해자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고 기리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

사전을 찾아서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일본군 위안부,가 뭔지 아는 사람에게 하는 설명이다. 


기리는 게 뭐야? 

기억하고 또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데, 뭐지. 


다음 국어 사전을 찾아봤는데, 추어서 말하다. 라고 되어있다. 추어서,라는 말이 들어있다. 

타동사

[(명)이(명)을](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우수한 점이나 잘하는 일을) 추어서 말하다.

  • 시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은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만들었다.

  •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제정하였다.

 


집에 있는 그림책 두 권을 꺼내 두고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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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들이 필요한가. 

공지영의 인터뷰에서, 내 아이가 맞았으면 달려나가 싸우겠다,를 듣고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다.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는 자신의 아이가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돈이 있으니 자신은 가해자들에게 지옥 맛을 보게 해주겠다고 했지.

 

나도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상상을 하기는 하는데, 내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겁 먹지 마라. 상대도 사람이다. 겁 먹었어도 겁 먹은 거 들키면 안 된다."

"얕잡아 보이지 마라."

이런 대비에 대해 말한 다음, 다시 저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한다.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할 지. 재판을 하고 싶지도 않고, 뭐가 지옥 맛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 줄 마음이 없다. 

아이들의 싸움에서 내 아이는 절대 잘못할 리 없다,는 확신도 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 줄 수 있다. 딱 여기까지가 부모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계획은 그럴 듯 했다. 육아서를 보고, 만 세살이 되기 전에 티비는 보여주지 않겠다고도 했었지. 그런데, 아이를 낳고 친정에서 몇 주 보내는 동안, 나조차도 티비없이 못 지내겠더라. 모로 누워 젖을 물리면서 소설책을 읽는 나를 보고, 잠든 아기를 방에 두고 거실에 나가 티비를 보는 나를 보고, 에이 못 해먹겠다 그랬다. 나도 물론 안 보여주겠지만, 아이를 맡길 때도 부탁해야지 했었지만, 나도 못 하는 걸 어떻게 부탁하나, 그랬다. 

석달의 출산휴가 다음에 출근하면서 아이를 맡기면서는 바란 것은, 저녁에 살아서 만나자, 정도였달까. 좋은 분이었지만, 내 기준에 맞춰달라고 안 했다. 일주일에 두 번쯤 씻기는 나의 기준은, 아주머니께 지나치게 낮았다. 그저 아이가 만나는 어른 가운데, 엄마 같은 어른도, 아줌마 같은 어른도, 아빠같은 어른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유, 예쁘다,라는 말이 아이에게 좋은 말이 아니라고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내 아이에게 '아유, 예뻐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첫째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어른이고 엄마인 내 눈에 보이는 아이는 너무 위태롭게 보였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나의 불안을 아이에게 들키면 아이는 나의 불안을 보고 자신의 불안을 키워서 놀지 못할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놀이터 구석에서 아이를 흘끔거리면서 풀을 매거나, 책을 읽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과 싸운다. 남편의 어떤 말과 행동이 내 눈에 부당해서, 남편이 아이를 혼내는 건 너무 꼴 보기 싫다. 남편조차 그렇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남편과도 싸우게 된다. 내 생각에 혼내지 말아야 할 일에 아이를 혼내서, 내 생각에 어이없는 이유라서. 


그러면서, 부모는 어리석고 약한 존재구나, 생각한다. 

특히 엄마인 나는, 내 자신을 과신하면서, 아이를 안다고 선을 넘는다. 내가 그런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멀찍이서 보면서도 보지 않는 척 연기한다. 

우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아이가, 자기 마음속에 자기 감정을 정리하게 둔다. 

아이가 들었을 말들, 내가 들었다면 분개했을 어떤 말들을 부러 들으려 애쓰지 않는다.

내가 대신 듣지도, 대신 화내지도, 대신 말해 주지도 않는다. 

아이가 듣고, 화내고, 내게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두 세 살 먹은 아이 손을 잡아 미끄럼틀 위까지 올려주고, 또 내려주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기 손으로 잡고 올라갈 수 있을 때 올라가는 아이가 되게 하려고 애쓴다. 


"그래? 엄마가 뭘 말해줄까?"라고 물으면 대개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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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회인가를 보고 거울을 볼 수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만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마지막화까지 봤다. 

