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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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이 책 첫 페이지, 첫 문장이다. 글을 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혹은 글이라는 것을 쓰려고 안간힘을 써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광폭의 공포가 있다면, 단연 그것은 글의 첫 문장이다. 그것은 우연이 흘러나올 수도 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글의 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래의 여자>는 첫 문장으로 이미 손색이 없거나, 혹은 독자의 기대와 어긋나있다.  

행방불명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비밀스럽게 휴가를 떠난 남자는 해안가 사구에 이른다.  
모래땅에 살고 있는 곤충을 채집하기 위한 욕망이 그를 그곳으로 이끈다. 비옥한 땅을 포기하거나 혹은 그곳으로부터 밀려나 모래라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특이한 아웃사이더 곤충을 찾아내는 것이 이번 휴가의 목적이다. 아웃사이더 곤충 중에서도 그가 선택한 곤충은 [좀길앞잡이]이다.  

그러나 그가 만난 좀길앞잡이는 곤충이 아니라, 노인이었다. 노인은 그에게 친절하게도 길을 안내한다. 모래 구멍 속으로. 그리고 거기에는 기이한 여자가 있다. 그럴듯한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모래를 치우는 여자가 거기에 있다.   

모래 구멍 속에서, 좀 더 번듯한 삶의 이유를 찾고 싶었던 그에게 강요된 것은 철저히 무의미한 노동이었다. 이해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방식의 노동은 그에게 탈출할 의지를 북돋지만 탈출은 쉽지않다. 불가능하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곳이 어디이든 망루가 있고, 빅브라더가 존재하는 세상을 탈출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같은 소시민, 아니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래의 유동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정착하는 삶에 의문을 던졌던 그가 유동하는 모래속에 또 다시 정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답답함을 넘어 괴기스럽다. 그러나, 그 괴기스러움이 현실을 지탱하는 힘이다. 다시말해 부조리가 실존이다. 또한, 실존을 벗어나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배트맨이 지켜낼 수 있는 고담시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모래속에 갇힌 그를 구할 수 있는 배트맨,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게 도드라진 조커, [절대악]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가둔 주민들은 그에게 담배도, 물도, 술도, 여자도 내어준다.  그럼에도 모래는, 그리고 그곳의 주민들은 그를 가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당신]들을 향해 끊임없이 발톱을 세우는 고만고만한 조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배트맨과 같은 존재를 기대하고 응원하지만, 우리는 우리 손으로 배트맨을 죽일 것이다. 그것이 실존이고 인간이다.

글의 결말에서 어떤 희망도 읽기 힘들다. 당연한 일이다. 모래의 여자, 모래의 남자는 모두 우리다. 따라서, 문제는 적이 아니라 체제다. 더 나아가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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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래의 여자-책부족 9월 독후감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10-07 16:32 
    책부족의 독후감 동우님: http://blog.daum.net/hun0207/13291048 호호야님 향편님 : http://blog.aladin.co.kr/761379144/4163971 굿바이님 ; http://blog.aladin.co.kr/goodbye/4172306..
  2. 주홍글자-책부족의 9월 독후감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10-10 19:06 
    책 부족의 독후감 동우님 : http://blog.daum.net/hun0207/13291046 호호야님: http://blog.daum.net/touchbytouch/16847419 향편님 : http://blog.aladin.co.kr/761379144/4163974 굿바이..
 
 
차좋아 2010-10-0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스토피아 세계로 보셨군요. 한가한 부락의 체계적 감시 시스템은 공포영화.ㅋ
한 소설이 이렇게 다양하게 읽히는 것도 참 재밌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구에서의 생활은 연상만으로 불쾌하죠. 모래밭을 종일 걷고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올리고 날리는 모래에 입 속이 서걱 거리고...웩

모래의 향편
군대 적. 모래에서 구보를 많이했는데 한 여름 땡볕, 모래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모래는 한 낮의 볕에 달아올라 피부를 익힐 수 있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게다가 바람마저 안부는 날이면.... 그 달아오른 소금공기를 마시며 뛰는 맛이란... 죽을 맛입니다ㅋ

