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 '배교자' 이승훈의 편지
윤춘호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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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세상이 느려진 기분이다. 가라앉던 상황에 돌출한 종교가 비난받는 와중에, 저녁이면 원말 명초에 종교로 사람을 모아 정치투쟁을 하는 한족의 이야기 '의천도룡기'를 보고 있다. 헌신하는 믿음없이 불가능한 정치적 성취들을 나도 알고 있고, 젊은 날 내가 부모를 속이고-말하지 않았다- 달려나가던 집회의 현장이나, 혀 차는 소리를 못 들은 체 하고 소리높이던 내 자신을 기억한다. 믿음, 이라는 것에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나는 그저 학식도 높은 조선의 선비가 어떻게 기독교도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유학이라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학문을 익힌 조선의 선비가 사람들의 나약함을 자극하여 믿음을 그러모으는 천주교도가 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 이야기는 물론 없다. 정치와 종교의 괴리만큼, 문제의 해결을 찾는 방식이 아예 다르고, 나에게 그걸 설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책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정치적으로 소수파인 젊은이가 가지는 체제전복적 태도 가운데 스스로의 나약함이 선택받은 자라는 자기 확신으로 변하고, 종교공동체 안에서 갖는 권력에 도취되는 과정을 본다. 죽음까지 불사할 수 있는 비밀결사의 마음을 본다. 지금의 탄압에 비할 바 없는 탄압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탄압 속에서, 결국 배교자였으나 교우를 배신하지는 못한 이승훈이 완전한 배교자였던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글이다. 재판의 묘사에서 내가 생각하는 정약용의 이미지는 깨어진다. 어쩌면 저자의 기독교적 배경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도 살아오면서 가졌던 믿음을 버리고 있는 중이라 그저 나의 시대가 죽음으로 탄압받지 않는 게 다행이지 싶을 뿐이다. 믿음이 남겨놓은 흔적은 어딘가 내 안에 있지만, 지금 나는 그게 젊은 어떤 날의 열정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교우들을 죽게 한 성실한 자신의 배교가 마음의 빚이 되어 정약용의 저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모두 변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믿는 일이란, 삶을 바꾸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믿고도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나 앎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알고도 믿으면서도 살지 못할 때, 그 괴리들이 쌓여서 그 모든 흔적들은 글이 되는 것 같다. 다른 책을 읽으면서, 만난 글은 그래서 하릴없이 변명을 쌓는 내 자신에 대한 조소다. 


당연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믿음조차 의식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결핍된 것이 의식되고 그래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산림에 숨어 사는 즐거움을 타인에게 말하려는 것은 그 즐거움의 결핍이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은밀한 두려움이다. -p137,  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읽다. 심의용 지음.

조선 천주교회의 젊은 영수 이승훈은 광신과 맹신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다. 어느 시대나 나라가 박해하고 다수가 손가락질 하는 소수파의 신념은 강성으로 치닫기 십상이었다. 적절한 지도와 조언이 없는 상태에서 이승훈의 신앙은 외곬수로 흐르고 있었다. - P133

이런 와중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교황청의 권위에 직격탄을 가했다. 유럽 곳곳에서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 벌어졌고 교황의 지도력은 땅에 떨어졌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기 국면을 맞아 교황청은 17세기에 보여 줬던 해외 선교에서의 유연성을 잃고 보수적인 원칙론을 고집했다. - P178

20대 시절 뜨겁게 천주를 믿었던 그 흔적이 제 영혼과 마음에 남아 있고 십자가에 매달린 구세주 예수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일까 두려워하던 30대 시절의 방황과 번민의 흔적이 육십 노인이 된 제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겁니다. 저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아직도 정 아무개가 서학을 버리지 못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서학을 믿는 것과 그 믿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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