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며칠 '과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는 무엇일까. 오늘은 한 알라디너의 《나니아 연대기》를 아이와 함께 읽는다는 페이퍼를 보았는데, 나니아 연대기로 말하자면 나에게는 대표적인 과거 아이템이다. 나의 과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과거. 그러니까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에서 함께 걷던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내가 어릴 때 나니아연대기를 읽었다면 더 좋았을거야' 라는 얘길 하는 거다. 나는 그 책을 읽다가 '대체 나니아 연대기가 어떻길래?' 하고 당시에 합본으로 나온 두꺼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완독하지 못하고 팔아버렸다. 내가 어릴 때 읽었으면 다 읽었을까? 그리고 뭔가 달라졌을까?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등장인물의 그 말은 내내 떠올린다. 나 역시 내가 어릴 적에 전시회에 다녔었더라면 어땠을까에 대해 생각하니까. 그림을 보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들이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이어졌더라면, 지금쯤 나는 힘들 때 그림을 보며 위로 받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내가 여행을 다니는 아이었다면? 그러니까 부모님이 휴가때면 계곡으로 데려가긴 했었지만, 그게 아니라 며칠을 자고 오는 그런 여행을 했었다면, 나는 여행의 재미를 일찍부터 깨닫는 사람이 되었을까? 역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 '김신영'이 나온 <영수증>을 보았다. 나는 이 프로를 텔레비젼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딱히 내가 볼 것 같진 않지만, 김신영이 나온다길래 봤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웃긴 사람이 김신영인것 같아서. 뭐만 해도 빵빵 터뜨리기 때문에 김신영이라면 보겠다!! 하고 보게 된거다. 작년에 말레이시아에 가서 하룻밤을 혼자 자야 했는데, 나는 좋은 호텔에 묵었고 그래서 룸이 엄청 넓었다. 혼자 묵게 되는 밤에 그 넓은 방에 있는 수납장이 무섭게 느껴지는 거다. 저길 열면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지고, 그냥 열어서 확인하면 오히려 속이 편해질텐데, '그냥 열기'를 도무지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텔레비젼도 틀어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했지만 도무지 무서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아아 나는 어쩌지, 어차피 잠도 못잔다면 뭐라도 해서 이 시간을 잘 넘겨야 할텐데, 할 때, 김신영 생각이 난거다. 그래서 유튭을 틀고 김신영을 검색해서 그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기억이 있던 터다. 그러니까 김신영은 봐야해!!



영수증 속 김신영은 여전히 재미있었는데, 또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셀럽파이브를 결성하기 전에 일본까지 찾아가는 그 열정, 게다가 그 열정을(춤추는 고등학생들을 향한!!) 송은이에게도 그대로 전달하는 거다. 그 열정이 얼마나 좋아 보였으면 거기에 동화되어 함께 일본으로 떠날까. 게다가 당일치기였어. 나는 김신영의 그 열정을 보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까지 동화시키고, 결국 그렇게 셀럽파이브로 데뷔하게 되어서, 저 사람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너무 좋았던 거다. 나는 그렇게 뭔가 원하는 바가 있고, 에너지를 쏟고, 결국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에 대해 무한 존경을 보내는 거다. 그런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거다. 아, 다른 얘기로 샐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 김신영이 관리비를 많이 내고 피규어랑 신발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더라.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돈을 지불하기를 마다하지 않지만, 김신영은 그것이 자신의 어릴 적 가난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독한 더위와 지독한 추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어린 시절, 그 시절 때문에 자기는 따뜻하게 지내고 싶고 시원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고. 



