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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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짝을 잃은 아픔 - 상실감 

 

    나는 급히 끝날까 두려워.

 

 

 

   모든 것에는 짝이 있다. 짚신도 짝이 있고 짐승도 짝이 있다. 쉰여덟의 남성 조지는 짝을 잃었다. 싱글맨이 되었다. 살아 있는 누구라도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조지의 아침은 죽음의 예감과 함께 깨어난다. 거울 속에 들어있는 '화석처럼 죽어 있는' 얼굴, 얼굴, 얼굴들.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화석화 되어버린 시간 속 잠들어 있던 그 얼굴은 이미 자기답지 않다. 떠나간 자가 누구든 그와 함께 나의 일부도 잃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우리는 미친 듯이 흔적을 찾아 헤맨다. 그가 있었다는 증거, 그리고 그와 함께 내가 있었다는 증거를. 조지의 짝이었던 짐은 도리스라는 여성과 동행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도리스에게서 조지는 짐의 흔적을 찾아보지만,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육체에는 죽음만이 깃들어 있다. 죽음 앞에서 조지는

 


  "짐, 어때? 지금 이 여자를 보면 두 배로 역겹지 않을까? 네가 희롱질하고 열렬히 입을 맞추고 발기한 네 몸을 넣었던 이 여자의 몸이 그때에도 이미 이렇게 썩을 징후를 품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공포가 스멀스멀하지 않을까?"

 


                                                                                                        발악한다.

 

 

 

 

2. 수많은 싱글맨들 - 소수집단

 

   그렇다면 왜 소수집단 사람들이 착해져야 할까요? 착하게 변해도 돌아올 것은 증오밖에 없지 않나요?

  

 

    나는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애완동물 키우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강아지를 키우기 때문에 개고기는 절대 안 먹는다는 사람에게 그럼 돼지고기나 닭고기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분노를 터뜨렸던 적도 있다. 그렇다. '분노'였다. 나는 왜 성을 내었을까. 내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이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 때문에 분노하고 경계한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으며 너그럽지 못하다. 타인의 취향이 나에게 직접적인 해를 주는 것이 아님에도 공격한다. 두려워한다. 나와 다른 타인의 취향이 지극히 소수의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 이제 똑바로 봅시다. 소수집단은 우리와는 다르게 보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우리에게 없는 결함을 가진 사람일 겁니다. 우리는 소수집단이 보고 행동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소수집단의 결함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짜 자유주의 감상주의로 우리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낫습니다."

 


   조지는 동성애자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우월감, 오해, 경멸 같은 것들을 발견하지만 묵인할 수밖에 없다. 대학 강의를 통해 세상에 토해내는 조지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욱 절박하다.

 

  

 

3. 세계와의 불화 - 괴리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을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막 벗어난 미국은 그러나 여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바로 이 시기가 <싱글맨>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만연해 있는 배경과 조지 개인의 현실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물웅덩이 이야기가 나온다. 밀물과 썰물이 지나가는 물웅덩이를 하나의 대우주, 소우주에 빗댄다. 각자 떨어져 있는 작은 물웅덩이들에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그 물웅덩이들에는 경계가 없어진다. 하나의 바다, 커다란 우주가 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정말 형편없어. 우리는 이 끔찍한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혼란 속에 살고 있어.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혼란이야.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을까? 미술관에 간 관광객처럼 카탈로그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인생을 보내야 하나? 아니면 너무 늦기 전에 아무리 왜곡된 것이라도 신호를 주고받으려고 애써야 하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불화 - 시대적 불안과 소수집단에 대한 사람들의 차별 - 에 분노하고 절망하면서도 한편 희망을 찾으려는 안간힘. 물웅덩이의 비유와 조지의 목소리에서 나는 그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을까?

 

 

 

   4. 싱글맨

 

 

   이 소설은 재미가 없다. 짝 잃은 동성애자의 하루는 경직되어 있고, 불안하고, 불만에 가득 차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나가는 것이 힘에 겨울 정도다.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200쪽을 약간 넘는 분량의 소설이 이렇게 길 수도 있구나, 놀라웠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지루함과 실망감에 빠져 있었다. 조지의 상태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문장은 마찬가지로 경직되어 있었다. 네가 읽든 말든 나는 하던 대로 계속하겠소. 아! 고집스러운 조지. 

