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하는 CEO - 직관의 오류를 깨뜨리는 심리의 모든 것
유정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책의 말미에 믿음이 사실을 대체하는 순간, 문명이 멸망한다,고 까지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육아서적인 인재시교,에 엄마들의 고민, '어떻게 하면 아이가 공부하게 할 수 있을까요?'나 '어떻게 하면 아이가 게임을 그만 하게 할 수 있을까요?'에 대한 답으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길거리에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다니는 한 무리의 불량배들에게 앞으로 쓰레기통을 발로 차면 돈을 주겠다고 하고 돈을 주기 시작하다가, 어느 날 돈을 안 주면 이 사람들이 하지 않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공부를 하게 하려면 그것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면 안 된다,에 더하여, 무언가를 하기 싫게 하려면 그걸 댓가를 받을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들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이라는 기이한 존재에 대한 통찰이거나 댓가라는 것이 가지는 함정에 대한 이야기라서 기억에 남는다. 나는 CEO가 아니라 엄마라서 경영서적도 육아서적으로 읽게 된다. 

늘 어렵고 힘든 방법이, 모호하고 불투명한 방법이 차라리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이 책을 통해 그런 사고방식을 강화한다. 내게 경영할 회사는 없지만, 키우는 아이들이 있으니,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읽는다.  

내가 회사에서 참 열심히 반대했던 것은 인사이동 마일리지에 대한 거였다. 여러 개의 사업장이 있고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 사업장이 있는 회사에서 비선호 사업장에서 가지는 어떤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서 인사이동 마일리지 제도를 만들었다.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을 때 내가 반대하는 게 더 어려웠던 건, 이 제도 자체를 요구한 것이 늘 신입으로 충원되는 비선호사업소의 젊은 직원들이었다는 거다. 경영적으로 심각한 해악이 있는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젊고 어리석은 직원들을 설득할 말을 애써 찾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리면 지금 이대로가 좋아,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는 순간 같은 거였다. 그러다가 결국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나의 외롭고 애석한 말들이 공정, 이나 정의란 말들 속에 파묻혀서 인사마일리지는 제도가 되었다.

굉장히 오래 걸려 읽었다. 읽으면서 포스트잇을 빡빡하게 붙였는데, 어느 순간, 이걸 어떻게 실행하지,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의 말들을 인용해서 나는 회사가 실행하려는 무언가를 반대할 수 있는데, 돌연 내게 고개를 돌리고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라고 묻는다면 대답을 못하겠다. 게다가 회사가 이 책의 저자가 걱정하는 것만큼 시류에 민감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조직이라기 보다, 전통적이고 거대한 조직이라서 CEO가 아니라 젊고 '개혁적'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그런 해결방식을 들고 나온다. 들고 나와서, 나같은 반대자에게 '그래서 어쩌자고?'로 입을 막는다. 그래서 어쩌자고,의 답은 책 속에 없다. 책 속의 실험들이 나의 조직에 들어맞을 거라는 확신도 없다. 그저 조직을 조직의 문화를 믿음이 사실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그래도 어딘가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나이 든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똑똑하게 말하는 것과 똑똑한 것은 관계가 없다. 또한 말이 많은 것과 똑똑한 것 사이의 상관관계도 미약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똑똑하게 말하는 사람과 말이 많은 사람, 그리고 남의 의견을 공격하는 나르시시스트를 높게 평가하고 그들을 리더로 대접하는 우를 자주 범한다.-p180


성과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역량도 정규분포에 기반해 상대평가하는 회사들이 많은데, 이 또한 조금만 살펴보면 논리적으로 매우 모순임을 알 수 있다. 직원을 채용할 때 역량이 떨어지는 사람부터 역량이 뛰어난 자까지 정규 분포에 들어맞게 골고루 뽑는 회사는 아마 없을 것이다. 기업의 채용능력에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라면 역량이 중간 이상은 되는 직원들을 뽑을 것이고 직원 간 역량의 차이 또한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p200


목표에 집중하면 달성 의욕은 커지지만 동기는 오래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실험은 과정(경험)에 집중하는 방법이 목표 달성에 돌입하도록 만드는 데는 약점이 있지만 일단 돌입한 후에는 지속적으로 동기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p241


왜 그럴까? 피시바흐와 최진희는 목표가 사람들에게 돈과 같은 외적 보상처럼 인식된다고 말한다. 외적 보상이 내적 동기를 저하시키는 것처럼 목표도 그렇다는 것이다. 예컨대 '살을 빼겠다'는 목표는 운동을 경험하는 과정이 아니라 운동을 완료한 후에 얻어지는 보상으로 인식된다. -p242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돈은 목표 달성의 동기를 부여하는 데 매우 부적절한 도구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돈의 폐해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많은 기업들은 금전적 보상을 통해 직원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기대하지만 사실 돈은 직원들 간의 협력을 깨뜨리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장 간단한 도구다. -p286


