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 - 이중섭의 삶과 예술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예술기행
허나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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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

 

 

 

이렇게 해가 쨍하고 매미가 더위를 반기며 찌르르 울어대는데...

어이 없이 눈물이 흐르다니...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을 한 것도 아니면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범일동에 있다는 이중섭 전망대 한 번 오르지 않았고

광복동 거리를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면서도 "밀다원 다방" 시절의 이중섭을 스쳐지나가듯이라도

떠올려보지 않았던 내가,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중복 염천의 한낮에

방 안에서 세상 편한 자세로 앉아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써내려간 책을 읽고는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술 더 더 끅끅거리기도 더해준다.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봤으면 아주 친한 사람이 갑자기 죽기라도 했냐고, 물어볼 양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는데.

오디오에선 참 그 마음을 지지한다는 뜻인지

영화 아이앰샘의 OST중 하나인 'across the universe'가 흘러나온다. 아이,참. 슬프고 슬프고 더 슬퍼지다, 마침내 미어진다.

 

 

흰 소 한 마리의 압도적인 힘을 느끼며 어떻게 해서 그 강인한 그림이 그려졌느냐를 궁금해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이 쓸쓸함과 허무함을 쏟아내면 어쩌자는 말이냐.

이건 다, 이중섭의 발자취를 한 걸음씩 좇을 수밖에 없도록 유인한 작가의 탓이다.

 

제주도 여행을 가서도 그 많은 이들이 찾는다는 이중섭 미술관 한 번 찾지 않은 것은 무슨 경우였느냐고,

이제 와서 나 자신을 힐문해본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중섭이 태어난 원산은 분단의 아픔 덕에 이제는 찾을 길 없게 되어버린 탓을 하더라도...

화가의 삶을 좇아 무작정 떠나기에는 그래도 좀 무리인 듯 싶은 일본에서의 자취도 무시하더라도.

월남하여 처음 발 디딘 곳 부산, 남덕의 이름을 좇아 좀 더 내려간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 홀로 돌아와 작품 활동에 매진한 통영, 진주 등에 한 번씩 들를 때마다

이. 중. 섭.

이 세 글자는 기억했으면 좀 좋았겠냐고. 뒤늦은 후회를 해 본다.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은 대체로 이중섭의 전기처럼 일대기를 그리고 있지만 증거 자료나 그림의 비평보다는 인간 이중섭에 초점을 맞춘 듯한 책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나이 차 많이 나는 형을 둔 이중섭은 형의 남다른 사업 수완 덕에 유복한 청년 시절을 보냈다. 평안도 정주에서 하숙을 하며 오산학교에 들어간 그는 유학파인 임용련, 백남순 부부와 만나 전위적인 서양 미술을 배우고 흡수한다. 민족 정신을 펼쳐야 한다는 선생의 뜻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영향이었을까, 당시 이중섭이 한글 자모를 활용한 구성작업을 하기도 하였고, 훗날 일본에서 활동할 때조차도 한글 자모로 된 서명을 했다.-44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중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면서 평생의 사랑이자 뮤즈인 아내를 만난다.

해방이 이루어질 즈음의 뒤숭숭한 정세 덕에 한국으로 돌아온 중섭을 뒤쫓아온 마사코. 중섭은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며 잠시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한국전쟁 발발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 부산에서 제주도 서귀포로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지내기 시작한다. 통영, 진해, 마산 등지를 다니며 그림 활동을 쉼없이 한 것은 언젠가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행복한 꿈 때문이었는데...

개인전을 열었으나 흥행하지 못하자 점점 희망을 잃고 마침내는 정신을 놓아버린 중섭.

그의 곁에서 지켜봐주던 친구들이 있어 쓸쓸하진 않았겠지만 죽은 뒤 1년 후에야 가족의 품에 안긴 중섭의 생은 너무나 짧았다.

 

언제나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며 은지화에도 벽에도, 편지에도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뿍 담았던 중섭은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과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긴다.

 

 

평소에는 친구들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그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편지에서는 이렇듯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내곤 했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그려 온 소는 한국의 민족성을 나타내기 위한 소재였던 것일까?

아니면 불알을 강조한 수소를 주로 그린 것에서 화가 자신의 은유적 표현인 걸까?

 

각기 다른 붓터치와 표현법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우리 민족이든, 화가 자신이든 시대의 불운에 맞서는 "소"의 이미지가

이중섭의 인생과 너무나 닮았다.

