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 가장 깊은 곳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그런데 머릿속 깊은 곳은 더 이상 분명하게 알아볼 수 없다. 나의 뇌는 구석으로 갈수록 점점 공기가 희박해지는 우주와도 같다. 그러나 공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머릿속 깊은 곳에 뭔가가 있음을 느낀다. 그게 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알 수 없는 그것은 이리저리 맴돌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다시 그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현재가 아닌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전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을 할 가능성도 없는 이들. 우리들에게 서커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도 바로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아흔 살, 아니 아흔세 살일지도 모르는, 나이를 잊어버린 노인 제이콥. 이제 그의 시간은 역류한다.


이 모든 게 다 눈속임이야, 제이콥.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냐. 사람들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니까. 사람들은 우리한테 눈속임을 원해. 그게 눈속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 

  


우리들은 ‘진짜 같은 판타지’를 꿈꾼다. 삶에 닳고 닳은 우리 영혼을 해방시켜줄 ‘두렵고도 낭만적인 탈출구’를.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기.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가 죽어가던 그 시기, 그래서 서커스는 커다란 인기를 누렸던 것이 아닐까. ‘얼굴에 꼬리가 달린 말’이 실제로는 궁둥이를 앞으로 향한 채 돌아서 있는 보통의 말이라는 것, 400킬로그램의 뚱녀는 10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비만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도 그저 깔깔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 판타지, 곧 환상을 찾아 나섰던 이유에서일 것이다. 즐거운 눈속임을 한 잔의 감주처럼 마시고는 다시 현실의 세계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서커스단에서는 나 같은 사람도 받아준다. 죄가 좀 있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래서 서커스단을 따라 도망칠 생각이다. 

촉망받는 명문대생이었던 제이콥이 한순간 부모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서커스단에 매료되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치에서가 아니었을까. 달리는 서커스기차에 올라탄 제이콥에게 비친 서커스단은 하나의 거대한 환상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환상을 즐기려면 언제나 적당한 간격이 필요한 법이다. 서커스단의 실체를 알아가는 제이콥에게 더 이상 서커스단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낭만적인 눈속임의 세계’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당한다는 것을 알고부터 제이콥은 괴로워한다. 그렇지만 끝내 그 환상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거기가 바로 집이었으므로.

 


나이를 먹다 보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 오랫동안 소망해온 것이 진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거짓말 말라고 다그치면 나는 상처를 받겠지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 잊어버려도, 누가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절대 잊을 수가 없겠지요.



간호사의 도움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는, 나이를 잊어버린 노인 제이콥의 회상 부분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 것은 ‘현재를 제집처럼 휘젓고 다니는 과거의 유령들’에 휩싸여 있는 제이콥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이미 그에게 시간은 사라지고 없다. 과거도 현재도, 물론 미래도 없다. 시간이 사라진 곳. 그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환상의 세계만이 있다. 그곳에는 분홍빛 시퀸드레스를 입은 말레나가 코끼리 로지의 등에 탄 채 미소를 띠고 있고, 사악한 오거스트가 날카로운 갈고리를 휘둘러 로지의 몸뚱이를 후려친다. 난쟁이 월터와 캐멀이 기차칸에서 몰래 술을 마신다. 그에게 진실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 환상의 세계뿐이다. 그는 하품하듯 그 세계를 유영한다. 그것이 늙어가는 즐거움일까. 혹은 서글픔일까.


서커스 공연이 끝났다. 공연은 대단히 훌륭했다.

 

즐거운 눈속임. 우리들이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이유도 바로 그 눈속임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기’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글을 부리는 솜씨가 날렵한 곡예사(작가)의 눈속임 때문이다. 기괴하고, 서글프고, 아름다운 곡예! 나는 그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번쩍이는 스퀸 장식을 두른 코끼리 로지, 로지 등에 올라탄 분홍빛 시퀸복을 입은 말레나, 로지의 몸뚱이에 갈고리를 휘두르는 오거스트, 그들을 지켜보는 제이콥. 꿈을 꾼 것일까. 나는 분명 조금 전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여기가 어디지?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판타지에 대한 갈망은 비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노인은 꿈을 꾸고 우리들은 소설을 읽는다. 지금, ‘낭만적인 눈속임’이 필요하다면 여기 매혹적인 서커스단으로 오시라. 빅쇼까지 도달하려면 500페이지를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빅쇼에 앞서 사이드쇼에도 볼거리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믿거나 말거나! 보고 나면 과연 놀라 자빠진다. 신사숙녀 여러분! 세계 최고의 볼거리, 놓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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