애컬로프는 이 결과를 '선물교환'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에는 서로 선물을 교환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선물 교환의 개념을 풀어서 말하면 이렇다. 노동자는 자신의 업무량에 딱 맞춰 일할 수 있음에도 높은 임금으로 자신을 고용한 경영자에게 추가적인 노력(선물)을 제공하고, 경영자는 노동시장에서 얼마든지 낮은 임금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지만 추가적인 노력을 기대하고 높은 임금(선물)을 지급한다. 즉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상호성에 입각하여 선물의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애컬로프의 연구는 직원들이 경영자의 생각보다 이기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경영자는 노동자들이 정해진 목표에 딱 맞춰서 일하는 데다 '받는 만큼만 일한다'고 간주하지만, 실제로 직원들은 그보다 더 많은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조직에 기여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 선물이라는 이타심이 성과급이라는 이기심으로 변질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다. 성과급은 이타적인 직원들이 잘 꾸려가던 회사를 이기심이 충만한 직원들로 가득 채우는 촉매제다. 그냥 둬도 괜찮을 텐데 '성과 극대화'란 욕심 때문에 직원들이 알아서 내놓는 선물을 발로 걷어차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과주의가 진정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직원들의 이타심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문화인데 말이다. -p304~305


당신의 회사는 내부 경쟁을 권장하며 성과창출을 지상목표로 설정했는가? 그렇다면 성과를 창출하는 데 소요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생각해보았는가? 내부 경쟁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경쟁은 고비용의 경영방식임을 깨닫고 소모적인 내부 경쟁을 야기하는 제도와 문화를 걷어내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은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까? 동물과 인간은 본성의 원류를 공유하고 있기에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본성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이야기하는지 알아봐야 한다. 다행히 그 교훈은 다음의 한마디로 정리된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p319


사람들의 생각이 통계적인 모순임을 꼬집는 워비곤 호수 효과는 자신이 일을 잘한다고 말하는 직원들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일깨운다. 따라서 "일 잘하는 사람에게 높은 보상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직원들의 말은 "나는 남들보다 능력과 성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내게'높은 연봉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차등 보상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직원에게 "보상을 차등화하면 당신이 남들보다 덜 받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는가?"라고 물어보면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괜찮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진짜로 괜찮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남들보다 연봉을 덜 받을 가능성이 적고 다 많이 받을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등 보상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직원들의 의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차등 보상을 실제로 시행하면 오히려 예전보다 '평가지표가 객관적이지 못하다', '평가가 불투명하다'는 식의 불만이 더욱 가중된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접하곤 한다. 성공은 자신의 능력 덕이고 실패는 남의 탓이라고 보는 경향 때문인지 상사는 직원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는다. ~ 이처럼 차등 보상은 상사와 직원 양측에게 반목과 감정적 스트레스를 조장한다.

이러한 폐해의 원인 중 하나는 '나는 능력이 남들보다 우수하니까 적게 보상 받을 리가 없어. 오히려 많이 받아야 해. 다른 회사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라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차등 보상을 요구하고 인사 부서가 그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듣기 불편하겠지만 이러한 지적은 사실이므로 직시해야 한다. 직원들은 자신이 높은 연봉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심 때문에, 혹은 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직원들이 능력 있는 자신과 비슷한 보상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등 보상을 도입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닐까? ~ 때로는 직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시류를 따르지 않는 용기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p346~347


최선의 방법은 평가의 불완전성을 평가자와 직원이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객관적 평가가 가능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것보다, 평가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한발 물러서서 평가결과를 되짚어보며 잘못된 점을 수정해가는 것이 평가의 오류를 최소화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평가결과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까지 없앨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항상 남과 나를 비교하는 까닭이다. -p377


사람들은 돈보다 가치 있는 일을 갈구한다. 의미 있는 일은 직원들에게 활기 넘치는 건강한 삶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직에게는 생산성 향상과 혁신의 에너지를 선사한다. -p389


밀크만이 수행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불안과 불확실성이 사람들에게 의지력의 고갈 상태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룸메이트가 어떤 피자를 사가지고 올지 모르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불확실성조차 의지력을 감소시켜 장기적이고 혁신적인 대안보다는 즉각적이고 이로움이 덜한 보수적인 대안으로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불확실성이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조직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p433~p434 


이 실험 역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분석을 해봤자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나쁜 선택을 하게 됨을 일러준다. 

