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영화인 《리틀 포레스트》를 참 좋아라 하는데,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가끔 아무 음식이나 만들어 먹는 장면을 재생시켜 보곤 했다.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잘 먹는 장면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 같아. 해서 이번에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도 보러 갔는데, 수제비든 파스타든 만들어 먹는 장면이 다 너무 좋아서 그 자체로 '좋네' 하게 됐던 거다. 당연히 나도 막 뭐든 먹고싶어지고!
겨울에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김태리가 김칫국을 끓여 밥을 먹는 장면, 거기에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처음엔 오글거리는 거다. 오글거리는 대사나 행동이 나온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오글거려서 '으윽, 끝까지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끝으로 갈수록 좋아졌어.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친구랑 좋다고 얘기했는데 '그런데 처음엔 좀 오글거리더라' 했더니, 친구도 그러는거다. 처음엔 좀 오글거렸다고. 이 오글거림은 어디에서 온걸까? 사실 이 영화는 뭐랄까 좀...판타지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시골에서 여자 혼자 살면서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는데, 그 과정의 고단함이 전혀 없진 않을 터. 물론 이미 있던 집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생활해나갈까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판타지가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곶감을 만들고 꽃을 넣어 파스타를 만들고, 예쁘게 떡을 만들고 디저트를 만드는 걸 보면 또 세상 좋아.
특히 좋았던 장면은 술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먹는 장면과, 다슬기를 잡다가 도시락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김태리도 류준열도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상황이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연인과 헤어진 거다. 류준열은 왜 헤어졌나고 김태리에게 묻고, 김태리는 '안헤어졌는데?'라고 말한다. 김태리 역시 류준열에게 왜 여자친구랑 헤어졌냐고 말하는데, 류준열 역시 안헤어졌다고 하다가, 그러는 거다.
나는 여기있고 걔는 거기에 있는 거야.
그러자 김태리는 '와 너 쿨하다' 하는 거다. 이 때 류준열이 그런다.
"나 엄청 울었는데?" 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나, 걔 엄청 좋아했거든."
나는 진짜 이 장면이 너무 좋았는데, 자신이 아팠음을 알고 솔직히 인정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떤 남자들은, 그 특유의 허세로 '걔가 나를 더 많이 좋아했지' 라든가 '걔가 나를 좋아해서 만나줬지' 라는 식의 말을 하곤 하는데, '나 엄청 울었다'고 하는 건 그것과는 다른 태도이기 때문이다. 김태리의 남자친구도 '여자친구가 도시락 싸들고 와서 좋겠다' 는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에, '아냐 부담스러워' 하면서 으스대는데, '나 헤어지고나서 아파서 엄청 울었어'를 말하는 솔직한 태도는 너무 신선하게 느껴지는 거다. 내 감정이 어떤지 알고 들여다보는 거,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코스라고 생각한다. 저 장면에서의 류준열은 그걸 했다고 생각하고. 그게 너무 좋은 거다. 최근에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아마도 티븨였던것 같은데, 사랑을 잃고나면 성숙해지기 마련이라고. 이 말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모두에게 적용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잃고 한걸음 더 나아가고 성숙해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전의 사랑과 이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상 사랑이 끝나는 것이 상대방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한다. 아픈만큼 성숙한다고 했을 때, 물론 아프지 않는 게 더 좋지만,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별의
고통은 우리의 일상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우리를 무의식적 충동이 담긴 어두운 지하 창고로 끌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얻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사랑의 실패는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어떻게 나아가기를
원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인생을 새로이 설계하게 만들죠. 인생 설계를 재조정하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실연만 한
것은 없습니다. 상실로 인한 번민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적극 참여하게 만들죠. (p.194)
나는 나의 지난 사랑과 이별들이 나를 이만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들에서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이별을 또 겪고 싶지는 않다. 이별의 고통을 또 감당하고 싶진 않아. 이별의 고통은, 상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따라서,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별은 아프지만, 어떤 이별은 특히 더 아프니까. 이별 후에 어떻게 쿨할 수가 있나. 그건 쿨한 척 하거나, 아니면 아프지 않을만큼만 사랑한거겠지.
'좀 판타지 같지 않아?'라고 친구에게 말해놓고서는, 그런 영화를 보면서도 좀 울었다. 나이들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아. 이건 뭐 어떻게가 안되네. 대체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왜 울어... 봄이 얼마나 예쁜지, 여름의 땀이 얼마나 좋은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인데.
영화 보고 나니까 봄과 여름이 더 기다려졌다. 일자산 나무들의 색이 초록으로 짙어지겠네, 아카시아 향도 나겠지, 모든 것들이 얼마나 생동감이 넘칠까, 싶어서 봄과 여름이 기다려졌다.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저녁으로는 쫄면과 오일파스타를 먹고 싶은데, 어느 걸 선택해야 할까....
그리고,
지혜로운 당신은,
당신 인생을 더 행복한 방향으로 재조정 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