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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들입니다. 이 바람은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람 한가운데에서 흔들리면서 댄, 당신의 귀중한 편지를 읽었습니다. 편지를 모두 읽고 났을 때, 당신과 내가 서로의 눈을 가만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본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영혼이 나를 감싸주는 듯한 위안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안에 숨어있던 가장 지혜롭고, 가장 너그럽고, 한없이 사랑으로 넘치는 또 하나의 내 영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요. 당신은 잃어버렸던 나와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를 다독이며 말해주었죠.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당신은 인생의 바다를 잘 헤엄쳐 오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다의 일부라는 믿음. 그게 전부였다고 말씀하셨지요. “너는 네가 다만 파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서운 거야. 난 무섭지 않아. 우린 바다의 일부니까.” 저는 물 위에 뜨지 못합니다. 마음속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무겁기 때문이지요. 저 자신 다만 파도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이런 겁쟁이에게 당신은 당신의 바다와 그 바다에서 얻은 인생의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되고 사랑하는 아내도 잃었지요. 그리고 당신의 소중한 손자, 샘이 태어났지요. 하지만 샘은 여느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자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신의 귀여운 샘. 그리고 여기, 이 글을 쓰고 있는 겁쟁이 샘. 수많은 샘을 위해 당신이 세상을 향해 외친 말은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할아버지는 몸에, 저는 마음에 사고를 당했어요. 하지만 우리 영혼이 다친 건 아니에요.”
샘은 가방의 지퍼도 열지 못하고, 코트도 혼자 입지 못합니다. 연약하지요. 이 연약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비상등을 켜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나한테 지금 문제가 있다. 난 지금 힘든 상태인데,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 ‘연약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려는 신의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우리 자신이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깊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요. 댄, 당신이 만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저는 느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샘인 동시에, 샘을 감싸줄 수 있는 손길이라고. 우리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기꺼이 곁에 다가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과거의 상처에 울부짖는 호랑이, 당장의 행복을 갈망하는 호랑이, 미래에 대한 조급증으로 날뛰는 호랑이, 호랑이, 호랑이. 나의 호랑이들. 이제 당신의 인생지도를 덮고, 나는 다시 망망한 나의 바다에 남겨졌습니다. 때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나를 삼키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나는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물 위에 뜰 수 있다고 믿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발버둥치지 않아도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게 되겠죠. 나는 이제 나의 호랑이와 함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지혜와 힘, 그리고 사랑을 얻었습니다. 언젠가는 뭍에 이를 수 있겠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죠. 그때까지 저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내 삶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내가 찾는 나만의 인생지도가 내 손바닥 위에 놓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