 


  "조지는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느낌과 함께 몸에 엄습하는 피로를 느낀다. 활력이 빠르게 빠져나가지만, 조지는 만족한다. 이것이 휴식이다. 갑자기 조지는 몹시 늙는다. 주차장으로 가는 조지의 걸음걸이는 아까와 다르다. 탄력이 없고, 팔과 어깨의 움직임도 딱딱하다. 걸음도 느리다. 가끔 정말 발을 질질 끌며 걷기도 한다. 고개는 처진다. 입술은 늘어지고, 뺨의 근육도 힘이 없다. 멍하게 꿈꾸는 심심한 얼굴. 혼자서 기묘한 콧노래를 부른다. 벌집을 맴도는 벌 소리 같은 콧노래. 걸으면서 가끔 꽤 소리가 큰 방귀를 길게 뀐다."


 

   책을 다 읽은 직후 당분간 나는 아무 생각도 않기로 했다. 그대로 <싱글맨>은 책상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다시 '싱글맨'을 생각했다. 자, 이제부터 싱글맨을 생각해보자 마음 먹은 것이 아니라 싱글맨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흔적을 남겨두었던 부분들을 되읽으면서 나는 감동했다. 싱글맨을 읽으면서 갑갑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갑자기 몹시 늙"어버린 것 같다.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이런 기분이 나도 놀랍다. 20대의 독자를 향해 옮긴이는 10년 뒤에 다시 이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면 새로운 감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0년이 지나서 다시 이 책을 펼친다면 나는 또 어떤 감상에 젖을 것인가. 그보다, 10년 뒤에 나는 살아 있을 것인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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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철학자들의 서 -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숭고한 철학적 죽음의 연대기
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 이마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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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마법에 걸린 왕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키에르케고르의 다섯 형제들이 차례로 죽어가자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과거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믿은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너는 34세 이전에 죽을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을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순간의 충격을 '대지진'이라고 이야기했다. 실로 키에르케고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대지진' 사건 이후 키에르케고르는 평생 '죄의식'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다. 자신의 죄의식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 올겐과의 약혼도 파기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들보다 앞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저서들이 어렵기보다 흥미롭게 읽혔다. 평생을 '죽음에 대한 불안'과 함께 살았던 철학자의 고뇌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10년 후, 20년 후 그보다 더 훗날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지금처럼 살아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습관처럼 허무감에 빠진다. 무엇인가 소리없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 이토록 나는 죽음 앞에서 나약하고 무력하다. 그만큼 더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 내 지력(智力)으로는 부족해서 이런저런 죽음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도 한다. '결국 그 길은 혼자 찾아야 한다' 책을 읽다가도 아프게 쳐드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일쑤. 그러면서도 호기로운 척 '죽음'을 두고 농지거리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태도를 취하든 살아 있는 한 '죽음'과 떨어질 수 없다.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일상에서도 우리는 자주 '죽음'을 이야기한다. 죽기보다 싫다고 옹고집을 부리거나 죽을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아본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씹어죽일 년, 똥물에 튀겨죽일 년, 때려죽일 놈, 벼락맞아 죽을 놈 등 죽음 관련 욕설들도 헤아릴 수 없다. 욕설들을 늘어놓다 보니 재미있다. 슬쩍 웃음도 난다. 실제로 누군가를 씹어죽이거나 똥물에 튀겨죽인다면 무시무시한 일일 텐데도 그 모양새를 상상해 보자니 웃음이 나는 것이다.

 

 

   내가 씹어죽여질 위험에 처하거나 내 가까운 이가 똥물에 튀겨죽었어도, 그때도 웃음이 날까. 죽음이 자신의 일로 닥칠 때 그 죽음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웃을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은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 '죽음이 있으면 내가 없고 내가 있으면 죽음이 없다'고 하였던 에피쿠로스의 말은 굉장히 명쾌하다.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내 죽음의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타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문제는 내가 살아 남았을 때이다. 일찍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죽음을 겪었던 나는 상실의 고통을 잘 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가슴 아니라 일상에 뚫린 구멍을 메우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노심초사한다. 죽음은 결국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내 생애 마지막 날이자 가장 행복한 날에 쓰네. 나는 장과 방광에 병이 생겼는데 정말 고통스럽다네. 세상에 아마 이보다 더 참기 힘든 고통은 없을 것 같네. 하지만 나는 영혼의 만족을 통해 그 모든 고통을 잊고 있다네. 우리가 추론하고 발견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이 내게 영혼의 만족을 가져다주고 있다네

 

                                  - 헤르마크로스에게 보낸 에피쿠로스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90)


 

 

