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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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이 책 첫 페이지, 첫 문장이다. 글을 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혹은 글이라는 것을 쓰려고 안간힘을 써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광폭의 공포가 있다면, 단연 그것은 글의 첫 문장이다. 그것은 우연이 흘러나올 수도 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글의 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래의 여자>는 첫 문장으로 이미 손색이 없거나, 혹은 독자의 기대와 어긋나있다.  

행방불명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비밀스럽게 휴가를 떠난 남자는 해안가 사구에 이른다.  
모래땅에 살고 있는 곤충을 채집하기 위한 욕망이 그를 그곳으로 이끈다. 비옥한 땅을 포기하거나 혹은 그곳으로부터 밀려나 모래라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특이한 아웃사이더 곤충을 찾아내는 것이 이번 휴가의 목적이다. 아웃사이더 곤충 중에서도 그가 선택한 곤충은 [좀길앞잡이]이다.  

그러나 그가 만난 좀길앞잡이는 곤충이 아니라, 노인이었다. 노인은 그에게 친절하게도 길을 안내한다. 모래 구멍 속으로. 그리고 거기에는 기이한 여자가 있다. 그럴듯한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모래를 치우는 여자가 거기에 있다.   

모래 구멍 속에서, 좀 더 번듯한 삶의 이유를 찾고 싶었던 그에게 강요된 것은 철저히 무의미한 노동이었다. 이해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방식의 노동은 그에게 탈출할 의지를 북돋지만 탈출은 쉽지않다. 불가능하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곳이 어디이든 망루가 있고, 빅브라더가 존재하는 세상을 탈출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같은 소시민, 아니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래의 유동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정착하는 삶에 의문을 던졌던 그가 유동하는 모래속에 또 다시 정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답답함을 넘어 괴기스럽다. 그러나, 그 괴기스러움이 현실을 지탱하는 힘이다. 다시말해 부조리가 실존이다. 또한, 실존을 벗어나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배트맨이 지켜낼 수 있는 고담시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모래속에 갇힌 그를 구할 수 있는 배트맨,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게 도드라진 조커, [절대악]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가둔 주민들은 그에게 담배도, 물도, 술도, 여자도 내어준다.  그럼에도 모래는, 그리고 그곳의 주민들은 그를 가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당신]들을 향해 끊임없이 발톱을 세우는 고만고만한 조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배트맨과 같은 존재를 기대하고 응원하지만, 우리는 우리 손으로 배트맨을 죽일 것이다. 그것이 실존이고 인간이다.

글의 결말에서 어떤 희망도 읽기 힘들다. 당연한 일이다. 모래의 여자, 모래의 남자는 모두 우리다. 따라서, 문제는 적이 아니라 체제다. 더 나아가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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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래의 여자-책부족 9월 독후감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10-07 16:32 
    책부족의 독후감 동우님: http://blog.daum.net/hun0207/13291048 호호야님 향편님 : http://blog.aladin.co.kr/761379144/4163971 굿바이님 ; http://blog.aladin.co.kr/goodbye/4172306..
  2. 주홍글자-책부족의 9월 독후감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10-10 19:06 
    책 부족의 독후감 동우님 : http://blog.daum.net/hun0207/13291046 호호야님: http://blog.daum.net/touchbytouch/16847419 향편님 : http://blog.aladin.co.kr/761379144/4163974 굿바이..
 
 
차좋아 2010-10-0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스토피아 세계로 보셨군요. 한가한 부락의 체계적 감시 시스템은 공포영화.ㅋ
한 소설이 이렇게 다양하게 읽히는 것도 참 재밌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구에서의 생활은 연상만으로 불쾌하죠. 모래밭을 종일 걷고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올리고 날리는 모래에 입 속이 서걱 거리고...웩

모래의 향편
군대 적. 모래에서 구보를 많이했는데 한 여름 땡볕, 모래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모래는 한 낮의 볕에 달아올라 피부를 익힐 수 있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게다가 바람마저 안부는 날이면.... 그 달아오른 소금공기를 마시며 뛰는 맛이란... 죽을 맛입니다ㅋ

