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이야기엔 나도 울어.

"괜찮아?"

"어‥‥"

"목마르니?"

"어‥‥"

"뭐 마시고 싶어?"

"밀크셰이크."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어.

"뿅 갔군."

"찰리, 배고프니?"

"어‥‥"

"뭐 먹을래?"

"밀크셰이크."

내 대답이 전혀 웃기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애들이 그토록 왁자지껄하게 웃지는 않았겠지? 그때 샘이 내 손을 잡아끌며 일으켜 세웠는데 방바닥이 어질어질하더라.

"가자. 밀크셰이크 만들어줄게." (p.66)



















찰리는 파티에 갔다가 밥이 건넨 브라우니를 먹는다. 그런데 그 브라우니에는 대마초가 들어있었다. 찰리는 당연히 뿅가고 사람들은 찰리앞에 모여서는 그런 찰리를 보고 웃는다. 이에 샘은 밥에게 화를 내며, 찰리가 먹고 싶다는 밀크셰이크를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무척 좋았는데, 그건 샘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큰 통을 꺼내고 뚜껑을 열어 아이스크림주걱으로 크게 덩어리로 퍼서는 믹서기에 넣고 우유를 붓고 믹서를 돌리는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보여졌기 때문이다. 밀크셰이크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는 느낌. 그보다는 그 달콤한 것을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주는 바로 그 느낌이 생생히 전해진다고 해야할까.



샘은 나를 부엌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불을 켰어. 이럴 수가! 불빛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은 거야. 마치 낮에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왔을 때, 내리죄고 있는 눈부신 해를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지. 샘은 아이스크림과 우유 그리고 믹서를 찾아냈고, 내가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모퉁이를 돌아가라고 햇어. (p.67)



찰리는 샘을 좋아한다. 그런 샘이 찰리를 위해 밀크셰이크를 만들어줬다. 그 맛은 어땠을까?



내가 먹어본 것 중에서 제일 맛있는 밀크셰이크였어. 너무 맛있어서 겁이 날 정도였다니까. (p.68)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 [라스트 나이트] 에서, 여자의 남편은 여자와 자신을 위해 달걀 요리를 한다. 늦은 밤, 아내와의 사이에 흐르는 서먹하고 어색하고 나쁜 기운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는 프라이팬을 꺼내고 달걀을 깨뜨리고 우유를 넣고 마구 휘젓는다. 그렇게 접시에 그 따뜻한 달걀 요리를 담고 오렌지쥬스를 따라준다. 그들은 그 요리를 나눠 먹으면서 대화를 시도한다. 


나는 그 장면이 무척 좋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을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지독하게 낭만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따뜻하기도 하고. 나는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어서 같은 상황이 온다면 사발면에 물이나 부어주겠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요리 한 두가지쯤은 배워둬야 하는게 아닐까 싶어졌다. 영화 월플라워 에서도 마찬가지, 샘이 만들어주는 밀크셰이크는 맛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사먹어 보지 못했던 밀크셰이크를 사먹고 싶어졌다. 만들어 먹어볼까, 도 생각했지만 그러려면 아이스크림도 사야하고..그냥 한 잔 사먹는게 간단하겠다 싶어져서, 어제 백화점에 들른터에 지하에 있는 버거킹에 들렀다. 스타벅스에서는 밀크셰이크를 본 기억이 없어서 버거킹에 갔는데, 버거킹에도 밀크셰이크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여동생이 먹고 싶다고 해서 롯데리아에 들어가 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서 스맛폰에 대고 롯데리아 밀크셰이크 라고 검색해봤다. 딸기 셰이크와 초코 셰이크까지 있더라. 나는 롯데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밀크셰이크를 주문했다. 바닐라 맛이었다. 그리고는 자리를 잡고 앉아 창 밖을 보며 밀크셰이크를 먹었다. 기념 사진도 한 장 찍어두었다. 그런데 별로, 맛이 없었다. 굉장히 저렴한..맛이라고 해야하나. 쩝.. 나중에 한 번 만들어 먹어 봐야겠다. 아이스크림이랑 우유만 넣고 갈면 되는거겠지?