    영어로  Philosophy '철학'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지혜를 사랑하다'라는 뜻에서 기원하였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철학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는 삶도 원하고 의로움도 원한다. 둘 다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할 것이다. 나는 죽음이 싫다. 하지만 내게는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다.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것 중에는 삶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며, 우리가 싫어하는 것 중에는 죽음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이런 마음은 현인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오직 현인만이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 따름이다.(100쪽)" 맹자의 말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철학자의 지혜와 용기를 본다. 사뭇 진지해지는 가운데 책장을 넘기자니 익숙하고 낯선 철학자들의 죽음 행렬이 이어진다. 죽음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들은 결국 죽었다. 철학자라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지혜를 사랑하는 자, 그들이 범인(凡人)과 달랐던 점은 죽음에 직면하는 태도였다. 매독으로 파리에서 죽은 하이네의 마지막 말은 참 재미있다. "하느님은 나를 용서하실 거야. 그게 그분의 전문이거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듯 "이성의 가장 고귀한 기능은 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갈 시간이 됐는지 안 됐는지를 아는 것이다." 아는 것도 없고 그 어떤 확신도 없이, 철학자는 그 길을 걸어간다.  (24 )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의 서평은 어젯밤 쓰여야 했다.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남편과 서로의 죽음관을 이야기했었다. 남편의 이야기도 조금 참고할 요량으로 시작된 대화는 토론으로 이어져 열띤 논쟁과 동의를 주고받으며 길게 늘어졌다. 우리는 신과 우주까지 파고들었다.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새벽을 달리고 있는 시간에 멈춰선 나는 정말 우주를 한 바퀴 돌고 온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신과 우주를 파고들던 우리는 이제 따듯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이런 것이다. 죽음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지만 또한 그것은 저 멀리에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 곁을 떠날 것이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철학자도 그것만은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가 없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각자의 지혜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심오한 분위기와 달리 철학자들의 죽음관과 죽음을 유쾌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나처럼 우주를 한 바퀴 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철학자들의 기이한 죽음에 마음껏 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웃어도 되겠다. 이미 그들은 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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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비오틱 밥상 - 자연을 통째로 먹는
이와사키 유카 지음 / 비타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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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일상은 수많은 습관들로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와 같아서, 사람들은 대개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어느 날 익숙한 어떤 것이 떨어져 나간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습관은 무섭다. 자신에게 이로운 습관이라면 물론 좋다. 그렇지 않은 것들이 문제다. 그중에서도 식습관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우리 몸의 건강과 밀접한 것 중 하나가 식습관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인간은 죽는다. 무엇이든 먹어야 산다. 지구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 중 인간만큼 다양한 음식을 먹는 동물도 없을 것이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먹어야 하는가, 라는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건강하게 살고 싶다면 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제대로 건강을 챙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저마다 이유는 많다. 이유는 많지만, 결론은 먹고 살기 바빠서이다. 참 아이러니한 답이다. 무슨 말인지 다 알 것이다. 알아도, 하루 아침에 모든 습관을 뜯어고칠 수는 없다. 입맛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면 맛도 좋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음식을 찾아봐야겠다.

 

 

   <스타일>이라는 드라마에서 류시원이라는 배우를 통해 '마크로비오틱'이 소개된 모양이다. 나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몰랐다. '마크로비오틱'이란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생소했다. 사실 아직까지도 '마크로비오틱'이라는 말을 발음하면 혀에 경련이 이는 것 같다. 그만큼 낯설다는 말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겠다. macro(큰, 위대한), bio(생명), tic(기술)의 합성어인 마크로비오틱은 일본의 장수건강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뿌리부터 껍질까지 통째로 먹어 식품 고유의 에너지까지를 섭취하자는 것이 마크로비오틱의 취지이다. 이는 음양(陰陽)의 조화를 기초로 한다.

 


  "마크로비오틱에서 추구하는 음양은 바로 모든 사물과 현상이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다.(...)식재료가 가진 에너지나 조리법, 음식과 음식 간의 궁합, 조리 시간 등 음양을 스스로 진단하고 밸런스를 이뤄 조화시킨다.(10쪽)"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남편이었다. 요리는 내가 하기 때문에 남편은 자기가 먹는 음식에 대해 수동적 입장에 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남편의 건강을 떠맡고 있는 것인데, 내가 차린 밥상이 항상 성실하지만은 않아서 부끄럽다.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한정된 식재료로 매일 색다른 음식을 상에 올리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할 줄 아는 요리들도 한정되어 있다. 음식 맛 내는 일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가. 자연조미료로 맛이 안 날 때에는 가끔 인공조미료를 첨가한다. 이런 사정으로 건강 요리책을 찾고 있던 중 이 책을 만났다.