수영장에서는 보통 50분 수영, 10분 뭍에서 휴식 이잖아요. 전투수영은 그 반대로
50분 모래수영, 10분 물 속에서 휴식입니다.
모래로 산을 쌓아서 그 모래 더미에 배를 깔고 허공에서 수영을 해요. 개구리처럼 다리와 팔을 허공에서 젓는 거에요. 등이 두꺼비 등짝처럼 수포가 부풀어오르고 다리나 팔이 당에 닿을라치면 사정 없이 워커 발이 날아들고... 그러다 10분 물속에 들어가면 천국이 따로 없지요 등짝이 소금물에 쓰린건 신경도 안 쓰입니다.
모래는요 그 자체로도 웩 이에요.

굿바이 2010-10-07 09:46   좋아요 0 | URL
군대에서 그런 훈련도 하셨구나.
모래수영이라는 건 상상도 안해봤는데, 짐작만해도 좀 끔직할 것 같아요.
저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또 어느 바닷가에서 자랐으니, 모래의 특성은 좀 알고 있기는 하지만, 제가 몰랐던 부분이 훨씬~ 많았던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으며, 좀 더 어릴적(?)에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하간, 출중한 작가의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2010-10-06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7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라니아 2010-10-0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빅브라더, 망루.
이런 이미지 때문에 영화 이끼에 나오는 마을이 오버랩 되었던 소설입니다
사실 모래 벼랑 안의 집을 잘 그려낼 수 없어서
영화가 된다면 어떻게 이 집을 구상해 낼지 궁금하기도 하였어요.

오늘, 저는 이 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올렸고
그야말로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을요.

주홍글자는 이 여자가 마음에 안 들고 작가의 글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읽힙니다
이 작가가 요즘 나온 신인작가라면
어디가서 지방 신문 문학상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여주인공이 마음에 안 드는 걸 보니
굿바이님의 독서바이러스가 저에게도 전염이 된 듯.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뜻없음. ㅋㅋ

모래의 여자가 말한 모래 때문에 생기는 피부병을 말할 때
나는 그게 그저 작가의 상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한겨레21을 보니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의 아이들이 불결한 환경 때문에
진짜 모래벼룩이라는 곤충에 물려 손가락이 다 썩어 간다고 합니다

황당한 사건 황당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던 모래 마을이라는 것을
그저 소설적 장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실지의 환경으로 생각해 보니 그 이상 끔찍할 수가 없습니다

소설속 상황은 좀 더 나았던 거죠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보다는.

굿바이 2010-10-08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런 몹쓸 병을 옮겼군요^^ 고백하자면, 주홍글자, 고문수준입니다.ㅋㅋ

아프리카 대륙, 서인도제도 그리고 중남미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모래나 흙의 오염과 각종 곤충의 출몰은 특히 가난한 국가의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치명적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실은 재미없지만요, 말라리아, 이, 벼룩, 이런 해충이나 병에 관련한 신약 연구가 1% 이라면, 우울증, 다이어트, 수면장애, 노화방지와 관련한 신약 연구는 99%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병이나 죽음마저도 값이 다른 시절, 참으로 살아내기 어려운 시절입니다.

동우 2010-10-07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금동서를 통하여 시스템속에서만 존재하여야 할 인간, 환경속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조건.
'뫼비우스의 띠'
조세희의 그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의 '정의와 부정의'였겠지만.
모래구덩이 안팎의 뫼비우스의 띠라면 좀 더 근원적일듯. ㅎㅎ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호모 사피에스의 존재의 조건이라는.

사십이 아니된 굿바이님의 독서법으로서 당연 훌륭.
그 옛날 귀 따겁게 울렸던 실존주의의 정체, 그것으로서 읽은 나의 책읽기도 나름 개연성 충분하다는 자족 하나로.. 하하

굿바이 2010-10-08 12:01   좋아요 0 | URL
칭찬받는 일, 너무 드물어, 이리 좋을 수가 있을까요!!!!!