영화도 책만큼 좋았다. 아주 잘 만들어졌다. 나는 눈물을 닦기도 했다. 해리 포터를 본 적은 없지만, '엠마 왓슨'은 해리포터로부터 제대로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리 역의 소년도 매우매우 만족스러웠고. 무엇보다 '에즈라 밀러'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나는 이 배우가 [케빈에 대하여]에 나온 그 '케빈' 이란걸 알고 있엇는데, [월플라워]에서의 패트릭 역을 무척 잘 해줬고, 이 배우는 신기한게, 케빈 역시 잘 해낼 것 같은거다. 무슨 역을 맡겨도 다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을만큼 아주 강한 개성을 가진 배우같았다. 무엇보다 웃는 모습이 너무 해맑아서 나도 같이 웃고 싶다. 영화속에서 간혹 패트릭이 활짝 웃는 장면이 있는데, 그럴 때 에즈라 밀러는 정말이지, 온 얼굴이 웃는다. 마주 웃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주 매력적인 배우다, 아주.



극중에서 찰리와 사귀는 메리 엘리자베스가, '세상에 마초들이 가득한데 네가 내 남친이 되다니!' 하고 감탄하는 장면이 있다. 확실히 찰리는 마초와는 전혀 다르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마초도 나쁘지 않지만(응?) 메리 엘리자베스의 감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는 [백년의 유산] 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이정진이 자신의 약혼식에 가서 파혼을 선언했다. 그의 약혼녀(가 되기로 했던 여자)는 그것을 다른 여자인 유진이 그의 앞에 자꾸 왔다갔다거려서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엄마와 오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파혼을 당한 이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죄다 남 탓이라고 생각한 것. 유진이 회사를 옮기면, 자신이 집을 나오면,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봐줄까? 그 날 저녁, 이정진은 그녀를 불러낸다. 그녀는 그에게 도대체 왜 파혼하는거냐며 이유를 묻는다. 우리 엄마 때문이냐, 오빠 때문이냐, 자기가 유진을 모함했기 때문이냐, 하면서. 그러나 이정진은 그녀에게 솔직히 말한다. 너에게 마음이 가질 않는다고. 그리고는 이내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너가 궁금하지 않아.

너를 알고 싶지 않아.



아, 진짜 완전 가슴에 바람이 휙- 분다. 갑자기 나는 오래전의 드라마인 [내 이름은 김삼순]을 떠올렸다. 삼식이(현빈)가 삼순(김선아)에게 이것저것 묻자 삼순이가 삼식이에게 그랬다. 그런거 묻는거, 그거 관심이라고. 관심이 없다면 그런거 묻지 말라고. 이 말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어제는 갑자기 훅- 왔다.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다고 하니, 상황이 종료된 게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노력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 대체 어떻게 억지로 궁금해하고 억지로 알고 싶어한단 말인가.




그러고보니 내가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에, 궁금한 마음에 끊임없이 질문했던 건, 이제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그 때는 왜 그렇게 궁금한게 많았을까? 왜그렇게 알고 싶은게 많았을까? 내가 한 만큼의 질문을 그도 내게 똑같이 돌려줬는데, 왜 한 쪽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한 쪽은 아니라고 했을까? 어느 한 쪽은 분명 머저리..인걸까?





오늘은 피츠제럴드의 겨울 꿈을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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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me on eileen wallflower
    from 마지막 키스 2013-04-17 09:27 
    어제 늦은 밤, 월플라워 OST 시디를 틀어두고 2번 트랙을 듣는데 너무 신났다. 영화속에서 샘과 패트릭이 거실춤 추던 장면이 생각나서.으아악 너무 좋아. 완전 사랑스러워. 중간에 저 광고 없는 영상을 찾고 싶었는데 못찾고 ㅠㅠ 이 영상을 보노라니, 이 영화 DVD 살까 싶어진다. 아 너무 좋아. 흑흑. ㅠㅠ 이 영화 참 좋아요. 정말 좋습니다. 진짜요. ㅠㅠ
 
 
자작나무 2013-04-1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나는 너를 궁금해해 나는 너를 알고 싶어
2. 너는 나를 궁금해해 너는 나를 알고 싶어해
3. 나는 너가 궁금하지 않아 너를 알고싶지 않아
4. 너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아해 너는 나를 알고싶지 않아해

-1.2.3.4는 항상 어긋납니다.그것이 인생.

다락방 2013-04-18 11:37   좋아요 0 | URL
간혹 어긋나지 않을 때도 있죠. 그것 또한 인생이고요.

