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개를 돌봐줘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바닥, 마드무아젤 시클레가 반소매 잠옷 차림으로 샤워용 모자를 쓴 채 피의 늪 속에 널브러져 있다. 그녀 옆, 그녀의 고양이 퐁퐁이 혀로 입술을 핥고 있다. 그녀 위, 인간이라 명명할 수 없는 한 사내가 음산한 그림자로 피해자를 덮고 서 있다. 큰 키에 갈색머리, 그는 찻숟가락으로 파낸 피해자의 눈알을 호두알 굴리듯 굴리며 이렇게 되뇐다. “호기심이 너무 많은 건 좋지 않아! 좋지 않단 말이야!” 경찰은 그 정신병자를 제압하고, 장미색과 흰색이 섞인 식탁보로 서둘러 희생자의 시신을 덮는다. 그사이, 고양이가 눈알 하나를 이빨 사이에 물고 달아난다. 둘스 블레트 가는 지금 충격에 휩싸여 있다.
소설은 엽기적인 살인사건 현장의 묘사로 시작된다. 책의 맨 처음부터 나는 흐뭇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즐거운 긴장감 속에서 책장을 넘겨갔다. 막스 코른느루와 으젠 플뤼슈. 이들은 둘스 블레트 - 살인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아파트다 - 5, 6가에 위치한 아파트에 같은 날 입주한 이웃이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아파트 4층에 각각 입주한 그들은 이사하는 첫날부터 충돌을 일으킨다. 그 사소한 충돌은 하나의 전조였을까. 그때부터 이들은 맞은편 아파트 4층 창가로부터 날아오는 병적인 감시의 시선에 시달린다. 이러한 내용은 막스 코른누이와 으젠 플뤼슈의 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불안에 사로잡히다 못해 공포감에 시달리는 두 인물의 독백은 그러나 굉장히 익살스럽다. 우리 익살꾼들의 일기를 통해 나는 이들의 직업이 각각 달걀 세밀화가와 라디오드라마 작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라두 부인의 편지 9.21.THU
사랑하는 엄마, 놀라운 소식이 하나 있어요. (...) 우리 건물에 유명인사가 또 한 사람 들어왔어요! 막스 코른느루 씨라고...... 들어보셨어요? 인기리에 방송 중인 라디오 연속극을 쓰신대요. (...) 그분은 그 불쌍한 시클레 양이 살해당한 방 두 칸짜리 아파트로 이사 오셨어요. 기억나세요? 지난 초여름 맞은편 건물의 한 미치광이에게 살해당안 여자 말이에요! (...) 사실 절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해요. 브리숑 부인 말이에요. 2층에 사는 미망인이요. 그 여자가 키우던 발바리 강아지 엑토르 기억나세요? 그런데 그 강아지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 후로 브리숑 부인이 제정신이 아니에요.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강아지가 살해됐다고 외치고 있어요. (...) 종일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세입자들을 귀찮게 한다니까요. 사나운 눈길을 하고는 계속 혼자 뭐라고 중얼거려요.
막스 코른느루와 으젠 플뤼슈. 익살스러운 두 편집증 환자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독백에 한창 빠져있는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했다. 5가 아파트 관리인 라두 부인과 2층 세입자 브리숑 부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편지 형식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낸다. 라두 부인은 소설 진행에 있어 객관적 서술자의 입장에 놓여있다. 아파트 관리인이라는 그녀의 위치는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절하다. 라두 부인이 양로원에 있는 엄마에게 - 그녀의 엄마는 일 년 전에 죽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 쓰는 편지에는 관리인으로서의 세입자에 대한 평가와 일상의 세세한 부분이 잘 그려지고 있다. 브리숑 부인에 대한 소개에 앞서 또 한 명의 서술자를 소개하고 넘어가겠다. 소설이 결말에 이를 때까지 베일에 싸여있는 이 서술자는 전지적 위치에 있는데,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보다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입장이다.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앞으로 엄청난 비밀을 터뜨릴 장본인이다. 다음으로 브리숑 부인은 쓸쓸한 미망인이다.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자식처럼 키워온 애완견 엑토르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을 넘어서 이미 광기에 사로잡힌 가엾은 이 여인은 경찰서장과 부동산중개업자 노데 씨에게 사건 해결을 촉구, 아니 협박하는 편지를 써댄다. 엑토르. 드디어 개가 등장하였다.
