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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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아질 수 있을까?[중국식 룰렛]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아니, 없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한 가닥, 혹은 두 가닥씩 흰머리가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나 자신이 늙었다며 의기소침해지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슬프게도 늙어가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까지 철 모르는 아가씨가 자리하고 있다. 아니, 공상을 꿈꾸는 빨간머리 앤이 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이들을 향해 제법 어른인 것처럼 이거해라, 저거해라 라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아이들 없는 사이에는 내가 그 잔소리 들을 만한 행동을 여전히 하고 있다.

세상은 예전보다 작아져 보이지만 그 속을 누비고 다닌 시간보다 집 안에서 나만의 '왕국'을 다스리는 시간이 더 오래여서 바깥세상은 더 크게 느껴진다.

어항 속 물고기가 바야흐로 비닐에 포장되어 팔려나갈 데는 여러 군데지만 특히 내가 팔려간 곳은 작고 고요한 일반인의 세계다.

일반인의 세계에 갇힌 채 그나마 더 넓은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다, 좋은 소설을 읽는 것.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누가 봐도 지어낸 이야기라면 읽는 순간만 혹해서 읽고 곧 잊어버린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여실히 펼쳐지면서, 나라면...이라는 상상을 하게 하는 소설이라면, 두고두고 손 닿는 곳에 두고 자꾸 꺼내보게 된다.

 

은희경 소설집 [중국식 룰렛]은 표제작을 포함, 모두 6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잔잔한 고요 속에 몸담고 있던 작은 물고기에게 세상의 기운이 느껴지는 파동을 조금씩 조금씩 전해준다.

아마 이 작은 물고기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떨림을 느끼고 아마 한 번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더 먼 곳을 비교해 볼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차분히 들여다볼 것이며 아마 경중을 가려보기도 할 것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불운과 행운, 세상의 거짓과 나의 거짓, 우연과 암시, 운명과 비극, 불연속선이 지닌 불안함 같은 단어와의 교차점을 찾아보게도 될 것이다.

 

표제작 <중국식 룰렛>은 밤의 술집에 모인 네 명의 남자들이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진다.

술집 주인 K는 손님에게 세 개의 잔을 내놓고 하나를 고르게 한다. 각기 다른 라벨을 가진 술 중 하나를 고름으로써 손님들은 각자의 운을 시험한다. 술의 라벨에 따라 가격은 천차 만별이지만 같은 값을 지불해야 한다.

 

격이 다른 수많은 술을 똑같은 값에 내놓고 직접 골라 마시게 하는 K의 게임. 거기에서 K가 손님들에게 기대하는 점도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아드레날린을 제공하는 데에 재미보다는 악의가 한 수 위일 테니까. -11

 

시한부 선고를 받은 K가 한자리에 모은 이들은 운 좋게도 고가의 위스키를 골라낸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행운과 불운이 섞여 있는 진실 게임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답의 정직성엔 하나같이 '5'라고 말하는 그들. 위스키에 '천사의 몫'이 있듯이 그 자리에 함께 한 그들에게도 각자의 '천사의 몫'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행운으로, 혹은 불행으로 몰아가는 것은 각자의 선택.

'악의'를 손바닥에 올려 놓고 굴리는 주인장 K의 남은 생에도 천사의 몫이 함께 하길...바라며 짓궂은 웃음 날려본다.

 

열 세 살 때 일어났던 버스 사고를 기점으로 '천재 소년'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평범한 삶을 택한 남자의 이야기 <대용품>은 서정주의 시, <신발>과 맞닿아 있다.

 

그래, 내가 스스로 신발을 사 신게 된 뒤에도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대용품으로 신발을 사 신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있습니다.-서정주,<신발>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깊이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감당하기 어려웠던 거짓의 세계와 그 정도 거짓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어른의 세계 "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마음 속으로 용서를 구한다.

 

<별의 동굴> 속 비정규직 대학원생 이야기는 스스로 만든 동굴 속에 칩거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가 만든 동굴은 내가 좋아하는 책의 동굴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책을 한 순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값싼 무언가로 변질시킨다.

"허세에 찬 그 인생을 얼마나 위태로운 마음으로 지키려 애써왔는지 고스란히 보여주었다."라며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 준 책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린다. 아니, 자신의 입지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까.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삶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내 삶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거실 책장을 바라보며 또, 한동안 말없이 실의에 차 있게 된다.

이대로 주인공의 삶에 동화되어 나 자신을 '애도'하고 말 것인가, 다른 희망을 찾아나설 것인가.

여기서 또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은희경은 사부작사부작 이야기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더니 어느 순간 세차게 뒷머리를 후려친다.

그렇게 안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지나간 것들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문이 열릴 수도 있다고.

싱글몰트 위스키 향을 입은 '천사의 몫'이 주어져 있으니 이걸 어떻게 사용할 거냐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엄격한 눈초리로 묻는다.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도착점.

"더 좋아진다는 뜻이겠지?"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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