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
최인호 지음, 김점선 그림 / 열림원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나 어릴 때 아빠는 내 작은 손을 잡고 대숲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최인호 님의「꽃밭」에 들었을 때 나는 그 생각이 났다. 아빠 손잡고 대숲 앞에서 아빠 목소리와 댓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을 때의 평온이 되살아났다. 오래전 그 대숲을 떠나왔고, 나는 성장하고 아빠는 늙었다. 이제는 아빠 손잡고‘아빠하고 나하아고~ ’를 부르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젊었을 때에는,으로 시작되는 아빠의 옛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최인호 님의 「꽃밭」에는 지나간 생에 대한 향수와 애정 그리고 얼마간의 설움이 심어져 있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으로 시작되는 옛이야기들. 미니스커트 아래 예쁜 다리를 자랑하던 여학생은 이제 골다공증 때문에 깎은 연필처럼 허약해진 다리를 힘겨워하고, "내가 너한테 피아노를 안 가르치면 개자식이다." 하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갓난쟁이 딸은 어른이 되었다. 색줏집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잘 하지도 못하는 뽀뽀를 했던, 은밀한 경험의 공범 깜시, 게리 쿠퍼는 세월 앞에서 스러졌다. 분단장 곱게 한 소녀들의 어여쁜 춤사위를 훔쳐보며 "아주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손쉽게 저 여자아이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마음에 꼭 드는 여자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짐했던 소년은 실제로‘아주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마음에 꼭 드는 여자를 선택’하여 아들 딸을 낳았고, 이제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그 시절을 회상한다.

 

작가인 그에게 있어 현재의 하루하루는 "어른과 아이가, 현재와 추억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또한 과거와 미래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꽃밭」 또한 그러한 공간이라 하겠다. 옛이야기 속에는 현재의 이야기가 있고 현재의 이야기 속에는 미래가 흐르고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환장하게 싫어서 결혼하겠습니다." 선언했던 청년 최인호와 "무사히 일을 끝내고 어서 돌아오라고 독특한 손짓을 하던 아내여, 언젠가는 그대가 돌아오라는 작별인사를 한다 하더라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일이 머지않았으므로 내가 아파트 복도를 지날 때까지만이라도 문밖에서 나를 지켜봐주구려." 하고 늙은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간직한 노년에 접어든 최인호가 있다. 또한 대한韓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해방둥이인 그는 격동의 시대를 함께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광복은 왔으나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전쟁은 끝났으나 평화 역시 오지 않았다. 구속에서 풀려났으나 자유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식민에서는 벗어났지만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탄하는 최인호는‘진정한 제2의 해방’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껍데기는 가라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은 무영無影의 내 정신에 짙은 그림자로 새겨졌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어찌 그리도 농염한지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네.

청명한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푸른 하늘이여.

풀어놓은 쪽빛이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 최한경 / 꽃밭에 앉아서


 

 

최인호 님이 生의 꽃씨를 뿌려 가꾼 꽃밭에 앉아 아롱다롱 고운 글의 꽃잎들에 취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의 갈피마다 심어진 김점선 님의 꽃 그림은 최인호 님이 일군 글밭, 글의 꽃밭에 은은한 향기를 더해주고 있다. 이제 나의 꽃밭을 살펴보련다. 꽃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풀은 없는지, 나 모르는 사이 죽어가는 꽃이 없는지, 구석에 새로이 피어나는 꽃은 없는지. 나의 꽃밭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그 님을 기다려야지.‘진정한 제2의 해방’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그 님이 오시면, 진정한 제2의 해방에 이르면, 그때가 되면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까. 생의 무게 내려앉은 어깨를 다독이며 말할 수 있을까. "수고했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