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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중얼
신천희 지음 / 새론북스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야 스님은 중이(中2)다. 열네 살도 자신에게는 벅찬 나이라 한다. 아동문학가의 동심을 두고 하는 말일까. 처음엔 그저 피식 웃고 넘겼다. 그런데 점점 그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개와 고양이, 멧돼지, 새, 거미, 생쥐, 모기, 파리 등 각종 생물체들과 동거하며 얘기도 나누고 승강이도 하는 게 아닌가. 일견 적과의 동침이구나, 단정해버려선 안 된다. 자연 속에 있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아니 죽어 있는 것들까지도 스님에게는 좋은 벗이자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고 있다. 산책길에 나서기 전, 거미줄이 쳐져 있는 고무신을 보고 아차, “내가 요즘 수행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산문 바깥출입이 잦았다”며 정신에 채찍질을 하는가 하면, 방 안을 맴도는 똥파리를 내몰고 나서도 이렇게 중얼중얼,
눈살을 찌푸리며 똥파리를 내몰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똥파리가 어디에 꼬이는가? 똥 아니면 썩은 생선 같은 더러운 것들에 꼬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 방에서 똥 냄새가 나든지 아니면 내 정신이 썩었다는 이야기다. 이 황당할 정도로 자명한 사실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산속 작은 흙집, 소야 스님은 삼라만상에서 외로움도 달래고 마음 수행도 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작은 미물도 하찮게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개부터 파리까지 모두 의인화를 해놓았다. 끝까지 읽어보기 전에 당연히 사람이리라 속단하고 나중에야 그것, 아니 그분, 스님에게 동거하자고 졸라대던 보살이 생쥐였다는 것을, 거미였다는 것을, 또는 다른 그 무엇이었다는 것을 알고 헛웃음을 치기 일쑤였다.
중은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나 보지? 그래, 어디 한번 되어보라지! 그 숱한 외로움을 잘 버틸 수 있는지 한번 보게!
스님의 “그 숱한 외로움”을 곁에서 달래주는 녀석들은 보현이와 호법이다. 개들이다. 개들과의 일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에 대한 마음이 참으로 살뜰하다. 재미있다. 나는 ‘스님’입니다, 내세우지 않고 나는 ‘인간’입니다, 한다. 모르고 읽었다면 누가 이분을 스님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정도로 무게?가 없다. 당최 저런 사람이 스님이야? 하는 시선을 던지는 이들에게 소야 스님의 중얼중얼, “스님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뚝배기에 끓인 찌개 맛이 구수하듯 자신을 태우고 또 태워서 속으로 침전할 때 인간으로서 구수한 맛을 내리라. 이불에 오줌 한번 싸보는 게 소원인 나처럼 철없고 어리석은 중도 오래 끓이고 끓이면 불자들이 경애해 마지않는 중맛이 날까?”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고 마음에서 스러진다는 불교 용어이다. 소야 스님이 만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의 거울이 되어준다. ‘나’를 낮추고 마음자리를 살피면 하늘 아래 그 무엇에서든 자기를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소야 스님의 소소한 일상에서 확인한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닦음의 종교.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닦아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이다. 누가 뭐라 해도 소야 스님은 중이(中2)다. 이 책, 중얼중얼에는 ‘중의 얼’, 열네 살 소년의 마음을 가진 중의 얼이 담겨 있다. 맑고 경쾌하다.
나는 그냥 지금처럼 땡초로, 푼수로 조금 모자란 듯이 사는 게 어울린다.
내사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마음자리 어수선하고 세상만사 귀찮아지고 고달플 때 이 책을 펼치면 한 엉뚱한 ‘중의 얼’이 중얼중얼 말을 걸어올 것이다. 푼수를 모르고 욕심 부리고 떼쓰는 내가 부끄러워지는 밤. 나 자신이 한없이 무거운 밤이다. 이 책에 담긴 ‘중의 얼’을 좇아 나도 내 푼수를 알고 잠이나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