 

-133

 

아마도 울먹울먹하는 마음이 저 빝바닥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이 부분을 읽을 때가 아니었나, 싶은데...

 

책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이 지점부터 이중섭의 밝은 에너지가 가족과의 이별로 인해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

자신을 위해 한국-일본간 책 무역을 시작한 아내 마사코가 두 번째 시도에서 부도를 맞고 빚을 지면서 이들의 생활고는 점점 심해지기만 하는데...

화가로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가족을 위해 그림을 팔아야 한다는 생각과 다른 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아 오면서 헤픈 씀씀이를 보였고 작품을 팔아 돈이 생기면 친구들을 위해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를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만나고 싶어했던 마음만은 진짜였다.

이중섭을 비운의 천재라느니, 해괴한 미치광이라느니 등등, 다양한 면으로 재쟁산해낸 면이 있어

그의 진면목을 올곧게 바라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 책에서는 신화 속에서만 존재했던 이중섭을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서 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목차를 보면 이중섭의 처지가 '소'에 빗대어져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쟁에 휘말린 소, 행복의 도원을 향하는 소달구지, 가족을 향한 황소의 울음,

은지에 담은 소의 꿈,

꿈에서 깨어나 몸부림치는 떠돌이 소...

 

그 중에서도 나는 "행복의 도원을 향하는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소와 함께 중섭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싶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그는 복숭아 피는 도원에서 행복한 웃음을 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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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수리공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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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죽이기] 작가의 충격적인 데뷔작~[장난감 수리공]

 

아니야, 안돼~~

 

이런 전개를 기대하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살육적인 본능을 힐긋 바라보며 부추기긴 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40페이지 남짓의 짧은 글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이야기.

숨고르기를 할 여유도 없이 몰아치는 잔혹동화는 너무도 태연한 나레이션 앞에 더욱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그 말인즉슨"

나는 입안이 바짝 마르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미치오를 산 채로 해부했다는 거야?"-38

 

낮에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그녀로부터 기괴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무엇이든 고치는 장난감 수리공. 동네 아이들은 고장난 장난감이나 게임기는 무엇이든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그는 수리할 것이 어느 정도 모여야 수리를 한다. 어린 동생을 업고 집으로 돌아가다 계단에서 굴렀다는 그녀는 동생 미치오가 움직이지 않자, 어린 마음에 동생을 "수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침 망가진 장난감을 맡기러 가던 친구를 만나 장난감 수리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그를 찾아간 그녀는 미치오를 맡긴다. <요그소토호스후!>라는 기괴한 주문과 함께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걸 고쳐 줘! 원래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먹고, 마시고, 땀을 흘리고, 울고, 오줌 싸고, 똥 싸고,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29 

 

동생을 장난감 인형인 것처럼 "이것"이라고 말하며 '장난감 수리공'에게 맡겼다는, 해괴한 설정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데, 그 이야기에 맞장구쳐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이 공포감을 조성한다.

죽어버린 미치오를 마치 장난감처럼 던져두었다가 마침내는 다른 장난감들과 같이 하나하나 모두 해체하는 장난감 수리공.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버린 인간처럼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기이한 주술을 읊조리는 공포스러운 장난감 수리공은 마침내 미치오를 제대로 수리해 낼까?

하나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미치오를 해체해 나가는 과정을 눈으로 좇고 있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으아아~ 내 눈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읽어나가고 있을 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이야기가 미칠 듯이 궁금해서, 너무나도 차분하게 이어져나가는 이야기의 전개에 나만 펄쩍 뛰고 흥분하는 것이 못내 열없어져서

아니, 아니, 아니다. 무엇보다 미치오가 되살아났는지가 궁금해져서 두눈 부릅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후. 이것이 [앨리스 죽이기] 작가의 데뷔작이라니.

이 이야기는 나만의 19금이라 단정짓고 앞으로는 개방된 거실 서재에 나타나지 않도록 꽁꽁 숨겨둘 작정이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혹시나 "장난감"이라는 단어에 혹해서 꺼내 읽고

심장 정지되지 않도록.

이로써 내 비밀 책장에 놓일 책은 단 두 권.

첫 번째는 [살육에 이르는 병], 두 번째는 [장난감 수리공]이다.

 

짤막한 단편 <장난감 수리공> 외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하나가 더 실려 있다.

길이는 <장난감 수리공> 보다 훨씬 길다.

