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과 풍경 펭귄클래식 40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엄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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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즉 추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것에서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 영혼의 깊은 늪에 잠들어 있는 그것을 찾아서 깨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신이 지닌 가장 놀라운 면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감정도 다양한 방법으로 ㅡ 저마다 다 다르게, 또 때로는 아주 모순된 방식으로 ㅡ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뜨거운 태양, 붉은 천조각을 든 투우사와 성난 황소, 관능적인 미녀들의 정열적인 춤사위. 피카소의 색채, 달리의 구부러진 수염, 안달루시아의 개, 페넬로페 크루즈의 매혹적인 옆얼굴. . . 스페인에 대한 인상 (象)들. 열정, 관능 생기. 어쩐지 스페인의 태양 아래 서면 뜨거운 피가 끓어오를 것만 같았다. 반짝거리고 팔딱거리는 생(生). 그것이 스페인에 대한 인상이었다.


     스페인의 천재 시인이었던 로르카.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스페인에 대한 '인상과 풍경'은 어떠했을까. "온 세상이 아련히 잠들어 있"고, "정적이 흐르는 쓸쓸한 골목마다 옛 유령들이 흐느끼며 지나간다", "한밤중, 안개에 덮여 푸르스름한 호수처럼 변한 들판에서 개들이 짖어댄다".  황혼, 안개, 밤의 정적, 새벽하늘의 창백한 빛. 아련한 인상들. 생기 없고 무겁다. "밤새 울어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백양나무, 바람에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검은 사이프러스 나무", "도시 끝자락" "소나무가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서 있다". 흐릿하고 검푸른 빛,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밤의 검은 눈에 생기를 주는 것은 시(詩), 음악이다. 로르카의 문장에는 리듬이 있다. 문학보다도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는 로르카의 감성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폐허가 된 성터, 무성하게 자란 잡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로르카의 정원에는 음악이 있다. 로르카의 음악에 마음을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한 줄기 부드러운 빛", "보석처럼 화사하게 빛나는" "장밋빛 열정",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들판", "밤하늘에 빛나는 별", "덜그럭거리는 달구지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대학 재학 시절, 은사와 함께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등 스페인 일대를 여행한 로르카의 여행의 기록 ㅡ  『인상과 풍경』 . 시적 감성, 리듬감 있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스페인 곳곳에 대한 인상과 풍경은 로르카의 내밀한 세계와 잇닿아 있다. 거기에서 나는 로르카의 스페인, 로르카의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 붉은색 천에 휘둘리는 황소, 관능적인 여인들. 스페인에 대한 보편적 인상과 풍경은 어쩌면 스페인의 다채로운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방해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영혼의 깊은 늪에 잠들어 있는 그것 - 시(詩)를 찾아서 깨울 줄" 알았던 스페인의 시인 로르카. 그의 '인상과 풍경' 속에서 나는 시(詩)를, 음악을 만났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것에서도 존재하는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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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테리에
엔드레 룬드 에릭센 지음, 손화수 옮김 / 예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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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어둠뿐이었으니까." (p.189)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맨 처음 떠오르는 이름, '가족'이다.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와 맨 처음으로 마주하는 세상. 그 세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를 감싼다. 때때로 그것은 빛이 되기도, 어둠이 되기도 한다. 사춘기 소년 짐에게 '가족'은 '짐'이다. 불안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가 가족의 전부이다. "매일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으로부터 짐을 위무해주는 것,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은 잊혀진 낡은 벙커, 잠수함 기지이다. 그곳에서 짐은 레고 블록을 쌓으며 '짐'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쿠르트와 로게르, 두 친구가 있지만 그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 어느 날 '테리에'라는 소년이 전학을 온다. 덩치가 크고 뚱뚱한 테리에는 싸움개를 연상시키는 악동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싸움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저돌적인 악동은 테리에의 옆자리에 앉게 되고, 악동 테리에의 무게에 짐의 조용한 일상이 기우뚱거리기 시작한다. 

     악동 테리에는 짐의 옆자리에 앉기 시작하면서부터 짐과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짐은 어림도 없다. 왜냐하면 테리에는 악동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 금지된 싸움개까지 가지고 있다 하니 대단한 위험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에 아랑곳없이 테리에는 짐에게 접근한다. 급기야는 짐의, 짐만의 잠수함 기지까지 침범한다. 잠수함 기지는 짐의 유일한 안식처이다. 세상의 무게를 하나씩 내려놓는 곳이다. 거기, 테리에, 그것도 악동 테리에가 들어온 것. 큰일이었다. 짐은 잠수함 기지를 찾기 위해 사투(라고 하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를 벌인다. 이 책 『악동 테리에』는 '짐의 잠수함 찾기'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벙커,  잠수함 기지는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잊혀진 잠수함 기지에서 짐은 세상과의 조용한 전쟁을 잊는다. 불안하고 우울한 엄마의 무거운 한숨, 그런 엄마로 인해 빚어지는 친구들과의 괴리, 외로움을 잊는다. 잠수함은 짐을 감싸주는 동시에 숨겨준다. 자신의 내부로 가라앉는 것. 그 안에서 헤엄치는 것. 잠수함의 상징인가 한다. 한편, 잠수함은 외부와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잠수함은 테리에와의 우정을 맺어준다. 이것은 세상과의 소통, 화해의 시점으로 읽힌다. 그래서 마냥 어둡지 않다. 

