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를 위한 마음산책 - 청소년, 교사, 학부모가 꼭 읽어야 할 10대를 위한 인생 지침 43
이충호 지음 / 하늘아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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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렇게 해라. 너는 틀렸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나는 수시로 생각한다. 교정이 교육의 전부일까. 과연 그럴까. <10대를 위한 마음산책>은 10대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산책> 산책이라면 산림욕의 개운함을 바라도 되지 않을까, 그것을 기대한 것은 아무래도 억측이었던 듯싶다.

  나는 기억한다. 초중등학교 때 월요일마다 있었던 운동장 조회를 기억한다. 더불어 떠오르는 기억도 어쩔 수 없지만 선명하다.

  하나 둘씩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 그리고 끝날 듯하면서 이어지는 훈계. 담임선생은 일렬로 각 학급의 앞머리에 아이들, 학생들을 감시하고 섰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보고 있었을까. 왜 나는 한 번도 교무실에 찾아가 물어보지 못했을까. 간호실에 간 아이들은 언제쯤 정신이 돌아왔고, 그 아이들을 보면서 선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또 단상 위에 올라가 에, 에, 그리고를 연발하면서 쓰러지는 학생들을 분명히 내려다보았을 훈계자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아이들이 자신의 자녀였다면...

 

   <마음산책>에서 안타깝게 나는 그 운동장 조회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마음산책인지 의심스러웠다. 분명 책 내용 하나하나는 굉장히 유익하고 많은 영양분을 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적용하기는 망설여진다. 나는 알맹이보다는 감정에 더 주목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 감정 하나에도 솔직하지 못한 나를 지켜보며 몸달아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산책>은 제 감정을 잘 다스리는 '읽는이'를 요구하고 있고, 행동의 변화를 설파하고 있다.

  강인하지 못한 나의 정신건강을 탓할 밖에 나는 <마음산책>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산책이 아니라 내게는 읽는 동안 참으로 불편했던 시간, 그 시간은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시간이었다는 것이 아쉽다.

  나는 전체를 보지 못했다. 나는 일부분에 끈덕지게 매달렸다.

 

  우리가 에디선의 피땀 어린 집념과 더불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바로 실패를 좌절의 구실이 아닌 성공의 과정으로 보는 특별한 사고 방식이다. (노력/ 33쪽)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책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다만 내게는 읽기에도, 읽고 난 뒤에도 참으로 힘든 책이었던 것만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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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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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는, 다.

  왜냐 묻는다면 활자가 적어 읽을 때 책 읽기에 부담 또한 적을 거니까,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솔직한 대답이다. 내 심정이다. 시집, 시를 읽는 것은 오히려 문장 많은 소설이나 에세이 산문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빨아들인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을 경험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시를 간단히 읽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짧은 행간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했다.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나는 또 다른 문장, 수식어구 하나를 발견했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나는 보는, 그 수식어구는 '나는'이라는 어색한 어구다. 나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사실 문법상으로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래 이 책을, 그것도 시집을 붙잡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내 행동에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을 나는 안다.

 

  책은 민음사에서 나왔다. 인지도가 꽤 있는 출판사, 그러니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시인의 시집일 것이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읽기에 무난하다.

  좋은 시를 마주한다는 느낌이 아니다. 좋은 시를 감별할 재능이 내게 없다. 나는, 나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그저 나를 보았다. 그것이 이 시집을 대수롭게 넘기지 못할 이유이다.  시집과 전연 별개이더라도 나는 '나쁜 소년'이었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발견하는데에 진저리를 쳤다. 경험은 사실이지만, 기억은 왜곡되게 마련이다. 왜 나는 나를 '나쁜'으로 규정해야 했을까. 그리고 왜 나는 전연 나와 상관없는, 그러나 동시대 인물로서 시인 '허연'님을 허옇게 보아야 했을까. 그 끝의, 밑창에는 두려움과 함께 분노가 뒤엉켜 있었다. 부끄럽지는 않다. 덤덤하다. 담담하다.