이 이야기 또한 기괴하게 비틀린 인간의 기억, 혹은 정상적이지 않은 시간의 흐름을 소재로 하고 있어

소재의 독특함에 있어서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대학원 시절, '데고나'라는 여성을 동시에 사랑하게 된 두 남자.

한 남자와 사귄 뒤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그녀에게 두 남자가 누구를 진짜 사랑하는지 답을 달라고 하자,

여자는 역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긴다.

헐레벌떡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한 두 남자 앞에서 그녀는 기차에 치어 갈가리 찢긴 살덩어리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 때부터 두 남자는 '데고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허황된 망상을 꿈꾸기 시작하는데...

의학과 공학 쪽으로 진로를 정한 그들의 공동 목표는 '데고나'를 되살려내거나 그들이 직접 '데고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시간의 기이한 흐름을 물리학적으로 재해석한 데다 의학적 기계의 힘을 빌어 뇌 속 장치 하나를 건드렸을 뿐인데...그들의 인생은 악몽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데고나'를 좇기로 결정한 것이 과연 그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시간의 띠에 갇혀버린 두 남자의 가혹한 인생이 지켜보는 이의 공포를 자극한다.

 

원초적인 공포보다는 한 번의 생각을 거쳐 정제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장난감 수리공]!

차분하고 논리정연하게 따져드는 그 어조에 기 눌리지 말고 끝까지 따라 읽어 보라.

짜릿한 공포가 곧이어 온몸에 전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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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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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되감아 본다. 제대로 몰랐던 그 사람을...[리버스]

 

 

 

깊고 진한 갈색의, 광택 나는 표면을 들여다보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때에 따라 진하게도, 옅게도 맡을 수 있는 향은 신기하게도 의도치 않은  사색을 부르지요. 

커피는 맛이 아니라 향이라는 말, 이제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고도 신중하게 원두를 내려 정신이 번쩍 드는 맛의 진한 커피 한 잔을 곁들여가며[리버스]를  읽으려고 했지만 어쩌나...

커피잔이 뒤집어져 있는 표지의 주술에 걸리고 만 탓인지 잔을 바로 놓고 커피를 따른 뒤 홀짝일 기분이 들지 않네요.

뒤집기, 되짚어보기...

한 생명이 지나 온 궤적을 커피잔 뒤집듯 쉽게 바로놓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경건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둡고 묵직한 공기가 내리누르는 가운데 새하얀 커피잔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네요.

 

미나토 가나에의 [리버스]는 작가 특유의 '고백체'가 특히 빛을 발하는 소설입니다.

아 참,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나레이션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작품과 달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요?

자기주장 뚜렷하지 않고 어디에나 묻혀 가기를 좋아하는 남자 후카세가 전체 내용을 이끌어가는 나레이터입니다.

 

 

화려함과 수수함 둘로 나눈다면 망설임 없이 수수함 쪽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후카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니시다 사무기 주식회사'에 취직해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사무기를 다루는 덕분에 교사가 된 동창 아사미와 자주 만나게 되죠. 다들 취직활동을 할 때부터 교사가 될 거라고 확실히 말했던 아사미를 만날 때마다 자꾸 작아지는 후카세입니다, 별로 내세울 것 없다는 생각에 누구를 만나도 열등감을 내비치는 소심한 그이지만, 커피에 있어서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맛있는 원두를 내려 커피를 주위 사람들에게 대접할 때만큼은 '중심'에 있다, 라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 미호코도 단골인 '클로버 커피'가 인연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미호코가 내민 한 장의 종이로 그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종이를 받아든 순간 후카세의 뇌리를 스치는 단어들, 친구, 동창회, 팝송, 비, 커피, 벌꿀...

미호코와의 행복을 깰 수 없다는 생각에, 후카세는 자신의 과거를 사실대로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커피를 내린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후회라는 어둠 속에 스며드는 단 한 줄기의 빛.-59

 

모두 다섯 명이 떠난 여행에서 히로사와가 자동차와 함께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죽은 사고가 일어났던  

삼 년 전 여름.

중간에 참가한 무라이를 데리러 가야하는데 운전면허가 없는 후카세는 제외, 나머지 셋은 술을 약간씩 마셔 서로 미루던 차에  히로사와가 자진해서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일을 떠올립니다.

친구가 술을 마셨다는 것도, 운전이 서툰 것도, 날씨가 나쁜 것도, 길이 험한 것도 다 알면서 그냥 보낸 나머지 친구들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후카세의 고백을 들은 미호코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후카세를 겨냥했던 종이는 나머지 세 친구에게도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다니하라는 선로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후카세는 메시지를 남긴 범인이 누군지를 찾아야겠다며 히로사와의 고향집을 찾은 김에, 히로사와의 인생을 거슬러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차근차근 거스르는 길에 맞닥뜨린 히로사와의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뜻밖의 얼굴들.

