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꿈 뒤에
유미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들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어쩔 수 없도록 짜여진 시간의 사슬 속을 더듬더듬 걸어가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아침 햇살, 달빛, 별빛, 바람, 구름, 한밤중의 빗소리, 냄새, 소리... 보고 듣고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안다는 것의 한계가 아닌가. 비와 꿈 뒤에는 그 ‘너머’의 이야기이다.


우게츠 雨月란 건 말이다. 비 오는 날의 저녁달을 말하는 거야.
비가 오면 달이 안 보이지?
보이지는 않지만 없어진 게 아니야. 어딘가에 있지.

아메는 열두 살의 여자아이. 나비 사진 찍으러 타이완에 간 아빠를 기다리며, 콘크리트 벽과 벽 사이에 고통스럽게 끼어 있는 나무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리고 이 주 후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가 돌아오고부터 아메의 세상은 뒤바뀐다. 아빠는 비에 젖어 돌아왔고, 아메의 세상엔 그때부터 비가 내린다. 『비와 꿈 뒤에』는 아메가 비의 빗속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이 그리움으로 반짝이며, 1초 1초가 맥박 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것과 여기에 없는 것 한가운데
아는 것과 모르는 것 한가운데
소녀는 홀로 서 있었다.

아빠와, 아메를 떠나간 엄마와의 관계, 호쿠토와의 우정 등 가족/성장소설이 기본 얼개로 되어 있는데, ‘기묘한 이야기’ 식의 괴담이 소설 전반에 비처럼, 처럼 내리고 있다. 이 비(의 비)는  ‘기다림’과 ‘죽음’ 을 품고 있다. 중양절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던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서 자살하고 혼이 되어 동생 곁으로 돌아왔다는 ‘국화꽃 언약’, 장사를 하러 나간 후에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내가, 7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음식을 마련해주고 나서 사라진다는 ‘아사지의 집’, 프시케와 에로스를 연상시키는 두루미 아내의 전설, 마법에 걸려 바다 밑 항아리 속에 갇힌 대마왕 이야기 등 -




작년 크리스마스 때 아빠가 사준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마법에 걸려 바다 밑 항아리 속에 갇힌 대마왕 이야기가 있잖아. 처음에는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땅 위의 보물창고를 열어주마.’ 하다가 400년이 지나자,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마.’ 하면서 제법 톤이 떨어지지. 하지만 항아리가 어부의 그물에 걸린 건 1800년이나 지난 다음이었어. 그 사이에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녀석을 죽여버리겠어.’ 하고 생각이 180도 바뀌잖아. 대마왕이 자기를 구해준 어부에게 말하지. ‘오오, 내 구세주여. 각오하거라!’

 

이 기묘한 이야기들은 ‘아메의 기다림과 아빠의 죽음을 둘러싼 이상한 이야기’ 의 코러스와도 같이 소설 곳곳에서 비(의 비)로 내리고 있다.

때로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그토록 확고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흐늘거리다 말끔히 지워져 버리기도 한다. 또 불현듯 비를 품은 비가 퍼붓기도 한다. 물론 이것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나의 세계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현실인 것이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시공간적 현실, 그 너머의 현실.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사슬 사이를 두리번거리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더욱 ‘필사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저 너머, 끊임없이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비와 꿈속에서. 비와 꿈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면서, 두려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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