 





         서시

 

 결국,

 범인(凡人)으로 늙어간다

 다행이다

 

2008년 10월

허연


 

  아, 어쩔까. 범인으로 늙어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분명 '나'만은 제대로 살고 싶었다,는 그 아쉬움의 기억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분명 젊은 날 초상은 패배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인지하는 내 모습이 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현실은 있는 그대로 이다. 과거와 그 속의 무수한 관계와 미해결 문제와 분노는 잠시, 순간일 뿐이다. 감정을 어떻게 견디고 극복하느냐가 지금을 좌우한다. 나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읽는 동안 글쓴이의 의도에 무심했다. 나는 내가 평범한 것에 한숨을 쉰 적 없었던가.

 





사는 일

 

술 취해 집을 뛰처나간 아버지와 

전화통 붙잡고 싸운 날

회사에선 시말서를 쓴다.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그게 사는 거다. 

때맞춰 창밖 남산에 눈이 내리거나 

옛 여인이 오랜만에 예수 믿으라는 전화를 걸어온다면

판단 안 서는 그 상황은 차라리 아름답다.

 

가장 축약된 문장으로 비겁한 시말서를 쓰고

삼거리 부대찌개를 먹고

담배를 반쯤 피우다 말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누워 있는 불상들이 일어나는 것만큼

삶이 호쾌해지는 건 힘든 일이다. 

 

(90쪽)


 

  무엇이 달라질까. 내가 지금 내 위치를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달라진 그 무엇이 나를 얼마나 만족시킬까. 아니 내가 얼마나 만족하고 과거에서 벗어나 훌훌 날아 이상으로 비약할 수 있을까. 무섭다. 나는 지금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과거를 어루만지고 치유를 넘나보다가 습관적인 결론으로 도달하고 있는 과정이다. '사는 일'은 그냥 사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달라질 것을 느끼는 그 감정과 그 감정에 기대어 변화된 행동과 사고가 있을 뿐다. 즉 모든 것이 나로 귀착된다. 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버려서는 안 된다. 내가 버리지 않아도 세상은 언젠가 나를 버릴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이요 숙명이다.

 

   나쁜,의 의미가 옳고 좋고, 내게 이득이 되든 손해가 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읽는 동안의 내가 중요했다. 이제 그 시간은 과거가 되었고 현재를 얽어맬 족쇄가 되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순간, 나는 올무에서 해방되는 그 잠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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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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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똥친 막대기’입니다. 조무래기 사내놈들도 코를 막고 줄걸음을 치는 똥 묻은 막대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똥간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요. 양지 마을 박기도 씨의 논두렁 옆 봇도랑이 ‘나’의 고향입니다. ‘나’의 어미는 20년 동안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백양나무입니다. ‘나’는 2년 전 그 나무의 옹이에서 곁가지로 태어났지요. 든든한 어미나무의 품에서 햇빛과 양분을 받으며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나’의 운명은 박기도 씨의 암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기도 씨와 써레질을 하고 있던 그 암소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기차의 기적 소리가 너무 길게 울렸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운 암소는 기적 소리에 놀라 먼팔뜀을 해대며 논두렁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흥분한 암소의 궁둥이를 매질하기 위해 박기도 씨는 ‘나’를 어미에게서 떼어냈습니다. '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행히 ‘나’는 암소의 궁둥이를 매질하다 부러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해질녘, 박기도 씨의 손에 들려 간 곳은 그의 집이었습니다. ‘나’는 울보 소녀 재희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지요. 재희는 박기도 씨의 어린 딸입니다. 그러나 기대감도 잠시, 사립문 싸리나무들 사이에 꽂힌 ‘나’는 절망하였습니다. 생명이 다한 싸리나무들은 눈앞의 내 운명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손길이 있어 ‘나’를 거기에서 구원해 주리라 믿었지요.



“야, 너는 어디서 굴러온 못난 막대기냐?”