제목 「 개를 돌봐줘 」. 그 개가 이 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엑토르의 죽음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발단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코른느루와 플뤼슈의 편집증 놀이는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이다. 엑토르의 죽음을 시작으로 코른느루와 플뤼슈의 일기, 라두 부인의 편지에는 또 다른 아파트 세입자들, 그러니까 새로운 등장인물이 속속 등장한다. 코른누르와 같은 층에 사는 괴짜 영화감독 자모라, 에로소설 작가 라자르 몽타냑,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꼬마소년 브뤼노, 건물 청소부 푸생 부인과 자폐증을 앓고 있는 그의 아들 가스파르 등등. 그리고 이들은 엑토르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전개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데, 두 번째 죽음이 발생했다. 고무줄로 두 발을 묶인 브리숑 부인이 창가로부터 튀어나와 아파트 현관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채 죽은 것이다. 브리숑 부인의 광기를 잘 알고 있는 아파트 이웃들은 그 엽기적인 죽음의 행태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엑토르의 죽음에 이어 브리숑 부인의 죽음에 뭔가 석연치 않은 배후가 있으리라는 의혹을 품게 된다. 코른느루와 플뤼슈의 편집증 놀이도 갈수록 물이 오르고 있다. 그들의 익살과 함께 긴장감도 고조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사이좋은 편집증 놀이도 더 못하게 되었다. 세 번째 죽음이 발생했는데, 그 죽음의 주인공은 플뤼슈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라파엘 뒤모제의 진술 12.11.MON
“플뤼슈 씨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나요?” “한밤중에 집으로 찾아와 절 공격했어요! (...) 플뤼슈가 제 설치류 중 하나를 인질로 잡았어요. 꼬리를 쥐고 흔들어 엄청난 고통을 주었죠! 가슴을 에는 그 애의 비명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답니다!” “플뤼슈 씨가 비명을 질렀나요?” “아뇨, 제 생쥐가요! 녀석의 가는 콧수염이 고통으로 바르르 떨렸죠. (...) 그자는 야만인이었어요! 저에게 설치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털이 보송보송한 그 작은 뭉치들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죠? 보세요, 제가 보여드리려고 한 마리 가져왔어요.” “당장 치우세요!” “뽀뽀 한 번 해주세요! 제복 입은 사람들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 총 집어넣으세요, 너무 무서우니까. 이 작고 귀여운 머리를 좀 보세요.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앙리에트.”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재직 중인 J.M 에르의 처녀작 「 개를 돌봐줘 」는 처녀작이라는 수식언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뛰어난 구성과 전개방식, 탁월한 유머감각과 통찰력을 겸비한 문장력! ( 여기에는 뛰어난 번역가 이상해 씨의 공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추리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지만, 이토록 익살스러운 추리소설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꾸 ‘익살스러움’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는 무엇보다 긴장감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긴장감을 유발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긴장감, 물론 있다. 그렇지만 이 긴장감은 암울하지 않고 유쾌하다. 분명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삽입되어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개성과 희극적 모양새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신빙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소설을 읽는다. 그들은 거기서 기상천외한 모험, 가장 진한 감동, 가장 놀라운 인물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설가는 불안에 재갈이 물린 사람이다. 그는 이 무시무시한 질문에 끊임없이 부딪힌다. ‘내 이야기에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 그 문제에 조금이라도 지배당하게 되면, 그는 야망을 한정시키고, 생각을 검열하고, 상상력을 거세시키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은 누구나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 하지만 배짱 좋게도 독자에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설가를 추종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쉽게 쓴다며, 전혀 사실임직하지 않다며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많은 경우 허구보다 더 황당무계하다. 모두가 언젠가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252페이지에서부터 나는 범인을 예상하기 시작했고, 분명 그 예상이 맞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아, 여기서 언급하는 ‘범인’이란 어떤 일에 대한 범인인지 밝히지 않았다. 뻔한 거 아냐? 엑토르를 죽인 자, 브리숑 부인을 죽인 자, 플뤼슈를 죽인 자. 이렇게 단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살인사건의 범인이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다.) 나는 이번에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다. 속단하지 말 것. (우리는 이 소설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단정할 수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결말을 예측할 수 없으리라고. 이 책을 선택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우리는 J.M 에르를 향해 외치게 된다. 후속작을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