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하는 개인홈피중에 김규항님의 규항넷이 있다. 여기에서 '자연을 좋아한다는 말'(http://gyuhang.net/3772?TSSESSIONgyuhangnet=5dead0ce10da31c24bdadef87c7f085e)을 보았다. 나는 그 단정적인 태도가 거슬린다. 

지금의 나는 말과 글, 로 표현되었을 때 왜곡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전해지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다른 서평에 인용한 것처럼(https://blog.aladin.co.kr/hahayo/11596640 당연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믿음조차 의식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결핍된 것이 의식되고 그래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산림에 숨어 사는 즐거움을 타인에게 말하려는 것은 그 즐거움의 결핍이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은밀한 두려움이다. -p137,  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읽다. 심의용 지음.

사람이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의 결핍 때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게 아닌가. 위선이라고 해도,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싫었다. 저런 태도는 서양인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과연 현대적으로도 유의미한가, 질문하면서도 저런 단정적인 태도에 물러난다. 위선,이라도 '선'이다. 위'악'보다는 위'선'을 권장하고, 끊임없이 연기함으로써 어느 순간 '선'해지기를 권장하고 싶다. 동양에서 묘사하는 자연과 서양에서 묘사하는 자연은 얼마나 다른가. 편한 것을 쫓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도, 옳은 게 아니고, 그 말 자체가 화자의 결핍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말 자체가 위선이라고 해서 단정적으로 배척해야 할까. 싫어도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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