윌슨의 연구는 분석보다 직관이 우수하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주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좋은 의사결정에 직관이 유리하냐, 분석이 유리하냐?'라는 질문은 간단히 답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능한 의사결정자가 되려면 자신의 직관을 믿고 따라야 할 때와, 분석을 통해 좀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해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만은 꼭 알아두자. -p478~479


소칼이 장난을 친 이유는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비판만 가한다는 점을 놀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한 번 읽어서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라 해도 권위적으로 보이게끔 포장하면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점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였다. 

사람들은 권위에 약하다. 침팬지들이 우두머리에 복종하고 충성함으로써 생존의 안녕을 보장받으려 하듯 인간의 DNA에도 그런 본능이 강하게 남아있다. 권위를 나타내는 행동이나 말투, 눈빛, 분위기, 남성성을 강하게 풍기는 냄새 등을 통해 후광 효과를 연출하면 대개 꼼짝없이 권위에 굴종하려 한다. 사람들은 뭔가 의심스럽다 해도 전문가가 보는 앞에서는 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언행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 알지도 못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아, 정말 훌륭한 내용이군요."라며 맞장구를 치는 까닭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잘 아는 무리'로부터 축출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판가인 노엄 촘스키는 "쉽고 간단한 말로 표현하면 전문가들은 유명해질 수 없고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전문가의 말을 존중하지 않는다. 여기에 지식인들의 고민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문가들이 쉽게 말해주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쉽게 말하는 전문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꼬집는 말이다. -p481~482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걸까? 웨이크와 귀노트는 세 번째 실험을 통해, 권력을 가진 사람은 예상 결과물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주의 초점'때문에 예상을 벗어나게 만들 잠재적 요소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감안하지 못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계획을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나친 나머지 근거 없는 낙관주의적 착각에 빠져 실행 중에 발생할 돌발변수를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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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X다 - 부디 당신은 O를 골라요
김별로 지음 / 포르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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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린 남자가 쓴 에세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암에 걸렸는데, 이 남자처럼 행동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아니면, 내가 아는 사람이 이 남자처럼 인생에서 고르지 말라는 것들만 골라서 결국 암에 걸렸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세상 사람 모두가 한 마디씩 입을 떼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족력이 있는데, 언제나 모범적인 선택을 하는 형을 보면서 자신은 삐딱한 선택들을 해 왔고, 그 형이 모범적인 선택을 하고도 암에 걸리고, 모든 권하는 치료를 받고도 떠나는 걸 본다면 그건 그대로, 자신의 삐딱한 선택에 대한 나름의 이유가 될 것이다. 

암에 걸리기 전에 한 선택들에도, 암에 걸리고 난 다음의 선택들에도, 떠나는 연인을 잡지 못하는 것에도, 그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인생은 미지수고, 모든 순간의 선택들이 나의 인생이고, 내가 한 선택들이 어떤 결과가 될 지는 알 수가 없다.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거고, 모르는 채로 죽게 될 거다. 살아있는 순간에도, 죽은 다음에도,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아온 순간들의 모든 인연들은 죽는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기 책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은 사람은 책으로 만난 나같은 인연까지도 남기게 되는 거다. 인생을 모른다는 것을 불안의 근거로 삼기보다,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알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뿐이고, 그 다음은 그 다음 닥친 다음에야 생각해야 하는 거다. 그대로 내 삶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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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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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예술 전공자가 파리에서 유학경험을 쓴 쪽글들을 모은 책이다. 

발화되는 순간 사라지는 중인 말처럼, 상연되는 순간 사라지는 극예술-무용, 연극, 오페라 같은-에 대한 이야기는 애틋하다. 

그렇지만, 나는 극예술을 별로 즐긴 경험이 없는 촌사람이고, 문화라는 걸 짝짓기 춤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저자처럼 비장해지지도 애틋해지지도 아련해지지도 않는다. 살짝 물러서서 그런 감상들을 구경한다. 

극장, 극예술이 오랜 역사성을 가진 나라로 유학이라는 걸 간 사람인데, 나는 그 오랜 역사성이 자본주의와 얼마나 결합해 있는지 놀라면서 구경한다. 오페라를 소개하는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장 끌로드 아저씨)를 읽을 때는 와 극장을 잘 아는 건 표 살 때 좋겠네, 저 아저씨는 표를 얼마나 많이 사고 얼마나 많은 공연을 본 걸까, 궁금해하면서 구경했다. 돈을 받고 공연을 팔아 온 도시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돈을 내고 공연을 구경해 온 도시의 관객들이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건가, 생각했다. 영화관에서 좌석배치에 따라 다른 요금을 매기겠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던 우리 나라 상황이 떠올라서, 그 섬세하고 세세한 요금의 차등을 상상하면서 그걸 수용하는 사람들의 성정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복불복이라거나 운인 여기의 삶을 나는 더 선호하고 있다.