“나요? 나는 저 멀리 들판 한가운데에서 살던 백양나무 가지 새끼입니다. 나를 함부로 막대기라고 깔보지 마세요. 살아날 가망이 있는 막대기이니까요.” (p.56)



구원의 손길은 가혹하였습니다. 성적이 나쁜 재희의 회초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재희의 가녀린 종아리에 멍 자국을 남기면서 ‘나’는 괴로웠습니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때때로 누군가에게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재희의 종아리에 멍 자국을 남긴 벌을 받은 것일까요. 박기도 씨의 손길에 따라 ‘나’는 거름으로 쓰일 똥을 휘저어야 했습니다. ‘똥친 막대기’가 된 것이지요. 똥에 흠씬 젖은 내 몸은 양분을 공급할 구멍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숨이 막혔지요. 이렇게 똥친 막대기로 생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요. 그런데 ‘나’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귀여운 소녀 재희, 내가 아픔을 주었던 그 아이가 ‘나’를 똥간에서 꺼내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재희의 손에 휘둘려 골목에서 놀던 짖궂은 사내 녀석들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재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냄새 나는 똥간에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지요.








‘나’는 재희의 손에 이끌려 어미나무가 보이는 논두렁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미나무는 여전히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지요. 하지만 다시는 어미나무의 품에 안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재희는 ‘나’를 개구리 낚싯대로 이용했습니다. “요놈의 개구리 잡아서 울 엄마 몸보신해 주어야지.” ‘나’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습니다. 이대로 죽기는 싫었습니다. ‘제발 날 좀 살려 줘.’ ‘나’는 재희에게 있는 힘껏 애원했지요. 하지만 재희에게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보았습니다. 열심히 개구리를 잡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한 줄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내 희망의 대답이기라도 한 것일까요. 개구리를 잡던 재희의 손길이 멈추고 ‘나’는 봇도랑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는 이튿날도 그치지 않고 죽죽 내렸습니다. 나는 봇도랑 하류로 떠내려가기 시작했지요. 힘겨운 유랑의 시작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홍수에 떠내려고 있는 검은 돼지 등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니깐 그러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기회를 엿보는 거야. 그래야 이 난리 법석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깐.” 내가 아무리 충고하여도 돼지는 소리를 꾸엑꾸엑 질러가며 바둥거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 앞에 대들보 기둥 하나가 떠내려왔습니다. 돼지는 두 앞발을 대들보 위에 얹었습니다. 간신히 강변으로 올라갔지요. 그런데 ‘나’는......





얼마나 흘러온 것일까요.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있는 곳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 한가운데였습니다. 사나운 물결에 시달렸지만, 덕분에 내 몸에는 충분한 양분이 축적되어 있었지요. 내 몸 한쪽 끝이 간지러웠습니다. ‘나’는 흙 속에 박혀 있었던 것이지요. 비로소 ‘나’는 내가 뿌리내릴 장소를 찾았습니다.




나는 지금 꼿꼿한 자세로 서서 가지 한쪽 끝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한쪽 끝에서는 뿌리를 내리려고 간지럼을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비로소 홍수에 떠내려 오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내 꿈을 접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p.162~163)



‘나’는 ‘똥친 막대기’였습니다. 수많은 우연과 인연을 거쳐 ‘나’는 여기 뿌리내렸습니다. 박기도 씨와 암소, 재희와 돼지, 큰비와 홍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 이렇게 있지 않았겠지요. 그 수많은 손길들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나’는 생에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지요. ‘똥친 막대기’로 인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절망감 앞에서도 ‘나’는 생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생명 가진 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닐까요. 내게 다시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그것은 내가 받아내야 할 몫이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흘러 흘러갑니다. 어디에 도착하든 그곳이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살아내야 할 곳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파란만장한 ‘똥친 막대기’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시는가요. 나는 생명의 귀중함을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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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나의 힘 - 에너지를 업up시키는 분노관리법
아니타 팀페 지음, 문은숙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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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주 내 안의 화(火), 그 불을 다스리지 못해 뜨거운 맛을 본다. 이 불(화,火)길이 거세지면 분노(憤怒)의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화’는 상처나 모욕, 불쾌한 일에 대해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지만, ‘분노’는 ‘화’보다 격한 감정이다. 이때에는 자신의 감정에 불씨가 된 대상을 향해 불을 내뿜는 공격성이 가세한다. ‘화’가 타닥, 하고 불꽃을 튀기다 꺼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분노’는 자신은 물론 ‘화’의 원인이 된 대상,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애먼 대상에까지 그 뜨거운 혀를 날름거린다. 그야말로 인간감정의 대재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불씨에 노출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인간들이 왁다글닥다글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위태롭다.