마노아 2013-04-1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크 쉐이크 내가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러나 나도 롯데리아 밀크쉐이크 밖에는 먹어본 적이 없어요.
영화 속에서 아이스크림에 우유만 넣고 믹서로 돌리던데, 저는 거기에 뭐가 더 들어가야 되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때 떠오른 게 사이다였는데, 사이다가 정말 들어가는지는 몰라요...;;;;;;

다락방 2013-04-18 11:38   좋아요 0 | URL
음..사이다 들어가면 별로 안좋을것 같아요. 나중에라도 내가 혹시 해 보면 말해줄게요. 맛이 어떠했는지. ㅋㅋ 언제든 한 번 해보고, 그리고 가장 잘 하는 음식으로 밀크셰이크라고 답하겠어요!! 불끈!! ㅎㅎㅎㅎㅎ

레와 2013-04-1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연인]에서도 케이트가 팅커를 위해 달걀 요리를 해주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장면도 따뜻하고 좋았는데..
달걀 후라이 넣은 샌드위치 먹고 싶다.ㅎㅎㅎㅎ


사랑이 어느 한쪽의 노력으로 되는거라면, .....

다락방 2013-04-18 11:39   좋아요 0 | URL
맞어, 맞어, 우아한 연인에서도 그랬어!! 아웅 너무 좋아. 그 날 팅커랑 케이트랑 키스도 하잖아. 흑흑. 아우 ㅠㅠㅠㅠㅠㅠㅠㅠㅠ역시 달걀은 키스를 부르는 음식인가..(응?)

난 햄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요. ㅎㅎ

아무개 2013-04-16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도 밀크쉐이크는 롯데리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본듯 하네요...


급 질문이요. 다락방 님은 해도 후회하고 안해도 후회할일은 어떻게 결정해요?
뭐든 해보고 나서 후회한다? 아님 후회할짓은 안한다? 아님 그때그때 달라요?? @..@

다락방 2013-04-18 11:40   좋아요 0 | URL
아니, 아무개님. 왜 아무개님으로 닉네임을 바꾸셨나요?

저는 대부분 하고 후회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안하고 후회하면 후회가 곱이 되는것 같아서요. 여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젠 안 그러려고 하는데..성격은..어디 가지 않으니까 또 어떨지... 가장 적절한 답은 '그때그때 달라요' 가 되긴 하겠지요. 왜요, 아무개님? 이런 질문은 왜 하신 거에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지금 아무개님에겐??

단발머리 2013-04-17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크쉐이크는 수제가 맛있지만, 굳이 말씀드리고 싶네요.

롯데리아 보다는 맥도날드가 맛있습니다요~~~

다락방 2013-04-18 11:40   좋아요 0 | URL
오오 맥도날드에 밀크쉐이크가 있다는거죠. 오케바리 접수. 거기서도 한 번 먹어보겠어요. 빠샤!

비로그인 2013-04-17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닐라 아이스크림 푹 떠서
우유50ml, 발렌타인1티스푼, 설탕 듬뿍 넣은 고농축 커피 50ml 넣고
만들어 볼려구요~ㅎ~
에즈라 밀러, 시티 아일랜드에서도 귀여웠어요 : )

다락방 2013-04-18 11:41   좋아요 0 | URL
오, 굉장히 근사해 보이는 레시피네요?? 설탕..은 좀 빼도 될것 같아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있으니까. 아, 그전에 일단 아른님의 평 부터 들어보고. 만들어보고 맛 보신 뒤에 꼭 알려주세요! 약속~

관찰자 2013-04-18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다락방님 페이퍼 보고선 가게에 무려 '밀크쉐이크' 메뉴를 추가했다니까요?
가게에 이번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기계를 들여놨는데,
오, 이 페이퍼 보니까 '어라, 아이스크림 뒀다 뭐해? 밀크쉐이크나 만들어야지!' 했다니까요?

밀크쉐이크가 여름 대박 상품이 되거든,
그것은 순전히 <월플라워> 때문.
이 아니고, 히히.
다락방님 때문이에요.^^

다락방 2013-05-24 13:05   좋아요 1 | URL
관찰자님, 밀크셰이크는 판매하고 계신가요, 지금?
대박 상품이 되어서 매출이 뻥뻥 터져야 될텐데요. 므흐흐흐흣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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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평야


군장(軍裝)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

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앉아 쉬다보면 드러

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

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오열종대로 쏟아지는 별들을 보는 사람이, 별들을 짠지 무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군대 생활을 하는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힘들진 않을까. 속안에 자라나는 그 많은 감정들을 어떻게 눌러가며 조직생활에 충실할 수 있을까. 매순간 가슴속의 무언가가 끓어오르진 않을까. 그렇다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을, 그렇다는 이유로 특별하게 취급할 순 없겠지만, 군장을 메고 드러누워 별을 바라보는 젊은 군인이라니, 그것을 콱- 쏟아져 내린다고 표현하는 사람이라니. 나에게 힘이 있다면 거기 그저 네 마음대로 한껏 드러누워있다 내려오라 하고 싶어졌다. 만약 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옆에 드러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같이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리지? 응, 정말 그래. 하는 대화 뒤에 우리는 얼마간 침묵을 지키겠지.