오래 서양식으로 공부한 저자의 어떤 이원론적 태도는 충돌하는 말들이 된다. 모계에서 부계로 전환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언설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해내려던 노력(비극의 탄생)은 무언가 거대한 혼돈이 되어버린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물성과 여성이라는 은유적 실체를 일치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나는 그 이야기가 결국 언어로 쓰여지면서 오해를 증폭시킨다고 생각해버린다. 이원론적 방식으로 쌓아올린 서구문명의 두 갈래 길에 과학과 철학 반대편에서 복잡다단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문학과 예술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몸을 가진 실체인 극예술이 극단으로 흐른 거라고 생각한다.(극장과 테러)


무언가 상대적이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거 같은 강자와 약자에 대한 말들 같아서 시학에 대한 저자의 의문을 옮겨 적는다. 

신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 비극이란 관객보다 고귀한 인물의 고통을, 희극이란 그보다 저급한 인물의 고통을 다루는 것으로 규정된다. 모두 고통인 것은 매한가지이나 인물에 대한 나의 거리가 다른 것이다. 고귀한 이의 고통에는 몰입하므로 슬퍼지고, 저급한 이의 고통에는 거리를 두므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이 원리가 나는 언제나 기이했다. 사람은 어째서 늘 당연한 듯 거룩함 쪽에 이입하는가. 윤리적 우위라는 허상에 마음을 기대는 일은 어쩌면 그리도 쉬운가 -p102, '테러와 극장'


장르로서 오페라를 받아들인 이야기는 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적어 둔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정 게임의 문제다. 오페라 관객으로서 나는 그 게임에 참여하기를 오래도록 부인해왔던 것이다. 반면 수많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거기 참여하기 위해 그토록 긴 세월 극장을 찾아왔다. 이 생각을 하면 코끝이 찡해지는데, 왜냐하면 누군가 '믿는 체 하려는 것'은 결국 그가 '믿고 싶은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 아마도 나로부터 먼 것. 멀어서 찬란한 것. 그것을 꿈꾸게 해주는 데 본디 예술의 임무가 놓여 있던 것은 아닌지. 애초에 그래서 인간은 허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닌지. -p146- 147 '장 끌로드 아저씨'


나는 강자와 약자도 상대적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섣불리 대신 말하지도 곁에 서겠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글 속의 어떤 태도-약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혹은 결국 옳다?-가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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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그랬어 221호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지음 / 고래가그랬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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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그랬어,를 동생이 구독해주고 있다. 아이들이 안 봐서 이제 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싶었는데, 둘째가 그래도 이것 저것 보나 보다. 221호가 온 날 내가 퇴근했더니, '교장 선생님이 우산을 부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뭔 소리지, 싶었는데, '1990 무화과 나무'라는 만화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생일선물로 받은 예쁜 우산 때문에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순이는 우산을 펼쳐들고 학교에 갔는데, 학교 앞에서 비는 이미 그쳤고 교장선생님은 번잡한 등교길에 우산을 접으라고 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말을 못 들은 것 뿐인데, 교장선생님은 우산을 빼앗아 부순다. 만화를 보고 내게 묻던 아들처럼, 순이도 친구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기분만 나쁘다. 순이는 우울한 마음이 되어서 집에 오는 길에 우산을 고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우산을 고쳐 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괴로운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기다'라고 말해 준다. 그러면서, 괴롭고 해결책이 없을 때는 잊는 것도 좋다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은 잊어도 좋다고, 똥을 밟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해 준다. 잘 고쳐진 우산을 받고 순이는 상했던 마음도 고쳐진 기분이 되면서 만화는 마친다. 