 

 

   지은이 이와사키 유카 씨의 경력이 눈부시다. 일본 국가공인 관리영양사, 미국 쿠시 뭔가 하는 데에서 마크로비오틱 전문교육을 받은 정통파 마크로비오틱 요리 강사.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마크로비오틱을 소개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진으로 본 온화한 인상만큼이나 이 책은 참 친절하다. 마크로비오틱이 생소한 사람들을 위해 마크로비오틱의 원리부터 마크로비오틱 쿠킹 노하우, 마크로비오틱 재료 손질법을 소개하며 시작하고 있다. 사실 어떤 요리나 그 기초는 재료 손질이다. 뿌리와 껍질을 함께 요리하는 마크로비오틱에서 재료 손질은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요리책은 레시피가 요건이다. 초보자도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친절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평소에 즐길 수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 [마크로비오틱 밥상]은 그 모든 것을 충족하고 있다. 생소한 그 이름과는 달리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식재료들이 친숙하다. 레시피 구성은 '주식(밥)', 국, 일품요리(main dish), 반찬, 디저트, 치유식으로 잘 차려져 있다. 부록으로 실린 마크로비오틱 가정식단 원리, 마크로비오틱 4일 가정식단까지 보고 나면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든다. 잘 차려진 밥상을 받은 기분.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몸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반영이 된다고 한다. 몸에 좋다고 하여 국가에서 금한 음식(?)까지 처먹는 사람들이 있다. 참 보기 흉하다. 일그러진 도덕관념과 지나친 탐욕이 건강에 얼마나 이로울지는 의문이다. 우리 주변에 이미 건강에 좋은 식재료가 널려 있다. 그것들로도 충분하다. [마크로비오틱 밥상]은 이 단순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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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붕가붕가레코드 지음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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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유일한 희망은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 동경했던 세계가 아니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하기 싫은 일을 얼마나 의젓하게 잘 참아내는가 하는 것이 어른의 과제 같았다. 재미없고 공허한 일상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루한 사투 끝에 익숙해지고 나니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하기 싫은 일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고 싶은 일이 뭐였는지 잊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고 싶은 일이 없어졌다. 현실이 불만스러울수록 기억의 키가 자라났다. 꿈을 잃어버린 나는 괴팍하고 재미없는 괴물이 되어갔다.







   음악이라면 질색이다. 나를 뒤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하여 음악도 가려 듣는다. 주로 인디음악을 듣는다. 절제된 감성이 좋다. 미친 듯 악을 써대도 절제가 느껴지는 것이 인디음악이었다. 나에게는 그랬다. 그나마 좋아하는 인디음악도 아껴마시는 술 홀짝이듯 들었다. 쓰다 보니 나는 참 재미없는 인간이구나 새삼 실감한다. 각설하고, 올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났을 때 얼핏 본 TV에서 장기하를 알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태지에 비견할 만한 음악가라고 소개했던 것 같다. 흥미가 생겼다. 한창 음악을 듣던 학창시절, 서태지는 나의 우상이었다. ‘싸구려 커피’를 들었다. 가사가 예술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괜찮네.







    괜찮네, 하던 장기하가 여기저기 출현했다. TV는 물론 인터넷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떴다. 크게 떴다. 떴네, 하고 잠깐 잊고 있었다. 복잡한 어른의 삶을 살아내느라 버거웠다. 그러다 또 장기하가 떴다. 내 앞에 떴다.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긴 제목의 책이었다. 붕가붕가에 시선이 걸렸다. 붕가붕가? 그 붕가붕가인가? 에이, 다른 뜻이 있겠지. 설마.








   “붕가붕가는 오나니나 마스터베이션과는 다르다. 보통 자위가 은밀한 곳에서 혼자 있을 때 이뤄지는 것이라면, 붕가붕가는 남들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도 남의 몸 일부분에 기대 이뤄지기 일쑤다. 짝짓기랑 비슷한 이런 부분은 나름 대중 지향을 드러낸다. 한마디로 내 표현 욕구가 우선이지만 들어주는 너도 신경을 쓰겠으며, 그렇게 네가 들어주는 것이 내 욕구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52쪽)


  

   그 붕가붕가가 맞았다. ‘섹스와 자위 사이의’ 그 붕가붕가. 강아지들이 인형이나 사물에 비벼대는 행위를 가리키는 그 붕가붕가. “주류 대중음악과 기존 인디음악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중 지향적인 인디음악’”을 빗대어 지은 이름이란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 어감이 좋아서 붙인 이름에 갖다 붙인 말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는 것은 녹록찮은 일이다. 음악을 생업으로 삼기 쉽지 않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열악한 환경에서 그래도 혼자 힘으로 음악을 사랑하자는 취지로 뭉친 것이 붕가붕가레코드이다. 이들은 대부분 따로 생업을 가지고 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뭉쳤다가 현실의 수많은 제약에 부딪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역시 가장 큰 제약은 먹고 사는 일이다. 딴따라질을 지속하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다. 가난한 붕가붕가레코드의 딴따라질은 가히 눈물겨울 지경이다. 손수 제작했던 소량의 음반이 예상 외로 잘 팔리자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그 많은 음반을 찍어낸 일이라고. 눈물겹다는 것은 그냥 하는 표현이고, 사실 이들의 열정이 나는 부럽다.