실존을 무시하고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절감하지만, 그 실존이 불편부당하기를 희망하는 저는 참으로 무지한 인간입니다.
조세희작가와의 비교, 쉽게 이해되는 비교인 듯 싶습니다. 역시 동우님의 독서는 따라갈 수 없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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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와장창! 깨진 유리창이 고속카메라를 돌리자 다시 창틀에 끼워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유리 조각들이 창이 있었던 공간으로 빨려가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적잖은 위로를 받곤 했다.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고칠 수 있어_리플레이]같은 버튼이 존재할 것만 같아서였다. 물론, [고칠 수 있어_리플레이] 버튼이 언제 내 앞에 나타날지, 죽은 뒤에도 나타나지 않을지, 모든 것이 그저 나의 환각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데 레온 가족 -오스카, 롤라, 벨리시아, 아벨라르, 재클린, 아스트리드, 라 잉카-의 삶, 옴짝달싹하면 끝장나고, 옴짝달싹안해도 끝장나는 삶을 넘겨다 보며, 나는 계속해서 [고칠 수 있어_리플레이] 버튼을 찾고 있었다. 그들의 어느 시절, 그날의 어느 현장에 짜잔~하고 나타나서, 그들의 황당한 얼굴에 웃음으로 답하며 리플레이 버튼을 눌러 주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롤라가 말했다. 우리 모두가 천만 명의 트루히요야." 

롤라가 말했다. 우리 모두가 천만 명의 트루히요,라고. 그렇다면 천만 명의 트루히요(이 인간은 어떤 역사학자나 저술가도 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정도로 궁극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우리의 사우론이자 아론, 다크사이드였고, 과거에도 앞으로도 영원할 독재자였으며, 너무나 기이하고, 너무나 변태인 데다 너무나 무시무시해 SF소설 작가가 지어내려도 지어내기 힘든 인물)가 뭔가 어긋나고 불리해지는 대목마다 리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세상은 과연 아름다울까. 알 수 없다. 아니, 어떻게든 기가막힌 세상일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니, 어쩌면 완벽한 지.옥!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리.플.레.이! 그것이 어쩌면 데 레온 가족을, 데 레온 가족을 있게 한 또 다른 가족들을, 그 가족들을 있게 한 또 다른 가족의 선조와 선조들의 잠자리들을 염병할 저주, [푸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고칠 수 있어_리플레이] 따위를 꿈꾸는 나는 틀렸고 빌어먹었다. 나 역시 트루히요니까. 이웃을 밀고하고, 비밀경찰이 되어 철봉을 휘두르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나 역시 트루히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저주라고 말하겠지. 난 삶이라고 말하겠다. 삶이라고." 

롤라가 말했다. 어떤 이들이 저주라 말하는 것을 삶이라고. 그래, 그건 삶인지도 모른다. 리플레이!라고 외칠 수 있지만 리플레이 할 수 없는 것, 자신의 선택이건 주어진 것이건 꼼짝없이 살아내야 하는 것, 살아낼 사람은 꼭 살아내야 하고, 또 다음을 살아낼 사람도 살아내야 하는 것, 그것을 저주가 아니라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옳다. 벨리시아가 사탕수수밭에서 죽도록 구타당했지만 죽지않고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것은 롤라와 오스카가 태어나기 위해서라는 것, 그렇게 태어난 롤라와 오스카는 죽도록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또 그렇게 꼼짝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오스카의 짧고 놀라운 삶이 또 그렇게 사탕수수밭에서 끝장났지만 그 꼴을 다 보고도 남은 사람들은 살아내야 한다는 것, 어떤 이들은 그것을 저주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삶이었다. 피가 흐르고 갈비뼈가 부러져도 살아내야 하는 것, 리플레이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그런 것 따위를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것은 삶이었다. 따라서,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천재적인 작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다, 오히려 동감할 지도 모르겠다, 그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다. 인쇄된 활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뜨겁고, 가공된 이야기라 하기에는 인정하기 싫지만 너무 흔하다. 저주는 도처에 널려있고, 그것이 삶이라면, 널려있는 저주 만큼의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는 그저 소설일 수 없다. 찌질하거나, 분노하거나, 아름답거나, 뚱보이거나 한 누군가의 삶이다. 그렇지만, 또 한 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한 권의 놀라운 소설이다. 나는 그것을 책의 마지막에서 엿본다. 그것은,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군! 젠장!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걸! 이 아름다움을!" 