     편모, 편부 가정에서 자라난다고 하여 모두 다 불행하고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 속 짐과 테리에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병적인 엄마와 알코올중독자 아빠와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짐과 테리에에게 '집'은 '짐'이다. 오래 전 보았던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라쎄 할스트롬 감독의 '길버트 그레이프'와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다. 두 편 모두 때때로 '집', '가정'은 우리에게 '짐'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족'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가족'이다.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있다. 나에게도 가족은 짐스러울 때가 많았다. 특히 사춘기 시절에는 그 존재감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에게도 벙커, 잠수함 기지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 잠수함 기지를 거쳐 나는 여기까지 흘러왔다. 짐과 테리에가 탄 잠수함 기지는 과연 어디로 흘러갈까. 그들의 앞날이 궁금하다. "어쨌거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나는 이제 나의 잊혀진 잠수함 기지를 둘러본다. "회색빛의 밝은 어둠"이 나를 감싼다. 저기 멀리서 또 다른 테리에(들)이 나의 잠수함 기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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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이황 지음, 이장우.전일주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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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부일체 .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한 몸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 가장 가까이 계신 스승, 바로 아버지이다. 그런데 오늘날 아버지들의 권위가 그야말로 바닥을 치는 것이 현실. 아버지의 자리는 점점 흐릿해져 간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술 취해 늦게 들어오는 사람', '거짓말하고 숨어서 담배 피우는 사람', '돈 버는 사람' ...... 이런 대답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의 대답을 들은 프로그램 진행자가 자신의 일화 하나를 이야기했다. 바빠서 아이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지내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가 자고 있는데, 아직 말을 배우고 있던 아이가 제 엄마에게 하는 말, "엄마, 얜 뭐야?"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벌써 이런 말도 배웠네. 아버지는 아이가 말을 깨쳤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인가 하였다. 아버지의 마음이야 어떠하든 아이들이 느끼고 바라보는 아버지는 '술 취해 늦게 들어오는 사람', '돈 버는 사람'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아버지들의 현실이다. 이제 아버지들은 가정의 중심에 있지 않다. 배경으로 존재한다.


   조선 시대 유학자 퇴계 이황. 이황에게는 준과 채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 채는 장가를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식도 없이 죽었다. 이 책, 이황의 편지글은 몇 편을 빼고는 모두 장남 준에게 쓴 것들이다. '독서에 뜻을 세우라'는 당부로 시작되는 이 편지 묶음에서 그는 학문뿐 아니라 생활 전반, 살아가는 일 전반에 대해 독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조선 시대 아버지라 하여 권위만 내세우진 않을까 예단하면 안 된다. 자신의 병든 몸, 벼슬살이의 고초, 자잘한 집안일까지 아들에게 조목조목 전하는 이황에게서 인간적이고 온화한 아버지상을 볼 수 있다.


   굉장히 상세하게 쓰인 편지글이다. 수많은 이름들이 나오는데, 친가와 처가를 포함한 친척 이름과 집에서 부리던 남녀 종들의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 이 점을 주목할 때, 그가 얼마나 집안일에 세심한 사람이었는가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더라도 농사일에서부터 겨울을 대비할 소금과 미역을 마련하는 일까지 낱낱이 아들에게 전하고 있다.  과거시험, 벼슬살이, 문병, 문상, 목화 따는 일, 집을 증축하는 일 등 세상살이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익하다. 아들이 공부를 게을리할 때에는 엄격하게 꾸짖기도 하지만, 주로 비춰지는 모습은 온화하고 애정 많은 아버지이다. 아들이 병이 났을 때, 며느리가 병이 났을 때 고기와 약을 보내고, 손자 글씨 공부를 위해 붓을 사 보내는 등 이황은 자상한 아버지, 할아버지의 면모를 보인다. 부모 마음, 아버지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아버지와 자식 간의 사이는 어떤가. 그 옛날 아버지의 권위,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어디로 갔나. 아버지와 자식 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 가족 간에 대화가 없다. 아버지는 회사일로 바쁘고, 아이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쁘다.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다. 가족의 의미, 부모 자식 간의 애정을 느낄 수 없다.