시집의 제일 앞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



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



이 한 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연화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여름 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연화라는 이름이 단어 자체로 마음에 든다는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어디서든 그 이름을 찾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연화란 사람이 좋아서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게 된 건지, 이 아름다운 문장에 또한 시적인 문장에 깊이 스며든 뜻은 무엇일까. 나는 친구로부터 이 시집이 좋다는 추천을 받고서도 선뜻 사기가 망설여저 일단 미리보기로 한 장씩 넘겨본다. 그러다 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 때문에 더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문장은 다음 시의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와 닮아 있다.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

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

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

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

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

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

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 시집을 읽으며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이란 문장 때문에 시를 사진 찍어 보내준 일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집을 넘기다가 그 시를 찾아낸다. 아니, 거기 있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렷던

당신의 스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시를 시로 만들어주는 것은 어쩌면 단 하나의 문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스럽지 않게 가만 읽다가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에서 이 글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에서 역시나 시로 완성된다.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마르고 허약한 사람,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 있는 사람, 외출하는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무엇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그가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못해 아프다. 




미인의 발



반디미용실에서 처음 낙타를 보았습니다 미용실 누나는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 사이에 제 머리를 묻고 비뚤어짐을

가늠했고 저는 실눈만 떴다 감았다 했습니다 왼쪽과 오른

쪽을 맞춰 다듬다 머리는 새싹처럼 짧아지고 쥬시후레시를

건초처럼 씹는 미용실 주인의 잔소리에 미숙한 누나는 푹푹

발이 빠졋습니다 누나는 동네 아저씨들 술자리의 기본 안주

가 되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커피 잔에서 설탕과 함께 휘

저어졌습니다 엄마보다 동네 형들이 반디미용실에 더 많이

들락거렸고요 낙타가 떠난 날은 감나무집 형이 소주를 댓병

으로 마신 날이었습니다 형 가슴보다 까맣게 그을린 반디미

용실 건물, 석유 말 통과 담뱃불이 반딧불이처럼 날아들어

왔다는 미용실 주인은 양귀비 염색약처럼 까맣게 울었습니

다 낙타는 불이 다 꺼진 뒤에야 미용실에서 나와 삼거리 지

나 일방통행로로 천천히 걸어나갔습니다 낙타가 사하라로

갓는지 고비로 혹은 시리아 사막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

만요 마음을 걷던 발자국은 아직도 남아 저는 요즘도 간혹

그 발자국에 새로 만나는 미인들의 흰 발을 대어보기도 하

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춥지만 엄연한 봄밤이 아닌가. 봄밤에는 잠들기 전에 왈랑왈랑 거리는 시를 한 편씩 읽어줘야 하는건 아닌가. 꽃이 피는걸 보고 돌아오고 꽃이 지는걸 보고 돌아오고, 발을 깨끗이 닦고 자리에 눕기 전, 시집을 펼쳐들고 천천히 그리고 가만가만 시를 한 편 읽고 자야 봄밤은 봄밤으로 완성되는 건 아닌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시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 시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당신이라는 세상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

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

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를 빈방으로 글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

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

에는 옷(衣)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

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조금 더 날이 좋아지면, 이제 바람은 자신의 숨결을 좀 죽일 때면 당신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가고 싶다. 우리의 손에는 이 시집이 들려있을 것이고 얼마만큼의 술이 들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달이 뜨기 전,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시를 한 편 씩 골라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더이상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지면 땅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 있겠지.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그 밤을 그렇게 별들을 바라보다 지내도 좋을 것이고 근처의 여관방으로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다음날 햇빛이 들면 당신 얼굴의 볕을 만질 수 있도록, 그렇게. 시를 읽고 별을 보고 당신 얼굴의 볕을 만지고나면, 아마도 세상은 온통 내 것 같을 것이다.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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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5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5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5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3-04-15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준'이란 시인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참, 여러모로 무식한*^^*

시집 권해주는 친구 너무 멋있어요. 나도 친구들에게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들이 읽을랑가?!? 모르겠지만요.

좋은 시가 너무 많아요. 빨리 읽기 아까워서 천천히 읽어보고 가요.

