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이야기 - 틱낫한 스님과 데니얼 베니건 신부님이 세상에 전하는
벨 훅스 엮음, 김훈 옮김 / 황금비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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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밖에서의 삶도 감옥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은 곧 감옥이니까요.

전쟁.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이 무서운 말을 우리는 일상에서 입버릇처럼 사용한다. ‘삶이 곧 전쟁터다’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따위의 말들. 이런 말을 하는 저변에는 ‘평화를 향한 갈망’이 깔려 있다. 평화. 우리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그럼에도 이놈의 인간 세상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슬픈 현실이다. 우리들이 그저 안타까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가고, 이들을 죽인 ‘전쟁 - 악의 무리들’은 “현재의 악을 호도하기 위해 추상적인 미래의 선을 내세우는 끔찍한 결의론”으로 전쟁과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악의 근절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평화’일까. 베트남 출신 선승(禪僧) 틱낫한과 미국 출신의 예수회 사제 대니얼 베리건은 ‘베트남 전쟁’을 중심 논제로 삼아 몸소 체험한 전쟁, 악의 실체를 이야기하며 평화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그 뜻이 깊다. 귀중하다. 단순히 평화를 염원하는 종교인들의 관념적 고민 내지는 판에 박힌 설교가 아니라 종교와 문화와 국가와 개인적 체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참된 교류란 것이 어떤 것인지 ‘영혼의 교류’, ‘정신의 교류’가 어떤 것인지의 예증이기 때문에 그렇다. 참된 교류에서 평화는 싹트는 것이다.

묵인침묵,
가난한 사람들이나 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의 용인을 뜻하는
시민권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어리석고 퇴행적인 짓입니다.

틱낫한은 본토에서 추방당한 이래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대니얼 베리건은 베트남전 징집거부로 몇 개월의 감옥생활을 한 일이 있다.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사회로부터의 추방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추방당한 사람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추방시켰는가. 대니얼 베리건 신부가 들려주는 교도소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교도소에서는 늘 입버릇처럼 죄수들을 갱생시키려 노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갱생하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죄수들의 갱생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이더군요. 죄수가 새사람이 되면 저항을 합니다. 대량소비, 전쟁, 경제적인 야망, 포르노 등을 비롯한 모든 것에 노,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국가에 참으로 골치 아픈 존재가 됩니다.” 악행에 대한 저항 분자들을 향한 두려움. 그것이 이들을 추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야기한다. 추방당한 삶이야말로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런 것이 그들이 말하는 고귀한 ‘자기희생’의 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저는 인간이 참다운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정할 때, 자신의 생각과 열망이 하나가 될 때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예로 들어 사회적 통념이나 도덕관념이 절대적 진실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부조리를 낳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들 또한 평화의 길을 걷는 이방인임을 인정한다. “형상의 세계와 비형상의 세계, 욕망의 세계는 우리의 본고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얻기 위해 방황하는 공간입니다.” 틱낫한과 대니얼 베리건, 이 위대한 이방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평화를 깨뜨리는 악, 혼돈, 죽음을 부르는 증오, 폭력에 대응하고 있는데, 그 방식은 종교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기도하고 염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통당하는 인류 속에서 함께 분노하고 항의하고 투쟁한다. 인류의 고통과 자신들의 고통을 따로 여기지 않는다. 함께 걷는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는 삶”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이다. 삶으로써 종교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을 때야말로
우리가 참다운 자신에게 돌아간 때입니다.

 

이러한 삶은 ‘참다운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여로이다. 인생의 본질, ‘나’의 본질을 향한 추구는 비단 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자각은 개인을 비롯해 인류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통찰은 끊임없는 전쟁과 죽음, 가난과 폭력... 크고 작은 재앙들에 관한 근본문제에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힘을 길러주고, 종교와 문화와 국가를 넘어서서 사랑과 이해로 평화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그대 자신의 등불을 밝히고 그 등을 들고 가라


틱낫한과 대니얼 베리건은 종교인인 동시에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평화이야기’ 속에는 시적 은유들과 철학적 사유들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지 못한 사람이라면 쉽게 읽어내지 못할 수 있다. 하품을 하거나 깜빡깜빡 졸음이 찾아들지도 모른다. ‘평화이야기’를 읽는 시간이야말로 전쟁 그 자체라고 느낄지 모른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술술 읽어낼 만한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질긴 소고기와 같다. 꼭꼭 씹어 삼켜야 한다. 참을성 있게 천천히. 그러고 나면 그것은 우리의 피와 살을 이룰 것이다. 충분히 인내하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우리들 또한 전쟁과 피의 자식이며, 평화는 종교나 특정 단체, 특정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궁극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우리의 발이 놓여 있는 곳과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표 사이의 긴장 같은 것을 뜻합니다.
희망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힘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의 존재로부터의 초대 같은 것.

그렇다면 평화를 위해 지금 당장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 자신부터 희망의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희망을 바탕으로 눈앞의 일상에서 평화를 이룩하려는 조그만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세계평화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 습관적 망각이 나의 평화를 추방하도록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평화를 소망하는가? 전쟁을 끝내고 싶은가? 삶에 희망을 뿌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들, 평화의 존재로부터의 초대를 받아들이라. ‘평화이야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희망의 존재가 되자.

 

                                                                                                               H07101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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