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식탁에서 에드워드는 여러 차례 연달아 빈정대며 묻는다. 그렇게 살짝 이 빠진 접시가 그의 앞에놓일 필요가 있는지. 세 번째 같은 질문에 에밀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접시를 잡아채서는 정원의 돌 위로 냅다 던져 산산조각이 나게 한다. 물질이든 영혼이든 한 치의 결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또 한 번은 외양간 앞. 에드워드가 땀에 흠뻑 젖어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말을 피가 나도록 채찍으로 내리친다. 그 가혹한 형리를 향해 에밀리는 머리가 산발이 되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깜짝 놀란 아버지는 채찍을 떨어뜨리고 물러선다. 성녀들의 분노는 악마의 분노보다 더 끔찍하다. - P27

"진리가 나의 고장이다. 그런데 여동생은 너무도 자주 회한의 고장에 산다." 에밀리는 이렇게 말하며, 비니가 겪는 고질적인 두통을 암시한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도 잘 보듬는 여동생이건만, 화염처럼 타오르던 장미꽃들 사이에서 도둑맞은 입맞춤에 대한 기억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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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간인 줄은 진짜 몰랐네.
한번은 사란들이 무시로 오가는 길거리에서 그헌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나의 직장 후배였고 어느 시기가 지나고부터는 오래 가까운 친구처럼 일상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 말이 지나치게가혹하게 느껴져서 그 당시에 나는 입을 닫아버렸다. 만회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더 심한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나와 먼 사람들이거나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서였는데 대체로 내가 그들을 실망시킨 것에 대한 분풀이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해가 잘 드는 길을 걸을 때나 불이 꺼진 방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할 때 문득 떠오르곤 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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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2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방 안 싸니?

다락방 2023-07-28 22:06   좋아요 0 | URL
저 이제 퇴근하고 왔어요. 짐 언제 싸지 ㅋㅋ 아놔 ㅋㅋ 일단 씻고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8-01 13:42   좋아요 0 | URL
자니…? 보다 실용적인 물음 ㅋㅋㅋㅋㅋㅋㅋㅋ 가방 안 싸니? ㅋㅋㅋㅋ

다락방 2023-08-01 14:4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선 분명한 것부터 말하자면, 넌 나를 구해줬어. 네가 시간 타래를 내려오는 기척은 나도 느꼈어. 내생각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예민하게 너의 발소리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나일 거야. - P113

블루는 도시를 사랑한다. 도시의 익명성과 냄새와 소리를 사랑하지만, 숲 또한 사랑한다. 다른 이들은 조용한 곳으로 여기지만 결코 조용하지 않은 장소인 숲을 블루는 어치나 딱따구리,
찌르레기 따위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기도 하고, 자그마한 날개를 열심히 파닥이며 결투하는 벌새들을 보고 소리 내어 웃기도 한다. 손을 뻗어 동고비와 박새와 알락솔새에게 내밀면 새들은 포르르 날아와 그녀의 손가락을 나뭇가지 삼아 앉는다. 오색딱따구리의 머리 깃을 다독이며 그녀는 그 깃의 색깔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을 만질 때 느낀 짜릿한 긴장감을 바늘로 또 실로 삼아서, 가든이 보기에 그녀가 숲에서 느낄 법한즐거움으로 엮어 낸다. - P131

나는 이미 내 안에 너를 하나 만든 거야. 아니면 네가 네 안에 나를 하나 만들었거나 난 네 안의 내가나의 어딜 닮았는지 궁금해. - P133

나는 네가 나오는 꿈을 꿔 내 머릿속에서 네 자리가 자꾸만 커져 가 나의 물리적인, 사적인, 감상적인 의식 속에서, - P156

너의 자리는 다른 어떤 세계나 시대보다 더 커다래, 꿈속에서 나는 네가 이 사이에 문 씨앗이거나, 네가 대롱을 꽂은 나무야 내 꿈속에는 가시나무와 정원이 나와 홍차가나올 때도 있고. - P157

하지만 너를 떠올리면 나는 함께 고독해지고 싶어. 나는 맞서 다투면서도 한편으로는 얻으려고 애쓸 상대가 필요해.
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 나는 너에게 하나의 맥락이 되고 싶어. 너도 나한테 그런 존재가 돼 주면 좋겠어.
난 너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 그리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둘이서 함께 알아내고 싶어. - P181