   가정은 사회의 최소단위, 가장 기본적인 집단이다. 우리의 뿌리이다. 그래서 예부터 가정교육을 중요시했다. 부모는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고마운 스승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부모 자식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없고, 부모는 아이의 인성교육보다는 학업에 열을 올린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즘 나라 안팎이 어지럽다.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고 원성만 터뜨릴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교육,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우리집에서 제대로 사랑을 주고 인성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것이 곧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이황의 편지 묶음은 우리에게 가정교육(무엇보다 인성교육), 참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잠들어 있는 아빠를 본 아이가, "엄마, 얜 뭐야?" 했다는 일화가 자꾸 생각난다. 웃을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권위,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자리, 부모의 자리를 찾자는 것이다. 참스승이 될 여건을 갖추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의 위치를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얼굴 맞대고 얘기하기 어렵다면 편지를 써 보자. 그 전에 이 책을 펼쳐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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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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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곤로, 곤로는 일본말이다. 화로나 풍로가 옳지만, 그때는 곤로라고 했다. 일본말인지도 모르고 썼다. 곤로에 넣을 석유가 떨어지면 나는 석유 심부름을 했다. 아빠는 석유를 '쇠구지름'이라고 불렀다. 쇠구지름을 사러 풀밭길을 따라 조그만 동네 가게에 갔다. 그 가게는 아주 작았지만 없는 게 없었다. 주조장을 겸한 그 가게는 자잘한 생활필수품과 양냥이(군것질거리)가 가득했다. 내가 쇠구지름, 석유 심부름을 좋아했던 것은 독사탕(돌사탕) 때문이었다. 남은 돈으로 십원 짜리 독사탕, 하얗고 단단한 그 독사탕 몇 알을 얻는 즐거움. 사탕을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도 보고 오물오물 씹어봐도 사탕은 그대로였다. 녹지 않고 깨지지 않는 하얀 독(돌)사탕. 새 사탕을 먹기 위해 입 안에 있던 걸 뱉어내고 먹은 적도 많았다. 석유곤로, 쇠구지름(석유)를 생각하면 다디단 독사탕 맛이 절로 떠오른다. 이제 그 사탕맛은 나의 기억 속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꽁꽁 언 빨래터. 얼음장을 깨뜨리고 빨래를 하던 엄마의 뒷모습도 생각난다. 얼음은 깨져 녹았지만, 찬물에 담궈진 엄마의 손은 빨갛게 얼어 굳어졌다. 엄마는 우리의 내복을 빨았다. 겨울엔 내복을 입었다. 분홍색 줄무늬 내복. 내복을 입으면 다리통이 굵어보인다는 이유로 입기 싫다고, 안 입는다고 떼쓰던 기억이 난다. 고집을 꺾고 내복을 입은 채 학교에 가면 아침 당번들이 석탄을 날라와 난로에 불을 붙였다. 난롯가에 앉아 구멍난 양말 사이로 비집고 나온 발가락을 들이밀던 기억. 참 따듯했다.


     참빗으로 빗어 올려 비녀를 꽂은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 시집올 때 갖고 왔다던 그 은비녀는 여기저기 흠집이 생기고 구부러진 곳도 있었다. 그 못생긴 은비녀를 그러나 할머니는 얼마나 아꼈던가. 좋아했던가. 비녀를 꽂은 할머니를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머리단장을 마치고 참빗으로 우리들 머리를 빗어주던 할머니의 손길. 그 손길 아래 떨어지던 버러지들, 이. 그때엔 이가 많았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해 긁다 보면 손톱 새에 이가 걸려 꿈틀거렸다. 그 이를 잡아 두 손 엄지손가락 사이에 놓고 꾹 눌러 죽이면 톡, 소리를 내며 피를 튀겼다. 통쾌한 순간이었다. 그 많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처럼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한다. 사라지기를 잊혀지기를 바랐던 것도 많은지 모른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것들은 바람처럼, 연기처럼 실려와 우리들 마음을 뒤흔든다. 불편하고, 불량하고, 불결한 것들이라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은 녹지 않고 깨지지 않는 독(돌)사탕과 같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그것'들을 맛볼 수 있다. 마음의 혀로 이리저리 굴리고 오물오물 씹어도 녹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


