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천장호에서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날아오른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일곱 때의 독서
                                                    
나희덕

 
빛남의 무게만으로
 
하늘의 구멍을 막고 있던 별들, 그날밤
 
하늘의 누수는 시작되었다 하늘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이었던가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은 울컥울컥 쏟아져서
 
우리의 잠자리를 적시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깊은 우물 속에서 전갈의 붉은 심장이
 
깜박깜박 울던 초여름밤 우리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바닷가 어느 집터에서, 지붕도 바닥도 없이
 
블록 장이 바람을 막아주던 차가운 모래
 
위에서 킬킬거리며, 담요를 밀고 당기며 잠이 들었다

 모래와 하늘, 그토록 확실한 바닥과 천장이
 우리의 잠을 에워싸다니, 나는 하늘이 달아날까봐
 몇 번이나 선잠이 깨어 그 거대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날밤 파도와 함께 밤하늘을
 다 읽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그 한 페이지를 어느 책갈피에 끼워넣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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