오스카가 말했다. 이토록 아름답다고. 삶이 젠장! 이토록 아름답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의 찌질이 오스카는 삶을 놓았다. 사탕수수밭에서. 카리브해 열대에 위치한 달콤한 사탕수수밭에서. 삶으로부터 파이어!

이쯤되면 이것은 그저 소설이 아닌 소설이다. 꾀지지한 수도꼭지에서 철철 나오는 물처럼 놀랍고 능청맞은 소설이다.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소설이다. 오스카이도 한, 롤라이기도 한, 벨리시아이기도 한, 아벨라르이기도 한 독자들을 뜨끔거리게 하고, 웃게 하고, 결국 울리는. 그러니,  

나는 이렇게 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군! 젠장!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얄미운 소설을! 이 얄미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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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2010-09-30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에 나온 트루이효가 도미니카의 유명한 독재자가 맞나요? 그렇다면 얼핏 정치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네용. 궁금하네요.

굿바이 2010-09-30 22:49   좋아요 0 | URL
네, 이분이 그놈(^^)이 맞습니다. 트루히요와 관련된 책도 꽤 많이 나와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번역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정치적이라면 정치적인 소설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그런 색을 띄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블리 2010-10-0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니 서재에서 내가 읽은 책 얘기가 나오니 좀 놀라워서 글 남겨요.
전 너무 모르는 세계인 도미니카 얘기라, 그 역사도 잘 몰라 방황하며 읽었는데 언닌 멋지게 정리했네요. 아무튼 이 책의 백미가 마지막 오스카의 깨달음 부분인건 확실한 듯. '화이어' 그 끝까지, 끝 이후의 글까지 찌질하지만 멋진 놈이었음. 짧고 놀라운 삶 맞음, 정말!

굿바이 2010-10-04 09:52   좋아요 0 | URL
그래? 블리가 읽은 책을 내가 안읽은거겠지, 암만!

찌질하지만 멋진 놈이었어. 어쩌면 찌질하지않은 그냥 멋진 놈일 수도 있고.
철들자 뭐한다고, 가끔 그런 깨달음이 내게도 올까 싶고, 그런 깨달음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겠구나 싶고, 그래도 이왕이면 뭔가 아하~ 하는 탄성과 함께 이 세상 뜨면 좋겠다 싶어.

허리는 좀 어때? 날이 추워져서 걱정이다.

동우 2010-10-05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방금 트루히요를 검색해 보았더니, 굉장한 괴물이었군요.
"우리 모두가 천만명의 트루히요야."
이것도 굉장한 세리프입니다만, 굿바이님.
"젠장!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걸! 이 아름다움을!"이 몇 소절의 세리프는 굉장한 감동입니다.

"고칠 수 있어" 리플레이같은 버튼이 존재할 것만 같은 누군가의 굉장한 생각, 이 소설 되우 재미있는 소설일거라는 확신.
그보다

굿바이 2010-10-06 09:26   좋아요 0 | URL
트루히요를 검색해 보셨어요?
역사를 탈탈 털어서 나쁜놈 줄세우면 랭킹 5위 안에는 들어갈 것 같습니다.
아주 막강한 분이죠.

[고칠 수 있어_리플레이]버튼이 존재한다면 정말 제 인생에 두 장면 정도는 고치고 싶습니다. 물론 어림없는 일이고, 무지한 발상이지만 말입니다.
여하간 이 소재로 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멜라니아 2010-10-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blog.daum.net/namu-dal/15961784

여기 보세요
굿바이님, 긴급명령 떨어졌습니다
작전 수행 후 결과 보고 요망

굿바이 2010-10-06 09:26   좋아요 0 | URL
네, 확인했습니다.
 

방정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침에 만난 바람에는 매미의 울음이 없었다. 

매미의 울음을 거둔 하늘 아래 어린 잠자리 파르르 떨며 날으는데

그 작은 떨림이 이렇게 결고운 바람을 몰고 오나 싶다.

햇살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아침나절부터 목이 마른다.

이런 갈증에는 말이지...... 