김신영이 벌어서 김신영이 즐기고 김신영이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영수증이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내 집 마련'을 하고 싶다고 의뢰한 것이니, 김생민은 솔루션을 제시해야 하고, 나를 포함에 다른 엠시들이 김신영의 그 가난하고 아팠던 과거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때, 김생민은 그 가난이 불러왔던 지금의 소비패턴을 이해하지만, 계속 과거에 붙들린 채로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고 하는 거다. 나는 그게 너무 인상 깊었다. 너무 인상 깊은 말이라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과거에 붙들린 채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 과거가 나를 너무 붙들어서 외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자꾸 과거를 소환해내는가, 하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과거를 소환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만 붙들려 있는 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게 되는 거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었던 과거를 어쩔 수가 없다. 시간을 되돌려 수정할 수 있다면 수정하고 싶은 과거가 여럿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그 과거가 분명히 나에게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나의 지금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락스칠까지 하고 싶은 과거들이 있다. 그 일이 내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는걸.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제일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밤의 피크닉 속 등장인물이 '내가 어릴 때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다면 좋았을거야' 라고 말한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똑같은 크기로, '그러나 어릴 때 읽었다면 달라졌을까?'를 의심하기도 한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면, 나는 그 책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러나 오히려 편견 속에서만 판단하고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도 다르게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거다. 그러니 어쩌면 모든 것은 타이밍일 것이다. 내가 나니아 연대기를 만나야 했던 때,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야 했던 때는, 내가 만난 바로 그 때였던 거다. 



나니아 연대기와 김신영에 대해서까지 이 과거라는 것에 대해 내가 생각하게 된 건, 사실 이 책 때문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저자의 말>이 나오는데, 그 저자의 말은 '이 회고록을 쓴 이유' 이기도 하다. 거기에 이런 부분이 있다.



어느 날 벽장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상자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제2차 세게대전 때, 군 복무 중인 아버지가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 편지들이 그때의 기억들을 되살릴 열쇠가 되어 주었으면 싶었다. 워낙 어머니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 탓에 내 기억이 뒤죽박죽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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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그 편지 상자가 요술 램프였더 모양이다. 램프 속 요정 지니가 내게 영감을 불어넣어, 내 예술을 위한 가장 강력한 연료는 바로 내 과거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셈이니. -책 속, 저자의 말 中




그래, 바로 저 한 문장 때문이었다. 


'내 예술을 위한 가장 강력한 연료는 바로 내 과거라는 사실' 이라는 문장.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 계속해서 이 문장을 떠올렸다. 아, 너무 좋다! 좋고, 그리고 옳다. 옳다는 건 적절한 표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내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많은 영감들이 다 나의 과거로부터 오는 게 아닌가. 어떤 것들은 과거라 불리고 어떤 것들은 추억이라 불릴 테지만, 나 역시 과거를 나의 가장 강력한 연료로 쓰고 있었던 거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추억만 되새기면서 평생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해왔는데, 내 안에 꽉꽉 차있는 과거 혹은 추억에 대한 일들과-대단치 않았는데도!- 감정들이 계속해서 나를 글쓰게 하는 거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어서, 다른 것들과 합쳐져야 타오르는 거다. 읽는 책이,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가, 듣고 있는 음악이, 보고 있는 영화가.. 이 모든 것들이 내 과거라는 연료에 불을 지피는 거다. 그러면 글로 타오르는 거지. '제임스 맥멀런'의 이 짧은 회고록 한 권이, 나로하여금 나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또 과거란 건 무엇인가 연속해 생각하게 하고, 이걸 생각하다보니 모든 것들이 다 '과거'를 중점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 거다. 만약 이 책을 읽기 전이었다면 내가 김신영이 출연한 영수증을 보면서 과거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을까, 나니아 연대기를 말한 밤의 피크닉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들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하고, 화두를 과거로 맞추게 된 건, 제임스 맥멀런의 회고록이었던 거다. 



아, 여러분. 책 너무나 좋지 않습니까!!!!!!!!!!!!!!!!!!!! (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물론 이 책은 단순히 저 한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특성들을 갖고 있다. 그는 부모님이 바란 것과 다르게 자랐던 자신에 대해 얘기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을 보면서 푹 빠져들었던 자신의 어떤 특수한 감정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내가 무언가에 빠지고 그걸 생각하게 되는 것,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의 재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 이런 것들이 진짜 너무 좋은 거다.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고 있지만, 길어진 김에 긴 걸로 일등 먹어보자.