 

한 사람의 친구를 속속들이 알아챈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소심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침잠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는 데 소홀하기 쉽습니다.

저 역시 이 이야기에서 후카세의 경우에 깊이 공감하고 몰입하게 되었는데요.

오렌지색이나 파,노랑, 보라 등 사람마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히로사와의 동창은 특히 왕따 당하는 친구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움을 주던 히로사와를 '투명한 색'의 사람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도 색깔로 인물들을 설정했던 것이 떠오르네요.

'히로사와는 벌꿀을 좋아했다.

히로사와는 메밀을 싫어했고 알레르기가 있었다.

히로사와는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했다.

히로사와는 초등학교 시절 야구부 활동을 했다................'

후카세가 히로사와의 삶을 거스르며 알아낸 것을 하나씩 기록한 커피색 노트에는 저런 문장들이 하나둘식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겠지요.

언제가 되어야 히로사와라는,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그 청년의 인생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까요.

자신의 일밖에 신경쓰지 못하고 스스로를 너무 측은하게 여긴 나머지 가장 친했던 친구를 쉽게 놓아버린 후카세는, 노트를 쓰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겠지요.

'히로사와를 죽인 건...나였나.'-299

그 물음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게 되겠지요.

 

 

 

 

[리버스]에서 후카세가 히로사와의 삶을 되짚어 건너는 과정은 저 뒤집어진 잔을 바로 놓고 한 방울, 두 방울 똑, 또옥똑 떨어지는 커피를 채우는 기다림과 비슷할까요.

마지막 커피 한 방울이 똑 떨어져 찰랑이는 표면이 차분해질 즈음에는...

히로사와의 그 마음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잔인한 반전이나 숨이 콱 막히는 억울한 사건은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토 가나에의 [리버스]를 [고백] 다음 가는 이야기로 꼽고 싶습니다.

음...[꽃사슬]은 좀 결이 다른 이야기니까 세 번째로 올려둘까요?^^

엄청난 이야기의 쓰나미를 몰고온 작품 [고백]이 미나토 가나에의 대표작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저는 [리버스] 같은 커피향 가득한 이야기도 참 마음에 드네요.

이번에는 후카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입장이라 커피 한 잔 놓고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사실은 작가가 그려놓은 길을 따라 잰걸음으로 걸어가야해서 곁길이 눈에 보이지 않았음~)

다음에 읽을 때는 따뜻하게 갓 내린 커피 한 잔 곁에 두고 그 향을 음미하면서 읽어야겠어요.

 

커피 한 모금에 명자, 커피 한 모금에 은실이, 또 커피 한 모금에 선희, 미선이...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내 친구들과 나와의 소중한 인연이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할 수 있겠네요.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 건 아니었나, 싶은 찰나에 [리버스]를 만나

애틋한 그들과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포는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 미리 하시라고...

마지막에 울컥 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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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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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아질 수 있을까?[중국식 룰렛]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아니, 없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한 가닥, 혹은 두 가닥씩 흰머리가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나 자신이 늙었다며 의기소침해지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슬프게도 늙어가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까지 철 모르는 아가씨가 자리하고 있다. 아니, 공상을 꿈꾸는 빨간머리 앤이 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이들을 향해 제법 어른인 것처럼 이거해라, 저거해라 라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아이들 없는 사이에는 내가 그 잔소리 들을 만한 행동을 여전히 하고 있다.

세상은 예전보다 작아져 보이지만 그 속을 누비고 다닌 시간보다 집 안에서 나만의 '왕국'을 다스리는 시간이 더 오래여서 바깥세상은 더 크게 느껴진다.

어항 속 물고기가 바야흐로 비닐에 포장되어 팔려나갈 데는 여러 군데지만 특히 내가 팔려간 곳은 작고 고요한 일반인의 세계다.

일반인의 세계에 갇힌 채 그나마 더 넓은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다, 좋은 소설을 읽는 것.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누가 봐도 지어낸 이야기라면 읽는 순간만 혹해서 읽고 곧 잊어버린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여실히 펼쳐지면서, 나라면...이라는 상상을 하게 하는 소설이라면, 두고두고 손 닿는 곳에 두고 자꾸 꺼내보게 된다.

