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청아님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그래서, 저는,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 때조차도 뭔가를 강경하게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딱 제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만 말할 수 있었죠. 페미니즘이 층위가 다양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진실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층위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결국 사안에서 페미니즘을 선점해서 돌출하는 주장만이 ‘페미니즘‘으로 받아들여지잖아요. 그래서 지금 굳이 책을 찾아 여러 종류의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낙태에 찬성하고, 모자보건법에 아동을 지우고, 난민을 반대하고, 사회적 성취를 하지 못하는 울분을 토로하고, 가족을 건사하는 일을 폄하하면서, 여성이 하는 눈물의 호소라면 상황을 살피지 않고 곁에 서는 태도들을 페미니즘이라고 보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제가 페미니스트인 채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일하는 것에 모순을 느끼지 않았는데, 지금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분들은, 제가 하는 말, 저의 삶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거‘라고 하더라구요. 페미니즘에 다양한 층위가 있으니, 페미니즘 비판이 부당하다는 말은 그래서 저는 좀 이상하게 들리네요.

참, 제3세계 페미니즘,에 대한 불만은 이해합니다만,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자체의 출발이 제1세계 여성들이다보니 그런 분류가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인지하기에 기이한 사고라고 생각하는 자연과 좀 더 가깝고, 여성의 역할과 책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에코 페미니즘,같은-에 대해 그 사람들은 이름붙일 말을 몰랐던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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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 50인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히는 박원순 사건의 진상
손병관 지음 / 왕의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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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나의 말들을 의심하는 날들이다. 그 때 그 말들은 정말 그대로 옳았던 걸까. 돌이켜 생각한다. 그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냐'는 억울함의 토로 같은 건 아니었는지 생각한다. 

미묘한 희롱을 오래 당한 적이 있다. 걸으면서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를 복기해야 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직접 말하지는 못했다. 내가 그런 연결을 하고, 심난해 했다는 것에 상대가 기뻐할 거 같았거든. 이미 늙은 남자가, 이런 저런 말들로 찔러보는데, 내가 반응하는 걸까봐 악착같이 못 알아듣는 사람 연기를 했다. 못 알아듣고 눈치없는 사람 연기를 하는 중에, '00님이 00씨를 예뻐하신다며?!'라는 말을 들으면 또 덜컥하고 겁이 났다. 그게 희롱이 아니었다고, 그 분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를 무섭게 한 건 나에 대한 어떤 행위라기 보다, 내 안에서 부풀린 상상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절한 처벌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게 뒀다. 


책은 돌아가신 분이 나에게 변명할 수 있게 하려고 샀다. 읽는 것은 너무 잡다해서 재미있지는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오해들이 쌓이고, 폭발해버리는 이야기. 

조직에 처음 들어온 여자가 선망하던 사람의 비서가 된다.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고, 기쁘게 일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좋은 유대를 맺었고,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기쁘다. 그런데, 어느 날 동료로서 돈독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내가 존경한, 나를 아꼈던 나의 상사는 충분히 상대를 벌 주지 않는다. 복수심과 배신감이 뒤엉킨 채로 만난 사람들은 상사의 정치적 적대자다. 믿었던 사람들은 나를 배신했고, 지금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나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인 거라고, 읽었다. 


조직에 오래 속한 사람이라서, 조직 밖의 요구들이 기이한 순간이 많다. 권력자라고 해도, 심지어 대통령이라고 해도, 지금은 법에 없는 벌을 줄 수 없다. 조금만 감정적인 거리를 두고 생각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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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출판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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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아, 그러니까 누나를 이해하자. 아침, 아들은 와하하 웃고, 큰 딸은 조금은 억울해한다. 딸은 '이상한'을 듣고 억울해하고, 나는 '이해하자'를 듣고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나는'겁내지 않고 그림그리는 법'을 읽고 있었는데, 책 속에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이상하다,는 말이 있었다.