     가장 최근에도 나는 이 저주스러운 불에 크게 당했다. 나뿐 아니라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까지 그 불길이 미쳤다. 나도, 그도 마음이 까맣게 탔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고 작은 불씨가 어떻게 이토록 무서운 재앙으로 번지게 된 것일까, 어리둥절, 얼얼하였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러다 사람 잡겠다. 나는 내 안의 불씨, 화(火)가 무섭다. 그리고 이 불씨가 다른 대상에게 옮겨져 대재앙의 날을 겪게 될까 두렵다. 이제는 반복하지 말아야지. 나는 다시 한 번『분노는 나의 힘』을 정독하였다. 그리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아, 나는 평화를 원한다. 누구나 평화롭기를 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불(火)씨로부터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 이 책에 그 해답이 있다.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화를 내는 것, 적당하게 화를 내는 것, 적절한 시기에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목적을 위해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_ 아리스토텔레스





     화(火)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화’나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한다. 비난받을까 보아서, 홀로 남겨질 두려움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마음엔 불길이 치솟고 있어도 그 뜨거움을 혼자 감수하고 외면한다. 나는 지금 화가 났어, 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마음 안에 불바다를 키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넘쳐흐르게 되어 있다. 마음 안에 출렁이는 불바다는 거센 물결을 일으키며 바깥으로 밀려나온다. 이렇게 ‘억제된 분노’가 표출되면 수동적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정서적, 육체적 질환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가장 흔한 것으로는 우울증, 니코틴/알코올 중독, 편두통, 위장장애 등 그 피해는 상당하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직시하고 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러면 그 불씨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무엇보다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는 적당한 기회에 적절한 방식으로 불씨를 꺼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을 소개해 보겠다. 이른바 ‘환상여행’이라는 것인데, 어린아이였던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우선 가장 편안한 자리에 앉아 쿠션이나 곰인형 등 애착이 가는 물건을 품에 껴안고 그것이 과거의 ‘나’, 어린아이였던 ‘나’라고 상상하며 대화를 하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 아이의 좌절된 욕구를 채워준다. 이를 테면 껴안아주기, 책 읽어주기, 맛있는 음식 만들어주기 등. 그리고 이렇게 말해준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한테는 네가 있잖아.” 그 다음으로는 현재의 자신과 만난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동반자라는 것과 수많은 욕구들을 스스로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격려하고 믿어준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한테는 내가 있잖아.” 이 방법 외에도 수많은 분노 표출법이 소개되어 있다. 자기에게 적절한 시기와 상황을 알아 활용하면 마음 속 불씨를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안의 화(火), 그 불씨를 잘 다루면 우리는 지금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언제나 작은 불씨가 화근이다. 그 작은 불씨는 나의 일상, 당신의 일상을 위협하고, 국가를 위협하고 나아가 세계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분노를 적절히 다스리는 일은 참 중요하다. 내 안의 화(火), 잘 다스리면 성숙의 기회가 될 수 있지만, 휘둘리면 화(禍)를 면치 못할 것. 분노를 적절히 다룰 줄 아는 것, 그것이 힘이라고 이 책은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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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글쓰기
셰퍼드 코미나스 지음, 임옥희 옮김 / 홍익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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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나는 짤막한 글조차 써내기 힘들다. 생각은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는데, 그 생각을 붙들어 종이 위 - 혹은 모니터의 하얀 공백 -에 옮기는 일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릴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초등학교 육 년 동안 문예반에서 글쓰기를 배웠던 나에게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따분한 일상에서 나를 건져올려 준 고마운 친구였다. 나는 글쓰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때에는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글쓰기를 통해 내면 깊숙이에 있는 나 자신과 가장 정직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일기를 꾸준히, 정성껏 썼다. 그것은 의식적이라기보다 무의식적인 몰입이었다. 안네의 일기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소녀는 일기장에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를 삼아 가장 은밀한 얘기까지 낱낱이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아이 생활에서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직면하고 또한 포용할 수 있었다. 겨울방학 기간에 담임선생님께 받은 엽서에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일기를 가장 솔직하게 쓰고 있는 xx에게".

