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라. 너는 틀렸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나는 수시로 생각한다. 교정이 교육의 전부일까. 과연 그럴까. <10대를 위한 마음산책>은 10대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산책> 산책이라면 산림욕의 개운함을 바라도 되지 않을까, 그것을 기대한 것은 아무래도 억측이었던 듯싶다.
나는 기억한다. 초중등학교 때 월요일마다 있었던 운동장 조회를 기억한다. 더불어 떠오르는 기억도 어쩔 수 없지만 선명하다.
하나 둘씩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 그리고 끝날 듯하면서 이어지는 훈계. 담임선생은 일렬로 각 학급의 앞머리에 아이들, 학생들을 감시하고 섰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보고 있었을까. 왜 나는 한 번도 교무실에 찾아가 물어보지 못했을까. 간호실에 간 아이들은 언제쯤 정신이 돌아왔고, 그 아이들을 보면서 선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또 단상 위에 올라가 에, 에, 그리고를 연발하면서 쓰러지는 학생들을 분명히 내려다보았을 훈계자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아이들이 자신의 자녀였다면...
<마음산책>에서 안타깝게 나는 그 운동장 조회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마음산책인지 의심스러웠다. 분명 책 내용 하나하나는 굉장히 유익하고 많은 영양분을 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적용하기는 망설여진다. 나는 알맹이보다는 감정에 더 주목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 감정 하나에도 솔직하지 못한 나를 지켜보며 몸달아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산책>은 제 감정을 잘 다스리는 '읽는이'를 요구하고 있고, 행동의 변화를 설파하고 있다.
강인하지 못한 나의 정신건강을 탓할 밖에 나는 <마음산책>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산책이 아니라 내게는 읽는 동안 참으로 불편했던 시간, 그 시간은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시간이었다는 것이 아쉽다.
나는 전체를 보지 못했다. 나는 일부분에 끈덕지게 매달렸다.
우리가 에디선의 피땀 어린 집념과 더불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바로 실패를 좌절의 구실이 아닌 성공의 과정으로 보는 특별한 사고 방식이다. (노력/ 33쪽)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책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다만 내게는 읽기에도, 읽고 난 뒤에도 참으로 힘든 책이었던 것만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