처음, 트라우마,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안타까워 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참 나,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아무데나 가져다 붙인 트라우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기도 한다. 잊어도 좋을 일을 복기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세태인 거 같아서 저런 말을 책 속에서 만나니까 너무 좋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모욕하면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에 한 법륜스님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 '상대가 똥을 내게 줬으면, 받지 말고 버려야 한다, 그걸 자꾸 들여다보면서 괴로울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었지. 마음 속으로 '반사'를 날리고 조용히 내 자신의 마음 속에 평화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를 내 자신이 왜 자꾸 괴롭히는가. 똥을 밟은 거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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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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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이 쓴 환상문학. 이다. 테드 창,일 때는 그 신선함에 놀랐는데, 켄 리우에 대해서는 조금 물러나게 되는 게 있다. 단편모음집인데, 첫 소설은 아, 사람들이 왜 좋다는지 알겠어, 하다가 계속 여러 개를 읽게 되니까, 동양에 대한 서양의 감정은 뭘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와 언어에 관심이 많은 중국계 미국인 작가가 쓴 이야기가 주목을 받는데는, 동양으로 관심이 옮아간 탐욕스러운 서구 문학계의 태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 테드 창보다, 더 많이 중국적인 이야기들이라서 그런 것도 같다. 731부대나, 종군위안부, 대만에서의 228학살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한자에 대한 이야기도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아, 내가 이런 인상을 받은 데는 '모노노아와레'가 일본인이라는 존재를 묘사한 방식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 것도 같다. 동아시아를 다루지만, 일본과 중국과 대만이 등장하고, '모노노아와레'의 일본인은 무언가 서구인의 환상으로 빚은 존재 같다. 


첫번째 이야기인 종이동물원,은 매매혼으로 미국에 이주한 엄마와 결국 떨어져 나온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언어와 문화가 단절되는 애닯은 이야기로 읽힌다. 

그저 어린아이의 환상이나 잘못된 기억이라고 읽으면서, 감정적으로 고양되었었는데, '즐거운 사냥을 하길' 속의 여우요괴와 요괴퇴마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중국공산당의 포로가 된 자국의 군인이 세뇌를 당했다고 생각했다는 전쟁시기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거다. 동양인을 도롱뇽 정도로 생각하는 서구인이 지금 다시 동양인을 미지의 영역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게 되더라. 


천생연분,이나 레귤러는 중국적이라는 인상은 받지 않았다.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만, 신선하다, 에서는 물러나게 되는 거다. 레귤러는 상처받은 형사가 나오는 범죄물에 몸을 기계로 대체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넣는 방식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파나 모노노아와레는 지구를 버리고 우주로 떠나는 인류에 대한 이야기인데, 파의 이야기는 일본만화가가 그린 2001 Space fantasia(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83262)의 충격을 넘어서지 못한다. 

 

파자점술사,나 태평양횡단터널 약사, 송사와 원숭이 왕,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은 작가가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건 알겠지만 이야기가 잘 얽혔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파자점술사가 배경으로 삼은 대만의 본성인과 외성인(이 번역을 굳이 그렇게 했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번성런과 와이성런이라고 번역하고 괄호 안에 한자를 넣었더라)의 대립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야기는 그런대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킨다. 마지막 거인(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2026),을 떠올렸는데 어른이 아니라 아이라 좀 더 용서가 되는 이야기였다. 태평양횡단터널 약사,는 일본이 패망하지 않은 대체역사,라서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송사와 원숭이 왕은 배경으로 하는 역사를 확인하려고 검색했더니 이야기 속의 책이 위서일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https://blog.daum.net/shanghaicrab/16157384).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내가 역사의 해석이라는 것이, 가서 본다고 정확하겠어?라고 회의하는 사람이라서 미국인의 어떤 태도라는 것이 싫었다. 딱 그런 설정의 SF(아이작 아시모프의 '죽은 과거'(https://namu.wiki/w/%EC%A3%BD%EC%9D%80%20%EA%B3%BC%EA%B1%B0, https://arca.live/b/physics/7958164?p=1)를 세계 SF걸작선(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9075)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훨씬 좋았다. 

 

언어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여전히 파자점술사,의 몇 대목을 옮겨놓고 싶었다. 

 

"마법이 깃든 말은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 그 아이들과 자네가 다 같이 '국'을 마법의 말로 여겼을 때, 그 말에는 일종의 힘이 깃들어. 허나 그 힘은 무지에 기반한 헛된 마법이었네. 마법과 힘이 깃든 말으 그것 말고도 많지만, 그런 말을 쓰려면 먼저 사색과 사유가 필요해" -p164, 파자점술사

 

내가 다른 종류의 마법을 깨닫기 시작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 '일본은 위대하고 중국은 약해 빠졌다,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기를 바라므로 중국은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항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이 무언가 원하는 게 가능할까? '일본'이나 '중국'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건 그저 낱말일 뿐, 지어낸 것일세. 일본 사람 한 개인이 위대할 수는 있겠지. 중국 사람 한 개인이 뭔가 바랄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이 무언가 바라고, 믿고, 받아들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나라 이름 같은 건 다 공허한 낱말일세. 신화일 뿐이야. 그런데 그 신화에는 강력한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희생을 강요하지. 사람을 양처럼 살육하라고 강요하는 거야. -p171, 파자점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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