 

은희경 소설집 [중국식 룰렛]은 표제작을 포함, 모두 6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잔잔한 고요 속에 몸담고 있던 작은 물고기에게 세상의 기운이 느껴지는 파동을 조금씩 조금씩 전해준다.

아마 이 작은 물고기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떨림을 느끼고 아마 한 번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더 먼 곳을 비교해 볼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차분히 들여다볼 것이며 아마 경중을 가려보기도 할 것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불운과 행운, 세상의 거짓과 나의 거짓, 우연과 암시, 운명과 비극, 불연속선이 지닌 불안함 같은 단어와의 교차점을 찾아보게도 될 것이다.

 

표제작 <중국식 룰렛>은 밤의 술집에 모인 네 명의 남자들이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진다.

술집 주인 K는 손님에게 세 개의 잔을 내놓고 하나를 고르게 한다. 각기 다른 라벨을 가진 술 중 하나를 고름으로써 손님들은 각자의 운을 시험한다. 술의 라벨에 따라 가격은 천차 만별이지만 같은 값을 지불해야 한다.

 

격이 다른 수많은 술을 똑같은 값에 내놓고 직접 골라 마시게 하는 K의 게임. 거기에서 K가 손님들에게 기대하는 점도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아드레날린을 제공하는 데에 재미보다는 악의가 한 수 위일 테니까. -11

 

시한부 선고를 받은 K가 한자리에 모은 이들은 운 좋게도 고가의 위스키를 골라낸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행운과 불운이 섞여 있는 진실 게임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답의 정직성엔 하나같이 '5'라고 말하는 그들. 위스키에 '천사의 몫'이 있듯이 그 자리에 함께 한 그들에게도 각자의 '천사의 몫'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행운으로, 혹은 불행으로 몰아가는 것은 각자의 선택.

'악의'를 손바닥에 올려 놓고 굴리는 주인장 K의 남은 생에도 천사의 몫이 함께 하길...바라며 짓궂은 웃음 날려본다.

 

열 세 살 때 일어났던 버스 사고를 기점으로 '천재 소년'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평범한 삶을 택한 남자의 이야기 <대용품>은 서정주의 시, <신발>과 맞닿아 있다.

 

그래, 내가 스스로 신발을 사 신게 된 뒤에도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대용품으로 신발을 사 신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있습니다.-서정주,<신발>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깊이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감당하기 어려웠던 거짓의 세계와 그 정도 거짓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어른의 세계 "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마음 속으로 용서를 구한다.

 

<별의 동굴> 속 비정규직 대학원생 이야기는 스스로 만든 동굴 속에 칩거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가 만든 동굴은 내가 좋아하는 책의 동굴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책을 한 순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값싼 무언가로 변질시킨다.

"허세에 찬 그 인생을 얼마나 위태로운 마음으로 지키려 애써왔는지 고스란히 보여주었다."라며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 준 책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린다. 아니, 자신의 입지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까.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삶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내 삶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거실 책장을 바라보며 또, 한동안 말없이 실의에 차 있게 된다.

이대로 주인공의 삶에 동화되어 나 자신을 '애도'하고 말 것인가, 다른 희망을 찾아나설 것인가.

여기서 또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은희경은 사부작사부작 이야기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더니 어느 순간 세차게 뒷머리를 후려친다.

그렇게 안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지나간 것들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문이 열릴 수도 있다고.

싱글몰트 위스키 향을 입은 '천사의 몫'이 주어져 있으니 이걸 어떻게 사용할 거냐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엄격한 눈초리로 묻는다.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도착점.

"더 좋아진다는 뜻이겠지?"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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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온 아이
에오윈 아이비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동화와 현실의 완벽한 결합[눈에서 온 아이]

 

나에게도 누군가가 수집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러시아어 동화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으로 가죽 장정이고, 정교한 눈송이무늬가 표지에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책등에 눈송이 무늬가 은박으로 찍혀 있는 책.

희귀본이라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도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고, 아버지가 직접 그림을 보며읽어준 기억이 있는 책이라면  좋겠다.

'눈 소녀'가 주인공이지만 안타깝게도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 <빨간 모자> 이야기와도 다르고 <눈의 여왕>과도 다른 신기한 눈 소녀 이야기는 여러 종류로 전해져 오지만...겨울만 되면 찾아오지만 결국 녹아버리고 만다고 한다.

 

이국의 언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해석할 순 없지만 총천연색 삽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는 책.

