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침에 만난 바람에는 매미의 울음이 없었다.
매미의 울음을 거둔 하늘 아래 어린 잠자리 파르르 떨며 날으는데
그 작은 떨림이 이렇게 결고운 바람을 몰고 오나 싶다.
햇살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아침나절부터 목이 마른다.
이런 갈증에는 말이지......
칼끝이 닿자마자 '쩍' 하고 갈라져, 속절없이 붉은 속살을 내보이지만
'나를 베어 물면 당신도 붉은 울음을 울 것이라'며 버티던 그 달고 서늘한 무등산 수박이,
아! 무등산 푸랭이 수박이 간절하다.
그 때,
언니도 시집가지 않았고 엄마는 건강했고
운 좋게 살아남은 모기 한 마리도 대책없이 씩씩하게 피를 달라던
9월의 그 밤
술기운이 아니면, 이 놈의 수박 들지도 못하시겠다며 굵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시던 아버지의
힘줄 돋은 팔뚝을 넘겨다 보며 나는 너를 받아 안았고
너를 받쳐든 나는 온 몸에 쥐가 내렸지만 그렇게라도 너를 버텨내던 내가 있던
9월의 그 밤
너의 붉은 속살과 내 혀가 맺은 쾌락은 이렇게 난삽하였던가
그 해 가을을 가슴에 담은 죄로 여직 붉은 울음을 멈출 수 없는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어, 그리 저린 팔을 기억하면서도 너를 안고 너를 핥고 너를 삼키고 싶은지라
또, 어김없이, 붉은 가을이 그리고 붉은 네가 달려들고 있어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무등산 수박이 충장로 거리에 나오면 광주의 가을은 시작된다. 그 거대한 수박은 여름 과일들이 모두 물러가는 9월 초부터 거리에 나온다. 여름의 가장 잔혹한 폭양 아래서만 영그는 그 수박은 무등산 산록 중에서도 폭양이 직각으로 내리 꽂히는 원효계곡 등의 산비탈에서만 자라난다. 무등산 수박의 단맛은 보통 수박의 설탕 같은 감미로움이 아니라 베이는 듯이 날카로운 서늘함의 단맛이다. 광주 사람들은, 폭양을 빨아들여 서늘함을 빚어내는 이 신비한 수박을 '푸랭이 수박'이라고 부른다. - 김훈,「내가 읽은 책과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