칼끝이 닿자마자 '쩍' 하고 갈라져, 속절없이 붉은 속살을 내보이지만  

'나를 베어 물면 당신도 붉은 울음을 울 것이라'며 버티던 그 달고 서늘한 무등산 수박이,  

아! 무등산 푸랭이 수박이 간절하다. 

그 때,

언니도 시집가지 않았고 엄마는 건강했고

운 좋게 살아남은 모기 한 마리도 대책없이 씩씩하게 피를 달라던

9월의 그 밤

술기운이 아니면, 이 놈의 수박 들지도 못하시겠다며 굵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시던 아버지의 

힘줄 돋은 팔뚝을 넘겨다 보며 나는 너를 받아 안았고 

너를 받쳐든 나는 온 몸에 쥐가 내렸지만 그렇게라도 너를 버텨내던 내가 있던  

9월의 그 밤 

너의 붉은 속살과 내 혀가 맺은 쾌락은 이렇게 난삽하였던가  

그 해 가을을 가슴에 담은 죄로 여직 붉은 울음을 멈출 수 없는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어, 그리 저린 팔을 기억하면서도 너를 안고 너를 핥고 너를 삼키고 싶은지라 

또, 어김없이, 붉은 가을이 그리고 붉은 네가 달려들고 있어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무등산 수박이 충장로 거리에 나오면 광주의 가을은 시작된다. 그 거대한 수박은 여름 과일들이 모두 물러가는 9월 초부터 거리에 나온다. 여름의 가장 잔혹한 폭양 아래서만 영그는 그 수박은 무등산 산록 중에서도 폭양이 직각으로 내리 꽂히는 원효계곡 등의 산비탈에서만 자라난다. 무등산 수박의 단맛은 보통 수박의 설탕 같은 감미로움이 아니라 베이는 듯이 날카로운 서늘함의 단맛이다. 광주 사람들은, 폭양을 빨아들여 서늘함을 빚어내는 이 신비한 수박을 '푸랭이 수박'이라고 부른다.   - 김훈,「내가 읽은 책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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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0-09-1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아, 먹고프네요 정말

굿바이 2010-09-14 00:44   좋아요 0 | URL
이쁜 그대에게 무등산 수박 한 통을 사주려고 했건만, 한 통에 15만원이라네...무능한 누나를 용서하시게나 엉엉

2010-09-13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4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1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월해.. !! " ..

저 메인사진의 귀마개처럼 따뜻하지만 그 무등산 수박처럼 쩍쩍.. 벌어지는 삶의 속 살 같은 글이네요.. ~~

굿바이 2010-09-14 00:47   좋아요 0 | URL
서툴고 거친 속내를 따뜻하게 읽어주시는 s님이 우월한거예요^^

Alicia 2010-09-1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의 이 글을 읽다가 문득, 무등산자락을 끼고 굽이굽이 도는 충효동의 어느 길이 떠올랐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갔었나봐요. 뉘엿뉘엿 지는 해와 무등산을 뒤로 두고 하염없이 걸었는데 어릴 때 느낌으로도 그 모습은 퍽 운치가 있었습니다.
푸랭이수박을 떠올리다 생각은 어느새 토끼등까지 내달렸어요. 땀을 잔뜩 흘리고 올라선 뒤에만 맛볼 수 있었던 그 물 한바가지, 오늘따라 고향생각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굿바이 2010-09-14 00:50   좋아요 0 | URL
어쩌면 Alicia님이 있었던 곳에 저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물 한바가지 저도 참 고프네요. 그렇게 내달리고 숨이 턱에 차면 언제나 있을 것 같은 그 물. Alicia님 덕분에 기억속에 무등산이, 오늘 와락 안깁니다.

웽스북스 2010-09-1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니까 그 충장로 무등산 청년은 꽤 비싼 프로포즈를 했던 거군요.
수박을 좋아하지 않는 저도, 당장 빨간 수박 한입 베어물고 싶게 만드는 글.