수영장에서는 보통 50분 수영, 10분 뭍에서 휴식 이잖아요. 전투수영은 그 반대로
50분 모래수영, 10분 물 속에서 휴식입니다.
모래로 산을 쌓아서 그 모래 더미에 배를 깔고 허공에서 수영을 해요. 개구리처럼 다리와 팔을 허공에서 젓는 거에요. 등이 두꺼비 등짝처럼 수포가 부풀어오르고 다리나 팔이 당에 닿을라치면 사정 없이 워커 발이 날아들고... 그러다 10분 물속에 들어가면 천국이 따로 없지요 등짝이 소금물에 쓰린건 신경도 안 쓰입니다.
모래는요 그 자체로도 웩 이에요.

굿바이 2010-10-07 09:46   좋아요 0 | URL
군대에서 그런 훈련도 하셨구나.
모래수영이라는 건 상상도 안해봤는데, 짐작만해도 좀 끔직할 것 같아요.
저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또 어느 바닷가에서 자랐으니, 모래의 특성은 좀 알고 있기는 하지만, 제가 몰랐던 부분이 훨씬~ 많았던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으며, 좀 더 어릴적(?)에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하간, 출중한 작가의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2010-10-06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7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라니아 2010-10-0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빅브라더, 망루.
이런 이미지 때문에 영화 이끼에 나오는 마을이 오버랩 되었던 소설입니다
사실 모래 벼랑 안의 집을 잘 그려낼 수 없어서
영화가 된다면 어떻게 이 집을 구상해 낼지 궁금하기도 하였어요.

오늘, 저는 이 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올렸고
그야말로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을요.

주홍글자는 이 여자가 마음에 안 들고 작가의 글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읽힙니다
이 작가가 요즘 나온 신인작가라면
어디가서 지방 신문 문학상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여주인공이 마음에 안 드는 걸 보니
굿바이님의 독서바이러스가 저에게도 전염이 된 듯.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뜻없음. ㅋㅋ

모래의 여자가 말한 모래 때문에 생기는 피부병을 말할 때
나는 그게 그저 작가의 상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한겨레21을 보니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의 아이들이 불결한 환경 때문에
진짜 모래벼룩이라는 곤충에 물려 손가락이 다 썩어 간다고 합니다

황당한 사건 황당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던 모래 마을이라는 것을
그저 소설적 장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실지의 환경으로 생각해 보니 그 이상 끔찍할 수가 없습니다

소설속 상황은 좀 더 나았던 거죠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보다는.

굿바이 2010-10-08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런 몹쓸 병을 옮겼군요^^ 고백하자면, 주홍글자, 고문수준입니다.ㅋㅋ

아프리카 대륙, 서인도제도 그리고 중남미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모래나 흙의 오염과 각종 곤충의 출몰은 특히 가난한 국가의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치명적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실은 재미없지만요, 말라리아, 이, 벼룩, 이런 해충이나 병에 관련한 신약 연구가 1% 이라면, 우울증, 다이어트, 수면장애, 노화방지와 관련한 신약 연구는 99%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병이나 죽음마저도 값이 다른 시절, 참으로 살아내기 어려운 시절입니다.

동우 2010-10-07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금동서를 통하여 시스템속에서만 존재하여야 할 인간, 환경속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조건.
'뫼비우스의 띠'
조세희의 그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의 '정의와 부정의'였겠지만.
모래구덩이 안팎의 뫼비우스의 띠라면 좀 더 근원적일듯. ㅎㅎ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호모 사피에스의 존재의 조건이라는.

사십이 아니된 굿바이님의 독서법으로서 당연 훌륭.
그 옛날 귀 따겁게 울렸던 실존주의의 정체, 그것으로서 읽은 나의 책읽기도 나름 개연성 충분하다는 자족 하나로.. 하하

굿바이 2010-10-08 12:01   좋아요 0 | URL
칭찬받는 일, 너무 드물어, 이리 좋을 수가 있을까요!!!!!

실존을 무시하고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절감하지만, 그 실존이 불편부당하기를 희망하는 저는 참으로 무지한 인간입니다.
조세희작가와의 비교, 쉽게 이해되는 비교인 듯 싶습니다. 역시 동우님의 독서는 따라갈 수 없이 아득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