레드, 난 널 사랑해. 레드, 난 그렇게 적은 편지를 매 순간너에게 보낼 거야. 딱 한 마디만 적힌 편지, 네뺨을 쓰다듬고 네 머리카락을 거머쥘 편지, 너를 깨물 편지, 너에게 흔적을 남길 편지를 나는 독개미와 대모벌로 너에게 편지를쓸 거야. 상어 이빨과 가리비 껍데기로 편지를 쓸 거야. 바이러스와 너의 폐 속에 들이치는 아홉 번째 파도의 소금기로 편지를 쓸 거야. 나는...………
그만, 이제 그만, 그만할게. 이런 일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될 것 같아. 나는 케팔로스에 피는 꽃과 해왕성에서 나는다이아몬드를 원해.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지구 1000개를 불태우고 그 재에서 뭐가 피어나는지 보고 싶어. 우리가 나란히 손을 잡고 맥락 속에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오로지 우리 둘만 알아볼 수 있는 의미들을 난 내가사랑했던 모든 장소에서 너를 만나고 싶어.
우리 같은 사이는 어떤 식으로 맺어져야 하는지 난 모르겠어, 레드. 하지만 너와 함께 그 답을 알아보고 싶어서 더는기다릴 수가 없어. - P195

그들이 지닌 유일한 미래는 따로 함께인 시간이다. 둘은 너무도 오랫동안 서로를 모른 채 살았고, 시간을 누비며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따로였고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모습을 빚었고 그러는동안 서로에 의해 모습이 빚어졌다.
그러니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왜 안 된단 말인가?
아플 것이다. 그들은 전에도 아팠던 적이 있다. 상대의 목숨을 구하려고.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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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속살해(parricide)‘라는 단어는 모친 살해와 부친 살해를 모두 지칭하지만, 엘렌식수는 역사, 문화, 학문적으로 후자에 비해/의해 전자가 가려졌음을 꼬집는다. 이러한생각은 픽션 『오스나브뤼크』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있다. "사실상 모든 가정에는 모친 살해밖에 없지만, 모친을 더 살해하고자 그 누구도존속살해를 모친 살해라 부르지 않는다."(엘렌 식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데 팜므(Des Femmes], 1999, 22쪽) 식수의 문제 제기는 정신분석학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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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영화를 처음 봤을 땐 그가 실업자이자 수급 신청자로서 겪는 억울함에 눈길이 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노동자 다니엘이 보였다. 영화내내 그는 꽤 바빴다. 수급을 신청하고 어이없는 취소 통보에 항의하는 일은 고된 노동의 반복이었다. 수급 상담을 기다리다 우연히만난 케이티 가족을 돕는 일도 중요했다. 두 아이와 노숙인 쉼터에머물다 낯선 도시로 이사 온 싱글맘에게 그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 가족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주택이 ‘집‘이 될 수 있도록 수선을 시작했다. 변기를 수리하고, 창문에 에어캡을 바르고, 공구를 가져와 문을 고쳤다. 일자리를 찾는 케이티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고, 목공 솜씨를 발휘해 멋진 모빌을 만들어줬다. 한 끼 해결도 버거운 이 가족을 푸드 뱅크까지 안내한 사람도 다니엘이었다. 배가너무 고팠던 케이티가 진열대 위 통조림 캔을 따 허겁지겁 입안에밀어 넣었을 때, "늪에 빠진 느낌"이라며 수치심에 주저앉아버렸을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응수한 사람도 다니엘이었다.
이 모든 일이 노동과 무관하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임 - P102

금노동을 상식의 준거로 삼고, 경제 가치를 생산함으로써만 생계를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식은 오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1970년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 운동을 전개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 페미니즘의 공로가 크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2020)는 가사노동이 노동력을 재생산하고자본 축적의 과정들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본주의적생산의 전제 조건임을 역설했다. 자본주의의 회계 장부에 기입되지않은 채 자본주의 생산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해온 돌봄노동은, 대부분 이를 당연한 규범으로 강요받는 여성들, 그리고 이를 ‘저렴한가격에라도(무어 2020) 외주화할 여건이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의일로 남았다. - P103