첫 장을 넘긴 다음 다음 책장을 넘길 때쯤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차가 식어 있을 정도로 삽화 하나를 오래 오래 음미할 수밖에 없는 책.

러시아 옻칠화처럼 화려한 색깔에 친근하고 세밀한 그림을 보노라면 어느새 아버지의 굵은 음성이 겹쳐져 떠오르는 추억 속의 책.

 

스네구로치카, 1857(눈 소녀)

 

아름답지만 척박한 알래스카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그곳의 아름다움을 글로 쓰고 있는 저자는 '눈 소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동화와 현실이 완벽하게 결합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환상적인 묘사가  눈 속에 몸을 파묻고 있는 때만큼이나 시리지만 포근하게 내 온 몸과 마음을 끌어당긴다.

 

1920년 알래스카의 울버린 강.

문학 교수의 딸로 도시에서 자란 메이블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사산으로 잃고 오직 고요 속에 들어서기 위해 알래스카 황야를 택해 들어왔지만 현실은 달랐다.

 

널마루에 비질을 하면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마치 뾰족뒤쥐의 날카로운 이빨에 심장이 뜯기는 듯했다. 설거지를 할 때면 접시와 그릇이 산산조각 날 것처럼 덜거덕거렸다.-10

 

아이를 잃은 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서를 거치지 않고 묻어만 두었던 것이 메이블을 자꾸 안으로 침잠하게 하고 죽음을 생각할 만큼 우울하게 만들었다. 서투른 사냥꾼이자 농부인 이들에게 이웃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완벽한 첫 눈이 내린 날, 부부는 작은 여자아이 모양의 완벽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눈소녀가 그들을 찾아왔다. 파란 천, 붉은 털. 파란색 외투를 걸치고 붉은 여우와 함께 재빠르게 나무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가녀린 아이. 눈사람이 변해서 소녀가 된 게 아닐까, 동화가 현실이 된 게 아닐까.

이 아이는 메이블과 잭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이가 아닐까.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아이는 부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잭은 아이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어디서 왔는지, 가족은 있는지...아이의 이름은 파.이.나. 라고 했다.

정글북 속 모글리처럼 파이나는 알래스카의 눈 속을 누비고 다니며 사냥하고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한 아이였다. 추운 겨울 잠시 부부의 집에 다녀간 아이는 봄이 되자 사라져 버렸다. "눈소녀" 동화 속 이야기처럼 파이나는 겨울만 되면 찾아오지만 따뜻한 봄이 오면 녹아버린 것일까. 다시 겨울이 되자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난 아이에게 부부는 옷을 만들어주고 음식을 함께 먹고 그림그리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착할 법도 하건만 파이나는 봄이 되면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세월이 가고 결코 이곳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던 부부는 부부를 제외한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띈 적 없는 비밀스런 눈의 아이 파이나와 이웃인 에스더네 집안의 도움으로 알래스카 생활에 젖어든다. 에스더네 막내 아들 개렛은 부부의 믿음직한 일꾼이 되어주었고 사냥꾼으로서도 흠잡을 데 없다. 그러던 어느날 개렛은 숲 속에서 신비한 여자아이가 덫에 걸린 백조를 잡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손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눈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진 야생의 소녀 파이나는 동화 속 여주인공처럼 나약하지 않다. 야생의 여전사 같은 느낌으로 알래스카의 눈 덮인 황야를 누비고 다닌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도시로 내처 돌아갈 것만 같던 메이블도 알고 보면 꽤 강인한 여성이다. 아버지가 읽어주던 멋진 "눈소녀" 동화책의 환상 속에 빠져 살 것만 같던 그녀는 파이나를 만나 진짜 엄마, 진짜 여성이 되어 간다.

눈소녀 동화가 가진 안타까운 이별의 결말은 소설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구체화된다.

눈의 아이 파이나가 이대로 영영 사라져버리면 이 부부는 어쩌나, 하는 단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동화 속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잇닿아 있는 이 스토리가 너무 마음에 든다.

동화와 현실의 완벽한 결합이란 바로 이런 것!

 

환상적인 눈의 세계에서 태어난 눈의 아이 이야기 속에 빠져 드는가 싶으면

혹독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거대한 무스를 사냥하고 가죽을 바르고 내장을 끄집어내는

생존에 관한 급박한 사정이 다음 장에 나타나면서

거친 숨과 굵은 땀방울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진정한 이야기꾼.

 

에오윈 아이비의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다음 작품은 얼마나 대단할지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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