   장기하 얘기하다 갑자기 붕가붕가레코드냐고 할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붕가붕가레코드와 장기하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몰랐던 일人. 장기하를 배출한 것이 바로 붕가붕가레코드이다. 이 책에는 붕가붕가레코드의 탄생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조망하고 있다. 딱딱한 책이 아니다. 책 제목처럼 굉장히 솔직하고 재미있다. 붕가붕가레코드와 연계된 사람들과 수많은 에피소드가 에세이 형식으로 담겨 있는 이 책은 독자보다도 이들 붕가붕가레코드 구성원들에게 더 값질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무엇보다 이들 바라는 대로 책이 잘 팔려 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좋겠다. 들을 만한 음악이 더 생길 테니까.








 애초 시작은 재미나게 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 뭐가 재밌는 건가.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그렇다면 거기서 붕가붕가레코드가 해야 할 일은? 이걸로 돈을 벌건 말건,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다 주건 말건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서로 같이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271쪽)


 


    꿈을 포기하고 무거운 현실을 짊어지는 일은 힘이 든다. 무거운 현실 속에서 꿈을 펼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어차피 힘들 바에야 재미있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개기다 보면 빡쎈 취미생활이 먹고 사는 일로 될지 누가 아나. 붕가붕가레코드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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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향연 - 끝나면 수평선을 향해 새로운 비행이 시작될 것이다
한창훈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 낯선 작가의 소설집을 읽었던 적이 있다. 무심코 펼쳤던 그 책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전라도 여수 땅, 거기서도 더 들어간 작은 섬 거문도에서 태어났다는 작가의 입담에서 비릿하고 신선한 생명력이 출렁거리다 못해 거센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갓 잡아올린 싱싱한 물고기의 그것처럼 힘차게 펄떡이는 삶을 움켜쥔 듯하면 놓치고, 또 움켜쥔 듯하면 놓치면서 허기진 독서를 했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한 낯선 이름 석 자. 한 창 훈. 그였다. 지난했던 2009년이 끝나가는 이즈음에 그의 이름 석 자를 다시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가웠다. '한창훈의 향연', 그의 첫 산문집을 들고 마음이 설레었다.

 

 

    나에게 바다는 실제적 장소이기보다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관념이었다. 바다에서 먼 뭍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중학교 소풍 때 처음으로 바다를 본 이후 몇 번인가 심심찮게 바다엘 갔었다. 여기가 거긴가.  그 바다는 그러나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향수를 심어주었던 거기가 아니었다. 갈 때마다 실망스러웠다. 내 마음속 '바다'는 배 타고 고기 잡고 헤엄치는 거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소개한 이들은 한창훈, 그를 가리켜 '바닷사나이'라 했다. 예사로운 그 단어를 두고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바닷사나이란 어떤 사나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단지 남도 사내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일까. 그의 작품에 바다와 바닷사람이 주로 등장하기 때문일까. 공연한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 책을 읽었다. 역시 바다와 바닷사람이 등장했다. 한창훈이 알고 있는 바다와 바닷사람 얘기였다. 그보다 나는 그의 주변인물들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소설가 이문구와 시인 박영근 등 문학을  모르는 이라도 귓결에 그 이름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인물들에 얽힌 일화는 감동적이었다. 닭집에 약속 잡아놓고 횟집엘 갔는데 그만 닭집 주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어서 기가 막혔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시인 박영근이 새벽 세 시에 자꾸 전화를 해대는 부분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굉장히 고독하게 살다 짧은 생을 마친 시인의 이야기인데도 웃음이 터졌다. 할 수만 있다면 책 속으로 들어가 그 전화 내가 받아주고 싶었다. 웃음을 이끌어낸 것은 '공감'이었다. 내가 찾던 '바다'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내가 찾던 '바다'는 바로 인간이 있는 곳. 거기가 뭍이든 물이든 사막이든 상관없다. 삶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 거기 발 담그고 있는 누구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곳. 내 마음에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던 바다는 바로 여기,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었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인간은 저마다 하나의 섬이라고. 그렇기에 더욱 바다여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알았다. 내 마음속 '바다'가 왜 그토록 아련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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