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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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곤로, 곤로는 일본말이다. 화로나 풍로가 옳지만, 그때는 곤로라고 했다. 일본말인지도 모르고 썼다. 곤로에 넣을 석유가 떨어지면 나는 석유 심부름을 했다. 아빠는 석유를 '쇠구지름'이라고 불렀다. 쇠구지름을 사러 풀밭길을 따라 조그만 동네 가게에 갔다. 그 가게는 아주 작았지만 없는 게 없었다. 주조장을 겸한 그 가게는 자잘한 생활필수품과 양냥이(군것질거리)가 가득했다. 내가 쇠구지름, 석유 심부름을 좋아했던 것은 독사탕(돌사탕) 때문이었다. 남은 돈으로 십원 짜리 독사탕, 하얗고 단단한 그 독사탕 몇 알을 얻는 즐거움. 사탕을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도 보고 오물오물 씹어봐도 사탕은 그대로였다. 녹지 않고 깨지지 않는 하얀 독(돌)사탕. 새 사탕을 먹기 위해 입 안에 있던 걸 뱉어내고 먹은 적도 많았다. 석유곤로, 쇠구지름(석유)를 생각하면 다디단 독사탕 맛이 절로 떠오른다. 이제 그 사탕맛은 나의 기억 속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꽁꽁 언 빨래터. 얼음장을 깨뜨리고 빨래를 하던 엄마의 뒷모습도 생각난다. 얼음은 깨져 녹았지만, 찬물에 담궈진 엄마의 손은 빨갛게 얼어 굳어졌다. 엄마는 우리의 내복을 빨았다. 겨울엔 내복을 입었다. 분홍색 줄무늬 내복. 내복을 입으면 다리통이 굵어보인다는 이유로 입기 싫다고, 안 입는다고 떼쓰던 기억이 난다. 고집을 꺾고 내복을 입은 채 학교에 가면 아침 당번들이 석탄을 날라와 난로에 불을 붙였다. 난롯가에 앉아 구멍난 양말 사이로 비집고 나온 발가락을 들이밀던 기억. 참 따듯했다.


     참빗으로 빗어 올려 비녀를 꽂은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 시집올 때 갖고 왔다던 그 은비녀는 여기저기 흠집이 생기고 구부러진 곳도 있었다. 그 못생긴 은비녀를 그러나 할머니는 얼마나 아꼈던가. 좋아했던가. 비녀를 꽂은 할머니를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머리단장을 마치고 참빗으로 우리들 머리를 빗어주던 할머니의 손길. 그 손길 아래 떨어지던 버러지들, 이. 그때엔 이가 많았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해 긁다 보면 손톱 새에 이가 걸려 꿈틀거렸다. 그 이를 잡아 두 손 엄지손가락 사이에 놓고 꾹 눌러 죽이면 톡, 소리를 내며 피를 튀겼다. 통쾌한 순간이었다. 그 많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처럼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한다. 사라지기를 잊혀지기를 바랐던 것도 많은지 모른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것들은 바람처럼, 연기처럼 실려와 우리들 마음을 뒤흔든다. 불편하고, 불량하고, 불결한 것들이라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은 녹지 않고 깨지지 않는 독(돌)사탕과 같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그것'들을 맛볼 수 있다. 마음의 혀로 이리저리 굴리고 오물오물 씹어도 녹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


     이호준 씨의 글과 사진은 우리에게 그 시간, 녹지 않고 깨지지 않은, 않을 시간을 상기시킨다. 아이들의 은밀한 놀이를 제공해 준 원두막이며, 어머니들의 보물단지 장독대,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주기도 했던 물레방앗간, 때맞춰 밥(태엽) 챙겨줘야 돌아가던 괘종시계, - "시계 밥 줘라!"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 참새처럼 노래 부르는 아이들과 풍금 치는 선생님,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었던 서커스단 등 아련한 기억들을 풀어놓고 있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코웃음을 치던 나는 이제야 그 말을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십원짜리 독사탕을 입안에서 오물거리던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본다. 슬며시 웃어주었다. 아이도 싱긋 웃는다. 아이에겐 아직 무거운 쇠구지름(석유)통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간다. 점점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아이는 이제 풀밭길로 들어섰다. 집이 가깝다. 조심해, 뱀이 나올지도 몰라. 아이는 잠시 숨을 돌리고 석유통을 내려놓는다. 무심결인 양 뒤를 돌아본다. 괜찮아요. 한쪽 볼이 똥그란 아이는 또 싱긋 웃는다. 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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