굿바이 2010-09-15 09:38   좋아요 0 | URL
그라제~ 비싸고 아주 창피한 프로포즈였지. 백만년에한번나올까말까아이부끄러워, 프로포즈^^

토깽이민정 2010-09-1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에는 군침이 가득 고이는데
마음에는 어쩐지 모를 아련함이 밀려오는 이 요상스러운 기분이란.
언니의 글 아니고는 참, 느끼기 힘든 희한한 감정~

굿바이 2010-09-16 18:05   좋아요 0 | URL
이 마음을 알아주는 토끼가, 참 희한한 사람이지~^^

동우 2010-09-1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등산 푸랭이 수박.
9월의 수박이라니.

붉은 가을과 붉은 수박의 속살.
붉은 울음이란 또 무엇..

굿바이님의 어떤 이미저리만 가득 끼쳐옵니다.

굿바이 2010-09-20 11:13   좋아요 0 | URL
언제 부산에 가면, 붉은 초고추장과 회를 두고, 붉은 울음에 대해 동우님께 고백의 시간이라도 가져야겠습니다.

2010-10-0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등산 수박은 못 먹어도 좋으니
무등산이라는 데도 가 봤으면
지리산에도 한 번 가 봤으면

비행기가 광주에도 가는데 광주행 비행기는 타게 되지 않는 섬사람이 하소연

굿바이 2010-10-06 09:28   좋아요 0 | URL
아~ 못가보셨군요.

비교가 될 지 모르겠지만, 북미의 어떤 단풍보다 이 가을 광주의 산들이 더 고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미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다들 다르지만, 제 경우는 그런 것 같습니다.

산의 매력을 아직 잘 모르지만, 남도의 산들은 제게 아주 특별합니다.
 
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적 생존을 위한 관계 맺기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복식부기해 보면 손실이 더 크다.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생산적인 관계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어리석음이 고질병인, 더 나아가 그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아둔함마저 겸비한 나는 여전히 "세속의 어둠을 배경으로 외로이 빛나다가 때로는 다른 별들과 합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진중권) 가 되는 그런 관계를 꿈꾼다.

물론, 2008년 '별자리 연대'를 꿈꾸며 시작한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열정을 이해관계적으로 분배하고 조율하라'(A. 허쉬만)는 빌어먹을 조언을 무시한 결과였고, '호의와 호감'이 '신뢰'를 호출할 것이라고 혼자 그냥 그렇게 믿었던 탓이다. 결국 모두 내 탓인 셈이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여전히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기에, 결국 명민함이라 착각한 평범한 자기방어와 냉소만 키워왔다. 그런 내 미련함에 찬물을 끼얹어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한 이가 있으니 바로 김영민이다. 그러니 그의 글은 두고두고 쓰고 두고두니 달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김영민의 <동무론>은 정신적으로 여전히 유아인 그래서 늘 관계 맺기에서 칭얼거리는 이들에게 벼락과도 같은 책이다. 친구, 연인이라는 이름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사적 호의]와 [사회적 신뢰]를 혼동하는 [세속]의 한 특징을 일갈하는 그는, 호의와 신뢰를 준별하는 태도를 기르라고 조언한다.  

"대부분의 호의가 어떤 식이든 넓은 의미의 이기심과 연루해 있다는 사실은 거의 분명하고 또 피할 수도 없어 보인다." (p.30), "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惡) 때문이 아니다....슬픔은 적들의 횡포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친구들의 선의와 그 무모함이, 연인들의 호의와 그 어리석음에, 가족들의 애착과 그 타성에 얹혀 생긴다." (p.265) 라는 그의 말은 그늘 한 점 없는 광장으로 우리를 끌고 나온다. 공사가 사통하고, 모든 관계의 그믈망이 어느 20대 청년들의 88만원짜리 일자리마저 싸그리 포획하는 시절을 우리는 견디고 있다. 분노와 열패감이 태풍처럼 무자비하게 우리들을 강타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의 소소한(?) 연정은 포기할 수 없는 이 일상은 또 얼마나 슬픈 지옥인지.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연대란, 좋은 [동무]란 무엇인가?  "좋은 '동무'란,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를 불러세우는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속에서 (부사적으로) 자생"(p.211) 하는 것이며,   

"그것은 같은 관습에 몸을 의탁하는 짓으로써 상식과 도덕의 알리바이를 내세우지 않는 관계, 이념과 진보를 빌미로 같은 언어와 사정(私情) 아래 집결하지 않는 관계"(p.217) 라고 그는 동무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한 치도 틀린 것이 없는 그의 지론은 기어이 멀다. 그것은 기어이 닿을 수 없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며 강기슭에 주저 앉은(?) 김훈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나 역시 기어이 닿을 수 없는 관계를 동무,라고 부른다며 세속의 오늘을 붙들고 주저 앉고 싶은 심정이기에 말이다.

