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토요일엔 <북까페 두잉>해서 하는 윤김지영 쌤 페미니즘 강연에 다녀왔다. 강연 제목은 <페미니즘 감별사의 탄생>이었다.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인물에 대한 얘기로 시작했지만, 끝은 예상하지 못했던 래디컬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강의는 쌤의 다른 강의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좋았는데, 어제는 특히 좋아서 마지막엔 울컥 했다. 오길 잘했다고 스스로 한 백번쯤 칭찬했다.


쌤은 래디컬 페미니들이 주장하는 '비혼, 비출산, 이성과의 연애(혹은 사랑)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유의미한지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 의미있는 전략이고 또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그것을 극단적이라고 비난하는 게 아니라,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에 대한 유의미함이라 는 말이 너무 좋았는데, 지난해 우리가 평화적인 촛불 시위를 할 때 한 알라디너가 차벽을 넘어서 진행하는 과격한 시위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고 썼던 글이 생각났다. 격렬하게 돌진하는 것, 적극적으로 돌진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물론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없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만,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게 싸울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최전방에서 싸우지 않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최전방에 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너무 느리게 오는 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 속도가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하고, 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래디컬이 아니다, 라거나 혹은 페미가 아니다, 라고 할 순 없다는 거다. 이 말은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나 역시 래디컬을 지향하지만 아직 그들의 속도를 다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계속 해서 래디컬이라면 지금의 나보다 뭔가 더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어떤 마음의 짐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혼과 비출산을 전략으로 내세운 것에 동의하고, 그 뜻을 충분히 짐작한다. 그러나 이성과 사랑 혹은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것이 될 지 잘 모르겠는 거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그 사랑에서 오는 행복이 분명히 있는데, 그러면 나는 너무 느리게 가기 때문에 뒤로 쳐지고 래디컬의 힘을 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페미니스트로 가는 과정, 그리고 래디컬로 가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내적 갈등을 겪는다. 많이 혼란스럽고 또 그 과정에서 여러차례 생각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나만해도 지금은 성노동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굳힐 수 있게 되었지만, 몇 년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물론 회의도 든다. 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세상이 될까, 어떤 방향이 더 나은 걸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적 갈등을 겪고 그러다가 전투력을 상실하기도 하고 의욕이 꺾이며 지치기도 하지만, 또다시 힘을 내자고 서로에게 기운을 주기도 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내부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격려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한남들은 그냥 계속 한남들이기 때문이다. 성추행과 성폭행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있는 일은 여전히 빈번하게 계속 쭉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어떻게 일조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자꾸 더 빨리, 더 세게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다음 읽을 책으로 대기중인 '쉴라 제프리스'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는 책의 서문에는,


'1977년에 나는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버리고 레즈비언이 되기로 하는 정치적 결정을 내렸습니다(p.4)' 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 역시 긴 시간 레즈비언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의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결정한다고 해서 그렇게 실행될 수 있는 것 역시, 모두에게 다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엔 나는 한 남자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것이다.



쌤은 국어사전에서 '래디컬'을 찾아봤더니 '속도가 빠른' 이라고 나왔는데, 그것은 래디컬에 대한 오해라고 했다. '래디컬'은 라틴어 '하디클리스'에서 온 단어이며, 발본적인, 뿌리와 근간에 해당하는 뜻이라고 했다. 뿌리와 근간을 흔들어야 하는 것이 래디컬이므로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그러므로 래디컬은 속도전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의 속도가 다른것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함께 오래 갈 생각을 해야 한다고. 사실 이렇게 적고는 있지만, 내가 그 의미를 다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고 받아 적고 있는지는 확신이 없다. 쌤의 강의에 대해 뭔가 어떤 오해가 생긴다면 그건 철저히 후기를 적는 나의 잘못이다.



강의가 끝나는데 진짜 너무 위로가 되고 힘을 받아서, 물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라는 자기질문까지 하게 되면서, 너무 좋아서 울컥 눈물이 났고, 이 강의가 좋았다는 걸 쌤께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었다. 쌤의 책을 들고 싸인을 받는 사람의 뒤에 서서 내 차례가 되자, '싸인은 지난번에 받았고요, 선생님 강의 정말 좋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다.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강의를 들었는데, 쌤의 말씀과 또 그 자리에서 래디컬을 지향한다고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힘이 되었다.


한 사십명쯤 되는 강의였던 것 같은데, 그 안에는 나를 포함해 내 친구들이 여섯명이었다. 모두 알라디너들이다. 하하하. 우리는 강의가 끝난 후에 서로의 입장에서 이 강의가 어떻게 들렸는지 후기를 나누었다. 좋았다, 어려웠다, 전투력을 상실했다 부터 시작해서 다른 페미니즘 관련 이슈들과 강의들에 대한 얘기까지 이어지고, 또 스스로 겪는 내적갈등에 대해서도 얘기하게 됐다. 문학을 더이상 이전처럼 사랑할 수 없는 일, 기혼으로서 겪는 불합리합과 그러나 찾아오기도 하는 행복, 이성애를 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역시나 거기에서 오는 충만함까지.  또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마지막 패리시 부인]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윤택의 성폭행 사건에서 나타나는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에 대해 패리시부인이 연상됐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찝찝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건, 우리가 이 강의를 다함께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계속 감각을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자꾸만 세상을 보고 거기에 관여하는 것,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나누는 것. 각자의 경험과 내적 갈등에 대한 걸 끊임없이 교환하는 것. 이 모두가 감각을 유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모두 필요할 것이다. 멈추지 말아야지. 지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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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8-02-25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 다락방님은 또 한번 나룰 자극해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책을 읽고, 관여하고, 이야기와 의견을 나누고 교환합시다. 지치지말아요 우리!!!!!

다락방 2018-02-26 08:55   좋아요 0 | URL
스윗듀님, 우리는 자극 또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또 받읍시다. 계속해서 자극을 주고받는다면 계속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아무개 2018-02-25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
작은 접점만 있어도 언제나 비판적 연대는 가능하다.
라고 저는 정리했어요.
강의시간이 너무 늦어서 아쉬운것 빼고는
정말 좋은 시간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네요^^

다락방 2018-02-26 08:55   좋아요 0 | URL
내가 이대로 좋은가, 내가 잘 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고 있는데, 이렇게 듣게 되는 강의는 괜찮다고, 가던 길을 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너무 좋아요.
강의시간이 너무 늦은 건 정말 너무 아쉽고 ㅠㅠ 그것만 아니었다면 저도 다 좋았어요.
아니, 덕분에 ㅠㅠ 막차타고 가지 않았습니까. 흙흙 ㅜㅜㅜ

비연 2018-02-26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게 있었군요. 알았으면 갔을텐데... 아쉽습니다...

다락방 2018-02-26 08:56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비연님.
공부한다는 것도 좋지만 강연공간에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같이 앉아 듣고 있다는 것도 되게 힘이 되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