다락방 2013-04-15 15:32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알게된 시인이에요. 시를 잘 읽을줄 모르는데, 이 시집의 몇몇 시들은 참 좋아요. 말 그대로 시적이라고 해야할까요. 봄밤이잖아요, 단발머리님. 우리 잠들기 전에 시 한 편씩 읽고 자요. 헤헷 :)

테레사 2013-04-15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의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에서...

다락방 2013-04-15 15:33   좋아요 0 | URL
오, 테레사님 저도요! 저랑 똑같아요. 저는 그 문장에서 이상을 느낀건 아니고, [꾀병]이란 시에서 '이상'의 [날개]가 겹쳤어요. 완전 겹치더라고요. 테레사님도 그랬군요!!

(바뀐 프로필 근사해요!)

테레사 2013-04-15 16:55   좋아요 0 | URL
으히히, 다락방님이 바꾼 걸 보고, 또 오늘 기분도 그렇기도 하고, 또또 봄은 영영 이렇게 시시하게, 골난 처녀처럼, 뭐 하여간 너무하다 싶어, 술이나 한잔....순전히 다락방님에게 영감을 얻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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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을방학의 앨범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목소리부터 가사와 음악까지 모두 색다르고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의 내 상황과 맞물려서인지, 가사도 내 마음 같았고 그렇게 가을방학의 음악은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이 되었다.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잠깐 갈등하며 가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었고. 그래서 그들의 2집 소식을 듣자마자 앨범을 구입했다. 그런데 웬걸, 처음 그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상황과 지금의 내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인걸까. 이제 더이상 그들의 음악이 새롭게 느껴지질 않는다. 여전히 가을방학다운 노래들이지만, 반갑거나 독특하다는 느낌보다는 지난 노래들의 그 싱그러움에서 가사만 바뀐것 같다. 더이상 참신하지도 독특하지도 않고, 이제는 그렇게까지 좋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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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04-14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외부의 자극은 내부 상태에 좌우되어 수용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모든 것에 무덤덤해진 생활 속에서 마음을 잡아끄는 것을 만났을때, 지난 시절이 생각나 더욱 푹 빠지게 될지도 몰라요.

다락방 2013-04-15 08:49   좋아요 0 | URL
네 제 상황이나 감정이 바뀌어서 음악을 듣는것도 달라진걸지 몰라요. 며칠전 만난 친구는 제게 음악을 듣는 취향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하던데, 어쩌면 저는 취향이 달라진걸지도 모르겠어요.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요.

자작나무 2013-04-15 10:01   좋아요 0 | URL
모든 것이 변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다락방 2013-04-15 11:05   좋아요 0 | URL
인정하는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닌데, 인정한다고 해서 씁쓸하지 않은건 아닌것 같아요.

치니 2013-04-1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말할 수 있다, ㅎㅎ 전 처음부터 가을방학이 그냥 그랬어요.

다락방 2013-04-15 11:05   좋아요 0 | URL
이번에는 듣는데 보컬 목소리도 좀 듣기가 싫더라고요;; 제가 변한것 같아요. 하핫

애쉬 2013-04-1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
그러다 또 어느날 꽉.하고 어느 대목이 마음을 쥐어 짤지도 몰라요.
그 정도의 준비는 늘 하고 있자, 그게 저한테 갖는 가을방학의 의미지요~
다락방님께도 어느 날 꽉.

다락방 2013-04-15 15:33   좋아요 0 | URL
네, 음악이란 게 그런것 같아요. 이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어느 노래가 듣고 싶어 꽉,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토요일 밤에는, 편애하는 대상에게 이메일을 쓰면서 편애를 들었어요. 그 순간엔 적절한 선곡이었죠.
:)
 
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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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과거는 항상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다치게 한 것이라면 더더욱 묻어버릴 수 없다. 간혹 어떤 살인이 부당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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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 2013-04-1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왜 이거 별 세개에요?
이거 읽고 싶어서 회사고 뭐고 뛰쳐 나가고 싶었다면서....

다락방 2013-04-14 17:52   좋아요 0 | URL
재미있어요, 관찰자님. 재미는 있는데 간혹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면이 있는 것 같아서 별 하나 빼고, 제가 밑줄 그을만큼 감탄할 문장들이 나오지도 않아서 또 별하나 뺐어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물론 슬프기도 할거고요.
 
[전자책] 크리스마스 이브의 천사
산드라 브라운 지음, 나채성 옮김 / 큰나무 / 2011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종이책으로 봐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자책은 편집이 엉망이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간격이 없어서 읽는데 상당한 낭패감이 든다. 내용은 산드라 브라운틱해서 마음에 들었건만.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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