      단짝 친구와 편지 주고받는 일도 나에게 은밀한 즐거움과 달콤한 위안이 되었다. 아이만의 고초와 피로감에 휩싸인 한밤중, 흐릿한 스탠드 불빛 아래 써내려가던 편지글들은 그것을 쓰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위안과 행복감을 주었던 기억.

 

 

       "일기를 가장 솔직하게 쓰던" 아이는 어디로 갔나. 이제 나는 침묵이 금이라는 듯, 눈 감고, 귀 막고, 입 막고 있다. 나의 표면은 잠잠하나 그 이면 - 내면은 걱정과 격정, 불안과 불만 등이 뒤죽박죽 뒤섞여 바람에 휩쓸려 다니고 있다. 나는 그 폭풍의 심연을 잘 알고 있다. 흔들리고 흔들리다 때로 중심을 잃고 갸우뚱, 위태로운 걸음을 옮겨놓고 있다. 이런 내 앞에 『치유의 글쓰기』가 왔다.

 

 

       『치유의 글쓰기』는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글쓰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치유, 회복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코미나스 박사는 50년 넘게 일기를 써왔다고 한다. 그 일상적이고 정직한 글쓰기는 일상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몸과 마음의 회복을 되찾게 해주었다. 하여 그 '치유의 글쓰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참으로 자상하고 세심한 구성이다. 처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1장 '글쓰기의 시작'에는 글쓰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친절하고도 찬찬한 설명을 해놓고 있다. 글쓰기를 하기 위한 필수품으로는  종이, 펜, 장소, 시간, 글의 분량, 주제, 독자(자기자신), 날짜표시, 마지막으로 긍정을 두고 있다. 나에게 익숙한 종이와 펜, 편안한 장소, 마음을 내쫓기지 않을 만큼의 평온한 시간, 글의 분량과 주제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필수품 '긍정'에서 나는 마음이 멎는다.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오해와 비난, 부정에 상처입은 우리들에게는 '긍정'과 '칭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이해, 자기배려, 자기수용을 할 수 있으려면 긍정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2장 '치유를 향한 글쓰기의 힘'에서는 글쓰기를 통해 영적 평온을 찾고, 정신적, 육체적 회복을 찾는 이야기가 실제 경험자들 실화와 함께 소개되고 있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인생의 마지막에 '나의 이야기를 더 이상 신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렇다. 나를 신에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글쓰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이다. (p.76)

 


       이 장에서 역설하는 것은 내적 자아, 갇혀 있는 '나'와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상황은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괴로움이 따르는 일일 것이다. 상처와 슬픔, 불안, 분노를 꽁꽁 감춰놓은 기억의 창고. 그 문을 열어젖히는 일이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듯 연약하고 무력한 것만은 아니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는 다만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다. 학창시절, 운동화끈 질끈 매고 새하얀 줄이 그어진 출발선 앞에 서는 일은 언제나 두려웠다. 빵! 총소리에 이어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두려움은 사라진다. 무엇이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아직 해보지 않아서, 잘 할 수 있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회피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3장, 4장에는 '치유의 글쓰기 연습 I, II'로 구성되어 있다. 글쓰기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이제는 실제적인 글쓰기를 해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장.

 


     아들아, 살아가면서 네가 이 세상 무엇보다도 명심해주었으면 하는 게 있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누구나 입으로는 시간의 고귀함을 말하지만, 이를 제대로 알고 귀중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시간이란 한 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 시간에 네가 남기는 발자국을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중요한 것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시간은 결코 네 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p.165)

 


      '미리 쓰는 유언 편지'에서 발췌한 누군가의 유언편지 내용이다. 저자는 유언편지를 써야 하는 이유로 자기배려의 하나로서 나 자신의 유산이 곧 '나'라는 진실을 토대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진정한 유산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 치유의 글쓰기를 돕는 '내면의 통찰'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장에는 다양한 글쓰기와 자기표현 방법이 소개되어 있어 실제로 글쓰기를, '삶을 위한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나는 출발선 앞에 서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곧 출발신호가 터질 것이다. 나는 이제 출반선 앞에 서서 지나친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빵!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 그 두려움은 날아가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치유의 글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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