악귀,라는 제목이지만, 악귀가 정말 악귀인가 싶은 사건들 가운데, 이입하기 힘든 이야기에 숨쉴 틈이 없이 진지하다고 생각하면서 봤다. 

끝까지 보고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를 타깃으로 할 수 밖에 없어서 이야기가 이런가, 생각했다. 

무능한 엄마에 대한 묘사를 나는, 싫어한다. 구산영의 엄마는 산영이가 아기였을 때 이혼하고 그 집을 벗어났고, 친정엄마를 그런 식으로 잃고 나서, 미혼모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구산영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는데, 왜 저런 식으로 묘사할까 생각했다. 구산영의 엄마가 그렇게 무능했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구산영을 키울 수 있었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운동장의 동전을 줍고, 엄마가 친 사고를 수습하는 딸로 묘사되는 구산영은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것으로 묘사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얽매는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묘사하는 무능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구산영의 자기 확신이 엄마의 무능을 강화하는 관계였겠지- 이야기는 타깃이 젊은이고, 젊은이의 눈에 구산영의 불운은 엄마의 무능에 있는 것이어야 했을까.

 

악귀,의 존재에 대한 연민을 일으키는 과거 사건의 묘사는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를 많이 혼란스럽게 한다. 왜 이런 연민을 불러일으키고도 평화롭게 보내줄 수 없었을까. 악귀의 악행은 자신의 의지가 있었던 걸까. 악귀의 의지는 무엇으로 어디로 향하는 건가. 

이용당하는 악귀, 이용하는 무당과 염해상의 할머니 사이에서는 악귀가 불쌍해 보이다가, 다시 구산영과 악귀 사이에서 구산영이 불쌍해지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댓가가 악귀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머니도 죽고, 아버지와 오빠도 죽고, 그 순간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살 수도 있었던 향이가 그 돈들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가서 동생을 살려 달라고 내밀 때, 악귀,라고 부르기에 불쌍한 향이가 왜 어느 순간 '자신만을 위해 살기 원하는' 악귀가 되었을까. 이미 무당은 향이를 그런 존재라고 설명할까. 산영이 마음 속에 작게 솟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꽉 잡고 실행에 옮길 때, 무엇을 이용하고 있는 걸까. 라이토의 데쓰노트, 같은 걸 젊은이에게 준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악귀,의 존재가 그저 증명하지 못하는 어떤 죽음들에 대해 법이나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한다. 법으로는 방법이 없고,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어, 라는 걸까. 싶기도 하다.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한 시대를 떠나보낸 것인가,라고도 생각했다.

 

마지막화를 보면서는, 젊은이가 죽고 싶어하는 이유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가 의문을 품었다. 나는, 젊은이가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https://blog.aladin.co.kr/hahayo/13054698 사는 걸 버거워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는 건 즐거움의 축제,라기 보다는 고통의 바다,인데, 나도 젊었을 때는 즐거움의 축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를 착각할 수 있게 한 부모의 보호 아래서 내 자신을 거대하게 상상하면서 인생의 어느 단계 어떤 성취만으로 다음 순간의 평안이 보장된다고도 생각했다. 인생에 무언가를 보장하는 성취 따위는 없고, 매 순간 나의 선택이 다음을 만들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고통이 있다는 걸 살아가면서 매 순간 느낀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부모조차 너무 작아져서, 삶이 버거운 순간들에 이게 삶이라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보기에 아쉬울 것 없는 삶들도 나름의 고통으로 괴롭다는 걸, 또래의 죽음들 가운데 안다. 자아라는 게 환상에 불과하고, 삶의 어느 순간 자아는 없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산영이의 말은 스스로를 죽여왔던 자신에 대한 다른 말인 건 알지만, 지금 젊은이들이 산영이처럼 자신을 억눌러야 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억울해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참음,을 그렇게까지 억울해하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어, 싶은 순간들,이 있어서. 

이야기의 어떤 면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동안 너무 나를 억누르고 참기만 했어. 앞으로 안 그럴래'라는 말이 현실의 어떤 세태와 맞물려서 무섭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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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의 달인이 되는 법 : 우리말 어원 사전 -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말’들의 히스토리 말글의 달인
조항범 지음 / 태학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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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말하는 것. 

정확하게 말하는 것과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 

학자라면,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막 재미있지도 확정적이지도 않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이런 저런 어원설이 있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기억나는 건, 점잖다,라는 말이 그러니까 조용하고 분별있게 행동하고 뭔가 좋아보이는 이 말의 어원이 젊지 않다,라는 것. 