이 책은 딸이 중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왔었다. 종이책을 읽다가 반납해야 한대서, 이북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 산책할 때, 출근길에 나눠서 이북으로 읽었다. 이북으로 이책을 읽는 중에, 종이책으로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을 읽었고, '한자의 역설'을 읽었다. 동, 서양의 사고체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고 다른 두 권의 책이 동양인 저자의 책이라서, 심지어 '한자의 역설'은 한자 자체가 얼마나 중의적이고, 그 연결 안에서 확장되는 세계관에 대한 책이라서, 이 책의 어떤 태도가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임상보고서같은 내용들인데, 오, 신기하네, 하고 읽어가다가 음,왜 이렇게까지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언어인식불능증'을 진단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목이었다.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을 진단하기 위해 기계어로 녹음된 문장을 들려준다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지장애'를 파악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대화하는 것에는 언어 이외의 많은 요소들, 눈빛과 표정과 제스처가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의사의 수고가 의미가 있나, 우선 의심하고, 그걸 병이라고 하는 것에 물러난다.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서양인 의사는 뇌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 알아내려고 하는구나,라면서 읽는다. 읽으면서는 무언가 '정상'의 범주가 굉장히 좁구나, 느낀다. 마지막 장에서 일반화가 안 되는 구체화만 일어나는 존재에 대한 묘사는 나에 대한 묘사같다고도 느낀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듣는 걸 똑같이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린 적이 있다. 상대의 머릿속은 내가 영원히 알 수 없구나, 깨닫는 순간, 알 수 없는 인간이 깊은 물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이 알 수 없는 느낌을 탐구해서 알아야지, 하는 사람이 아니고, 아 참으로 놀랍다며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결국 자신이 기준일 수 밖에 없는 학자가 상대를 '이상하다'고 판별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물러서는 거다. 기준은 나일 수 밖에 없는데,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건 무얼까, 계속 의심하는 거다. 있겠지, 정상의 범주가 그 정상의 범주를 정의해뒀겠지. 그렇지만, 그 범주를 벗어난다고 뭐가 또 문제일까, 생각하는 거다. 추상화가 안 되는 사람, 인간들 속에서 어지럽다가, 자연 속에서 편안한 사람, 고친다면 무얼 고쳐야 하는지 생각하는 거다. 스스로의 이상함이 걱정스러운 사람에게 '당신의 뇌 중 여기가 비대해져서 이상하네요'라는 말은 좋을까, 싫을까.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어딨어? 다 조금씩 이상해,라는 말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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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1-04-06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이 책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뇌와 관련된 책이었던거 같은데 절판되었던데 다시 출간된줄은 몰랐네요^^
 
한자의 역설 - 한자는 중국을 이렇게 지배했다
김근 지음 / 삼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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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의 관심이 흐르는 데로 내 자신이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고 생각했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247760

그러다가, 페미니스트가 문제삼는 그 많은 것들이 서양문명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530930)

다른 언어, 가운데 다른 생각들이 다른 방식으로 정렬되고 있는 게 아닌가.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은 다르고, 서양문명에서 문제삼는 그 많은 것들이 동양문명에 과연 있는가 의심했다. 

걸어다니는 어원사전을 읽고(https://blog.aladin.co.kr/hahayo/12321381) 표의문자의 세계에 대해 읽어보자고 책을 골랐다. 우리말 어원사전(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4877307)을 먼저 골랐는데, 이건 말들의 어원과 들어온 시기같은 것들이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과연 그 단어가 있었을지 참조할 목적으로 보는 책 같았다. 그래도 우리 말 많은 단어의 가장 큰 지분은 한자어이고, 그래서 다시 이 책을 골랐다. 

재미있게 읽었다. 다른 분이 거의 중요한 부분들을 인용해놓았다. 표의문자인 한자가 이미 그 안에 중의적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극단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말한다. 문자가 이미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특성에 대해 말한다. 재미있다. 극단으로 흐르지 않는 태도, 결국 원처럼 연결되는 끝과 끝에 대한 태도를 읽는다. 거대한 중국, 거대한 동아시아 문화권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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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는 개인홈피중에 김규항님의 규항넷이 있다. 여기에서 '자연을 좋아한다는 말'(http://gyuhang.net/3772?TSSESSIONgyuhangnet=5dead0ce10da31c24bdadef87c7f085e)을 보았다. 나는 그 단정적인 태도가 거슬린다. 

지금의 나는 말과 글, 로 표현되었을 때 왜곡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전해지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다른 서평에 인용한 것처럼(https://blog.aladin.co.kr/hahayo/11596640 당연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믿음조차 의식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결핍된 것이 의식되고 그래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산림에 숨어 사는 즐거움을 타인에게 말하려는 것은 그 즐거움의 결핍이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은밀한 두려움이다. -p137,  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읽다. 심의용 지음.

사람이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의 결핍 때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게 아닌가. 위선이라고 해도,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싫었다. 저런 태도는 서양인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과연 현대적으로도 유의미한가, 질문하면서도 저런 단정적인 태도에 물러난다. 위선,이라도 '선'이다. 위'악'보다는 위'선'을 권장하고, 끊임없이 연기함으로써 어느 순간 '선'해지기를 권장하고 싶다. 동양에서 묘사하는 자연과 서양에서 묘사하는 자연은 얼마나 다른가. 편한 것을 쫓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도, 옳은 게 아니고, 그 말 자체가 화자의 결핍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말 자체가 위선이라고 해서 단정적으로 배척해야 할까. 싫어도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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