     이호준 씨의 글과 사진은 우리에게 그 시간, 녹지 않고 깨지지 않은, 않을 시간을 상기시킨다. 아이들의 은밀한 놀이를 제공해 준 원두막이며, 어머니들의 보물단지 장독대,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주기도 했던 물레방앗간, 때맞춰 밥(태엽) 챙겨줘야 돌아가던 괘종시계, - "시계 밥 줘라!"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 참새처럼 노래 부르는 아이들과 풍금 치는 선생님,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었던 서커스단 등 아련한 기억들을 풀어놓고 있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코웃음을 치던 나는 이제야 그 말을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십원짜리 독사탕을 입안에서 오물거리던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본다. 슬며시 웃어주었다. 아이도 싱긋 웃는다. 아이에겐 아직 무거운 쇠구지름(석유)통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간다. 점점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아이는 이제 풀밭길로 들어섰다. 집이 가깝다. 조심해, 뱀이 나올지도 몰라. 아이는 잠시 숨을 돌리고 석유통을 내려놓는다. 무심결인 양 뒤를 돌아본다. 괜찮아요. 한쪽 볼이 똥그란 아이는 또 싱긋 웃는다. 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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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중얼
신천희 지음 / 새론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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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야 스님은 중이(2)다. 열네 살도 자신에게는 벅찬 나이라 한다. 아동문학가의 동심을 두고 하는 말일까. 처음엔 그저 피식 웃고 넘겼다. 그런데 점점 그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개와 고양이, 멧돼지, 새, 거미, 생쥐, 모기, 파리 등 각종 생물체들과 동거하며 얘기도 나누고 승강이도 하는 게 아닌가. 일견 적과의 동침이구나, 단정해버려선 안 된다. 자연 속에 있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아니 죽어 있는 것들까지도 스님에게는 좋은 벗이자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고 있다. 산책길에 나서기 전, 거미줄이 쳐져 있는 고무신을 보고 아차, “내가 요즘 수행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산문 바깥출입이 잦았다”며 정신에 채찍질을 하는가 하면, 방 안을 맴도는 똥파리를 내몰고 나서도 이렇게 중얼중얼,


    눈살을 찌푸리며 똥파리를 내몰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똥파리가 어디에 꼬이는가? 똥 아니면 썩은 생선 같은 더러운 것들에 꼬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 방에서 똥 냄새가 나든지 아니면 내 정신이 썩었다는 이야기다. 이 황당할 정도로 자명한 사실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산속 작은 흙집, 소야 스님은 삼라만상에서 외로움도 달래고 마음 수행도 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작은 미물도 하찮게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개부터 파리까지 모두 의인화를 해놓았다. 끝까지 읽어보기 전에 당연히 사람이리라 속단하고 나중에야 그것, 아니 그분, 스님에게 동거하자고 졸라대던 보살이 생쥐였다는 것을, 거미였다는 것을, 또는 다른 그 무엇이었다는 것을 알고 헛웃음을 치기 일쑤였다.


    중은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나 보지? 그래, 어디 한번 되어보라지! 그 숱한 외로움을 잘 버틸 수 있는지 한번 보게!


     스님의 “그 숱한 외로움”을 곁에서 달래주는 녀석들은 보현이와 호법이다. 개들이다. 개들과의 일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에 대한 마음이 참으로 살뜰하다. 재미있다. 나는 ‘스님’입니다, 내세우지 않고 나는 ‘인간’입니다, 한다. 모르고 읽었다면 누가 이분을 스님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정도로 무게?가 없다. 당최 저런 사람이 스님이야? 하는 시선을 던지는 이들에게 소야 스님의 중얼중얼, “스님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뚝배기에 끓인 찌개 맛이 구수하듯 자신을 태우고 또 태워서 속으로 침전할 때 인간으로서 구수한 맛을 내리라. 이불에 오줌 한번 싸보는 게 소원인 나처럼 철없고 어리석은 중도 오래 끓이고 끓이면 불자들이 경애해 마지않는 중맛이 날까?”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고 마음에서 스러진다는 불교 용어이다. 소야 스님이 만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의 거울이 되어준다. ‘나’를 낮추고 마음자리를 살피면 하늘 아래 그 무엇에서든 자기를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소야 스님의 소소한 일상에서 확인한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닦음의 종교.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닦아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이다. 누가 뭐라 해도 소야 스님은 중이(2)다. 이 책, 중얼중얼에는 ‘중의 얼’, 열네 살 소년의 마음을 가진 중의 얼이 담겨 있다. 맑고 경쾌하다.


    나는 그냥 지금처럼 땡초로, 푼수로 조금 모자란 듯이 사는 게 어울린다.
    내사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마음자리 어수선하고 세상만사 귀찮아지고 고달플 때 이 책을 펼치면 한 엉뚱한 ‘중의 얼’이 중얼중얼 말을 걸어올 것이다. 푼수를 모르고 욕심 부리고 떼쓰는 내가 부끄러워지는 밤. 나 자신이 한없이 무거운 밤이다. 이 책에 담긴 ‘중의 얼’을 좇아 나도 내 푼수를 알고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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