주책맞다,의 주책이 줏대,와 같은 뜻이라는 것. 그런데 아예 반어적으로 의미변화가 생겼다는 것. 


화냥이라는 말이 병자호란, 이후 적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를 이르던 환향녀,에서 유래했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 나는 그러니까 환향녀,라는 어원설을 믿었던 거다. 전설의 고향,에서도 봤고, 그런데, 이건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만드는 시대적 분위기 안에서 그런 거지, 실상은 병자호란 이전에도 이미 그 말은 있었다고 하더라. 신기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상황을 읽는다. 실제 어원은 창녀를 이르던 중국말 화낭(花娘)에서 유래했단다. 이건 이야기가 너무 없네. 그래서 사람들이 믿었네, 싶다. 


을씨년스럽다,의 을씨년이 을사늑약,의 을사년이 아니라는 것. 을사늑약이 있기 전에 이미 그 말을 쓰고 있었고, 기록도 남아았다고. 1785년 큰 흉년이 이어지던 을사년에 대한 말이라고 한다. 굶지 않는 시대의 사람들은, 추상적인 국가의 존망에 이런 어원을 연결했구나, 싶다. 


궁금하면 하나씩 다시 찾아보겠네, 싶다. 

말의 어원에 이야기를 하나씩 달고, 그리스로마신화처럼 말해주면 좋겠지만, 원래 그런 게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먼 훗날, 혜자스럽다,나 창렬하다,같은 게 그리스로마신화처럼 남으려면 우선 그 말이 살아남아야 겠지. 

만들어지고 입에서 오르내리고, 변화하고 다시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또 이야기를 만들고, 말이란 참으로 신기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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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이동물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3547749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사고,라기에는 저자가 중국계 미국인이다. 

그래도, 이 책 속의 '모노노아와레'때문에 아래 책-변종-이 떠올랐다. 

지구를 버리고 우주로 떠나게 되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일본인을 묘사한다. 공동체를 위해 '나'를 버리다니 이해하지 못하겠다, 에 존경스럽다,까지. 

한국인인 나는, 중국계인 저자가 가지는 일본인에 대한 태도에 그래, 일본사람들의 문제는 그거지,라고 좀 다른 품평을 하지만, 다시 다른 관점에서 저자가 살고 있는 서양인의 세계에서 일본인에 대해 가지는 경외심,은 동양인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갑자기 변종, 생각이 났다. 




2. 변종

https://blog.aladin.co.kr/hahayo/5205694 

심해 괴물?과의 대결을 블록버스터처럼 묘사하는 소설인데, 모노노아와레 때문에 떠올랐다. 

심해 괴물은 하나하나는 단세포동물처럼 보잘 것 없고, 쉽게 없앨 수도 있지만, 이게 군집으로 움직일 때는 종 자체의 보존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대적하기 어려운 존재로 묘사된다. 

개별적인 자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과연 단 하나의 목표, 종 자체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진행되는 이야기가 갑자기 모노노아와레를 읽다가 떠올랐다. 

동양인인 나는, 종의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는 이르,와 굳이 대적해야 할까 공존을 모색하는 게 낫지 않나하고 생각하면서, 왜 어떻게든 이 비장한 전투를 승리하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투쟁의지를 불사를까?라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모노노아와레에서 일본인을 묘사하는 경외의 감정이, 이르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겹쳤다. 나는 죽어도 나의 종족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함께 움직이는 작고 미약한 존재에 대한 묘사와 겹쳤다. 


3. 도롱뇽과의 전쟁

https://blog.aladin.co.kr/hahayo/10213714

이건 원 서양인이 동양인을 도롱뇽처럼 생각하네,라면서 읽었어서 다시 또 붙이기가 그렇지만. 

그래도, 너무 노골적으로 와닿았어서 빼놓을 수가 없다. 











서양저자의 책들,에서 묘하게 걸리는 태도의 문제들 때문에, 궁금해서 동서양의 인간이해, 도 구해 읽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원처럼 둥근 세상을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낮은 것과 만나고, 무와 유가 다르지 않는 세상을 사는 동양인을, 어느 순간 무한소급을 끊기 위해 절대자 신을 만들어낸 서양인들. 

서양인들에게 동양인들은 미지의 존재가 된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동양인은 도롱뇽이기도 하고, 이르이기도 한 걸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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