<동무론>은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으로서의 동무,를 군더더기 없이, 그러나 온몸으로 압통을 느끼게 사방에서 조여온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한 마디 거들자면, 그가 말하는 동무나 연대는 그저 약소자끼리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약소자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연대하려는 것은 유력자의 사회구성체 형식과 그 메커니즘을 답습하려는 권력의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p.373)고 지적하고 있다. 

비트게인슈타인의 말처럼, 앎이 아니라 의심이 사유인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좋은 관계라 믿었던 모든 관계들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로부터 이 슬픈 세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것은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락하는 그 속절없는 무능 속에" 포획당하지 않고 사회적 신뢰를 다시 취할 수 있는 기회이자 시작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첫 장부터 나를 붙들어 세웠던 그의 글로 이 책에 보내는 감사를 마무리한다.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처는 예감되지만, 그 상처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깨달은 것을 밝은 길 위에서 놓치듯, 말이다. 구조와 패턴의 인과성은 환하게 보이더라도, 개인의 이치를 설명하는 인과율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 개인은 영원히 어리석다. 실은, 너를 만나는 일이 재난인 줄 알고 만난다. 그리고 그 재난이 어떤 종류의 반복인 사실도 환하게 안다. 정작 내가 모르는 것은, 그 재난을 회피할 정도로 내가 내게 행복을 허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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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 2010-09-0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보니, 굉장한 책인것 같네요~ 그런데, 저 그림은 누구 작품인가요? 쫌 궁금해서리^^

굿바이 2010-09-09 22:20   좋아요 0 | URL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물론 어떤 책을 좋아하시는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습니다.
그림은 무명 작가(물론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의 작품입니다. 누군가의 그림을 흉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저는 좋아서 잠시 올려놓았습니다.

2010-09-09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9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0-09-09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하기 무척 힘든 책이었습니다, 제게는. 강의까지 들었는데두요!
굿바이님 리뷰를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는 거 같아요. :)

굿바이 2010-09-09 22:25   좋아요 0 | URL
강의도 들으셨어요? 우와~ 부럽습니다. 짝짝짝!

김영민의 책을 찬찬히 다 읽어볼까 합니다. 뭐랄까, 진짜 어른을 만난 느낌이랄까요^^

멜라니아 2010-09-10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굿바이님에게 호의와 호감을 갖고 있고
한 번 만난 후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친구라고 철석같이
친구표를 딱 붙여 두었는데

의심해야겠다! ㅋㅋ

굿바이 2010-09-11 01:05   좋아요 0 | URL
이를 어쩐답니까요!!!ㅋㅋㅋㅋ

뭐든 잘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뢰에 답하겠습니다. 기회를...기회를...한 번 더 주십시오!!!!! 헤헤

pjy 2010-09-1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페이페에서 본 '지인'이 생각났습니다~ ㅋㅋㅋ http://blog.aladin.co.kr/704638105/4095450

지인 知人 acquaintance 명
돈을 빌릴 정도의 안면은 있어도 이쪽에서 꿔줄 정도는 아닌 사람. 상대방이 가난하고 하찮을 때는 고작 얼굴이나 아는 정도라고 말하고, 돈푼이나 있고 유명할 때는 절친하다고 말하게 되는 우정의 정도.

굿바이 2010-09-12 23: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누군가 저를 말할 때, 얼굴이나 아는 정도라고 하겠군요. T.T

동우 2010-09-12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섭렵하시는 모든 책을 향하여 덤벼 들수는 없지만 이 책은 확 덤벼들고 싶습니다.