쑨위제 남편 리신(가명)은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됐다. 쑨위펀은
"학교 선생님"이라 부르지만, 중학교에서 설비 일을 맡고 있다. 인간의 쓸모를 발전과 성장에 유용한 몸주체인가로 판별하는 풍경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동소이해서, 결혼은 많은 경우 손상의 눈금을 맞추는 과정이 됐다. 가난한 농민 호구 소지자라는 경제·사회 지위의 손상이 장애인 남성이라는 남성성masculinity의 손상과 등치되면서, 사람들은 장애인 도시 남성과 농민 여성의 결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해석했다. - P178

물어볼 엄두가 안 나고, 아무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은 태생적인 게 아니라, 묻고 따지고 소리지를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험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누적된 결과다. - P186

**경비 대부분이 지원된다는 점에서 대기업의 단기 해외 자원봉사는 모든 대학생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방학 중 보름여의 시간을 전적으로 투자해야 하므로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기적인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이 선뜻 지원하기는 쉽지 않다. M 기업 프로그램 담당자도 참가자 대부분이 중산층 가정 출신임을 언급했다. 중국 참가자들도 사정은 엇비슷했지만,
외국 학생과 어울리고 한국에도 갈 수 있다는 ‘귀한 기회를 붙잡으려는 농촌 출신 학생도 더러 있었다. - P232

정리해보자. 단기간의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정부와기업은 청년 실업과 고용 불안을 초래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 P262

‘글로벌 인재 양성‘이라는 긍정적 화두로, 시대적 책무로 전환했다.
위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대학생청년들에게 대기업에서 비용일체를 부담하는 글로벌 캠프는 자신의 커리어 경쟁력을 높이는 대외활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범람하는 의례는 참가자들이
‘글로벌 인재‘라는 요구에 기꺼이 퍼포먼스로 화답하는 장인 동시에 오랜 기간 쌓아온 마음의 결핍을 일시적으로 메우는 기회였다.
해외 자원봉사가 타국의 경제적 빈곤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 실존의 빈곤을 보듬는 ‘치유‘ 기제가 된 것이다. 자족적·단편적·분절적인 에피소드식 활동의 연쇄 속에서,
사회적 관계의 부재에 따른 불안은 일시적으로만 봉합되었고, 만족의 유예는 학생들로 하여금 또 다른 에피소드, 혹은 더 나은 에피소드를 찾아 동분서주하게 했다. - P263

[한국] 남자들이 술 먹고 여자 만날 목적으로만 여기(선양 시타) 오는 경우가 허다하죠. 100만 원 들고 오면 민박집 돈 내고 술 마시고 다해결한단 거예요. 예전에 물가 쌀 때는 진짜 50만 원, 심지어10만 원만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진짜 별별 사람들이 다있어. 한 번 올 적마다 아가씨 서너 명 바꿔가며 돌아다니는 남자, 공항까지 갔다가 아가씨가 한 번 더 보자 해서 돌아온 남자,
실컷 아가씨랑 놀아놓고 그 돈 주기 아까워서 발뺌하는 남자, 깡패들한테 두들겨 맞을 거란 협박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돈 주는남자・・・・・・. 어떤 남자는 술 마실 돈이 모자라니까 내 사촌오빠한테 여권까지 맡기고 술집 갔어요. 그러다 우리가 여권 가로챘다고 도로 와서 난리를 치고 하여간 웃긴 한국 사람 많아요. - P283

메리필드(2015: 292)가 강조했듯, "지속하는 마주침이 일어나면그 어떤 것도 예전과 동일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생성의과정 속으로, 뭔가 다른 것이 되어가는 과정 속으로 쏘아 보낸다".
불평등이 만인의 언어가 되고 겹겹의 불안이 다수의 ‘피해자‘ 선언을 부추기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 폭우가 도시를 삼켰을 때 어떤 운전자는 물에 잠긴 승용차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어떤 인간은 반지하에서 속수무책으로 주검이 되고 만다. 서로 마주치고, 연결되고, 다른 불안을 들여다보려는 수고를 포기한 채 각자가 방공호를 파느라 분주한 시대에 인류학의 자리는 어디일까? 적어도 나는 사람들이 만드는 배치를 단순히 따라가기보다 함께 배치를 만들어가는 정치적·윤리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의 헛발질은감수해야겠지만.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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