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침에 만난 바람에는 매미의 울음이 없었다. 

매미의 울음을 거둔 하늘 아래 어린 잠자리 파르르 떨며 날으는데

그 작은 떨림이 이렇게 결고운 바람을 몰고 오나 싶다.

햇살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아침나절부터 목이 마른다.

이런 갈증에는 말이지...... 

칼끝이 닿자마자 '쩍' 하고 갈라져, 속절없이 붉은 속살을 내보이지만  

'나를 베어 물면 당신도 붉은 울음을 울 것이라'며 버티던 그 달고 서늘한 무등산 수박이,  

아! 무등산 푸랭이 수박이 간절하다. 

그 때,

언니도 시집가지 않았고 엄마는 건강했고

운 좋게 살아남은 모기 한 마리도 대책없이 씩씩하게 피를 달라던

9월의 그 밤

술기운이 아니면, 이 놈의 수박 들지도 못하시겠다며 굵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시던 아버지의 

힘줄 돋은 팔뚝을 넘겨다 보며 나는 너를 받아 안았고 

너를 받쳐든 나는 온 몸에 쥐가 내렸지만 그렇게라도 너를 버텨내던 내가 있던  

9월의 그 밤 

너의 붉은 속살과 내 혀가 맺은 쾌락은 이렇게 난삽하였던가  

그 해 가을을 가슴에 담은 죄로 여직 붉은 울음을 멈출 수 없는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어, 그리 저린 팔을 기억하면서도 너를 안고 너를 핥고 너를 삼키고 싶은지라 

또, 어김없이, 붉은 가을이 그리고 붉은 네가 달려들고 있어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무등산 수박이 충장로 거리에 나오면 광주의 가을은 시작된다. 그 거대한 수박은 여름 과일들이 모두 물러가는 9월 초부터 거리에 나온다. 여름의 가장 잔혹한 폭양 아래서만 영그는 그 수박은 무등산 산록 중에서도 폭양이 직각으로 내리 꽂히는 원효계곡 등의 산비탈에서만 자라난다. 무등산 수박의 단맛은 보통 수박의 설탕 같은 감미로움이 아니라 베이는 듯이 날카로운 서늘함의 단맛이다. 광주 사람들은, 폭양을 빨아들여 서늘함을 빚어내는 이 신비한 수박을 '푸랭이 수박'이라고 부른다.   - 김훈,「내가 읽은 책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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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0-09-1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아, 먹고프네요 정말

굿바이 2010-09-14 00:44   좋아요 0 | URL
이쁜 그대에게 무등산 수박 한 통을 사주려고 했건만, 한 통에 15만원이라네...무능한 누나를 용서하시게나 엉엉

2010-09-13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4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1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월해.. !! " ..

저 메인사진의 귀마개처럼 따뜻하지만 그 무등산 수박처럼 쩍쩍.. 벌어지는 삶의 속 살 같은 글이네요.. ~~

굿바이 2010-09-14 00:47   좋아요 0 | URL
서툴고 거친 속내를 따뜻하게 읽어주시는 s님이 우월한거예요^^

Alicia 2010-09-1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의 이 글을 읽다가 문득, 무등산자락을 끼고 굽이굽이 도는 충효동의 어느 길이 떠올랐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갔었나봐요. 뉘엿뉘엿 지는 해와 무등산을 뒤로 두고 하염없이 걸었는데 어릴 때 느낌으로도 그 모습은 퍽 운치가 있었습니다.
푸랭이수박을 떠올리다 생각은 어느새 토끼등까지 내달렸어요. 땀을 잔뜩 흘리고 올라선 뒤에만 맛볼 수 있었던 그 물 한바가지, 오늘따라 고향생각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굿바이 2010-09-14 00:50   좋아요 0 | URL
어쩌면 Alicia님이 있었던 곳에 저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물 한바가지 저도 참 고프네요. 그렇게 내달리고 숨이 턱에 차면 언제나 있을 것 같은 그 물. Alicia님 덕분에 기억속에 무등산이, 오늘 와락 안깁니다.

웽스북스 2010-09-1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니까 그 충장로 무등산 청년은 꽤 비싼 프로포즈를 했던 거군요.
수박을 좋아하지 않는 저도, 당장 빨간 수박 한입 베어물고 싶게 만드는 글.

굿바이 2010-09-15 09:38   좋아요 0 | URL
그라제~ 비싸고 아주 창피한 프로포즈였지. 백만년에한번나올까말까아이부끄러워, 프로포즈^^

토깽이민정 2010-09-1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에는 군침이 가득 고이는데
마음에는 어쩐지 모를 아련함이 밀려오는 이 요상스러운 기분이란.
언니의 글 아니고는 참, 느끼기 힘든 희한한 감정~

굿바이 2010-09-16 18:05   좋아요 0 | URL
이 마음을 알아주는 토끼가, 참 희한한 사람이지~^^

동우 2010-09-1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등산 푸랭이 수박.
9월의 수박이라니.

붉은 가을과 붉은 수박의 속살.
붉은 울음이란 또 무엇..

굿바이님의 어떤 이미저리만 가득 끼쳐옵니다.

굿바이 2010-09-20 11:13   좋아요 0 | URL
언제 부산에 가면, 붉은 초고추장과 회를 두고, 붉은 울음에 대해 동우님께 고백의 시간이라도 가져야겠습니다.

2010-10-0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등산 수박은 못 먹어도 좋으니
무등산이라는 데도 가 봤으면
지리산에도 한 번 가 봤으면

비행기가 광주에도 가는데 광주행 비행기는 타게 되지 않는 섬사람이 하소연

굿바이 2010-10-06 09:28   좋아요 0 | URL
아~ 못가보셨군요.

비교가 될 지 모르겠지만, 북미의 어떤 단풍보다 이 가을 광주의 산들이 더 고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미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다들 다르지만, 제 경우는 그런 것 같습니다.

산의 매력을 아직 잘 모르지만, 남도의 산들은 제게 아주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