굿바이 2010-09-12 23:42   좋아요 0 | URL
읽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보내드릴께요.
 

습관이된 카페인은 당신과 나를 닮아 각성도 흥분도 흐릿하기만 하다. 피곤에 붙들린 몸은 아무리 많은 커피를 부어도 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몸은 긴장하지 않지만, 마음은 긴장하지 않는 몸뚱아리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삼일동안 새벽밥을 했다. 다른 이들은 아침밥이라고 하겠지만, 05시 30분에 짓는 밥을 나는 새벽밥이라 우기고 싶었다. 힘겨웠다는 이야기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몇 가지 밑반찬을 식탁에 올려놓는 일이 번거로웠다. 맛없는 밥상을 받아야 했던 엄마는 또 얼마나 곤란하셨을지. 내게 번거로운 일, 그럼으로 엄마에게도 고단했을 일, 더 나아가 밥이라는 고단함을 과장된 제스추어로 깨닫는 나는 여전히 어른-아이다.  

엄마에게 내려진 진단은 노화다. 나는 노화가 병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엄마는 차라리 병이면 좋겠다고 하신다. 그 마음을 알겠으나, 내 마음이 그 마음일 수는 없다. 간격을 메우지 못하고, 간격을 확인하는 일에 멈춰버린 딸은 다급해진다. 시건방지고 설익은 성찰이 쏟아진다. 가소롭고 버르장머리 없으며, 한없이 이기적인 딸년이다.   

엄마가 책장을 본다. 무슨 책이 제일 재미있냐고 묻는다. 난감하다. 땀이 난다. 책등을 훑어본다. 엄마에게 재미있을 책이 무엇일까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모르겠거나 없다. 그렇지만 실망하는 타인의 얼굴을 보는 일에 나는 익숙하지 않다. 무엇이라도 골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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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엄마의 일상으로,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더 많은 시간을 더 은밀한 마음을 나누지 못한 안쓰러움도 덤으로 따라왔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자식들을 뒤짊어지고도 거침없었는데, 엄마를 채 업지도 않은 딸은 벌써 비틀거린다. 그래서일까. 보잘 것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부모 역시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닐진데,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은 헛헛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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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9-12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딸네집 오는 엄마라는 이름.
내 집 오는 엄마 맞는 딸이라는 이름.
딸년집 다녀가는 에미라는 이름.
헛헛한 뒷모습 배웅하는 딸년이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들은.....흐음.

굿바이 2010-09-12 23:43   좋아요 0 | URL
제 마음을 짐작해주시는 것 같아, 염치없는 위로를 얻습니다.

hohoya 2010-09-19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정어머니도 병원에서 한 달을 계셨는데
무심한 이 딸은 앉아서 블로그 댓글 달 시간은 있어도
딸이 보고싶은 엄마에게 얼굴 보여드릴 시간은 없었네요.

친정엄마의 그 어깨가 지금의 내 어깨일 수는 없는데
우리 달 하나는 또 제 어깨가 그리 믿음직스럽다니.......
그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인가 봅니다.

저,날마다 새벽밥하고 있시유.
5시30분에 일어나 밥차려주고 있시유.
하나는 따끈한 밥을 먹어야 하루를 시작하는 힘이 난대유.
괜히 아침밥 먹는 습관을 들여줬어,괜히 그랬어.ㅇㅇㅇㅇ

굿바이님, 복많이 받으락....
아니다,설날이 아니지.
아니야,추석에도 복많이 받으면 좋겠지 않아요?
어차피 설날엔 여럿이 나누느라 경쟁률이 높을테니까
굿바이님은 추석에 미리 남들의 100배는 받아버려요. 해피 추석!!

굿바이 2010-09-20 11:17   좋아요 0 | URL
아! 날마다 새벽밥하세요?
우와....존경스럽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도 알겠죠? 본인이 참 행복한 딸이라는 사실을요. 알겁니다.

호호야님 덕분에 올 해 하반기는 잘 굴러갈 것 같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찌 다 갚을지 모르겠어요. 호호야님도 뭐든 잘 드시고, 마음까지 둥둥 떠오르는 추석 보내세요.
무조건 기쁘고 또 기쁜 연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