그 집주인이 테라스에 나와, 이젤 앞에 서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너무나 정상적이고 사실상 평온하게 캔버스에 붓질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 작업하고 있는 화가를 난생처음 본 나는 그 모습에 사로잡혀 버렸다. 친구들은 대뜸 집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남아서 이상하리만큼 신비해 보이는 그 단순한 작업을 지켜보았다. (p.72)




그러니까 이런 것들.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던 풍경에 대해, 제임스 맥멀런은 그 자리에 남아 지켜보는 거다. 앞서 김신영을 언급했는데, 그 고교생들의 춤추는 영상은 나도 이미 트윗으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영상은 그냥 보고 넘긴 장면이었을 뿐, 그 뒤로 내게 남아있지 않았던 거다. 그러나 김신영에게는 어마어마한 영감을 줬고, 열정을 불러일으켜서, 일본까지 가게 하고 결국 데뷔하게 만들지 않나. 이런 거 진짜 너무 좋은 거다. 난 나를 비롯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무언가에 흥미를 갖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행동하게 되는 그 과정을 가지는 게 너무 좋다. 그런 사람들 보면 정말이지 한껏 응원하고 싶어지는 거다. 너무 멋지지 않나!!




어린 시절에 내가 보인 소심함은 셰퍼드에게 물린 사건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남자애로 태어난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내가 약골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걱정거리였고 대단한 실망거리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했던 내 삶의 이야기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차츰차츰 깨닫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자다운 삶이라고 여기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찾아가는 소심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p.10)



이 책을 읽으려고 시작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문장이 이렇다. 벌써부터 사랑하게 되는걸. 어린 제임스 맥멀런에게 아버지는 남자답게 자라라고 하는데, 아무리 운동을 시켜도 제임스 맥멀런은 운동을 못하고 하기도 싫고 두렵기만 한거다. 일전에 한 번 배웠다 중도에 그만둔 권투를 또 배우게 되는데, 다른 아이들과 대결을 한 후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는 거다.



"우리 산책 좀 하자, 지미."

학교 운동장을 나란히 걸으면서 라이언 선생님이 물었다. 놀랍도록 다정한 목소리였다.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지미?"

"네." 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이언 선생님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 말했다. "음, 내가 어머니께 너한테는 이 수업이 맞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마. 그건 그렇고, 넌 좋아하는 게 뭐야?"

"저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아요, 선생님."

"그러면," 라이언 선생님이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지미는 권투선수가 아니라 화가가 돼야지."

그 다정한 행동이 내 눈물의 수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교문까지 걸어가면서 소리 없이 줄줄 눈물을 흘렸다. 인사를 하고 헤어질 때까지 라이언 선생님은 내 어깨에서 손을 내리지 않았다. (p.112)




지미가 어린 시절 저토록 다정한 권투선생님을 만나서 지금은 화가가 되고 이렇게 회고록을 낼 수 있었을까? 만약 다른 권투 선생님이었다면, 만약 '사내새끼가 왜그렇게 약해!' 하고 윽박지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지미는 화가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있었을까? 이것 역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인생의 그 시기에 저 선생님을 만나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선생님은 분명 지금까지의 제임스 맥멀런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나는 이토록이나 나약하고 소심하다고 자꾸 주눅들게 되는건, 주변에서 마치 그게 잘못인 것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그 어린 시절에, 그 과거에 이 선생님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니 성인이 되어 '그 때 그 선생님을 만난 게 정말 행운이었지'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좋았다. 좋은 시간이었고 또 좋은 시간이 지금 흘러간다.

과거라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고 그래서 과거라는 걸 중심에 둔 채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책 한 권이 가져온 일이다. 




나는 여전히 불태워버리고 싶은 나의 과거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계속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을 돌린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게될까를 스스로에게 물으면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 거다. 만약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아마 또 공부하기를 싫어했을 것이고 학교 다니기를 싫어했을 것이고, 그렇게 소설책을 보고 노래만 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빈둥거리며 술만 마셨을 것이고, 또 만약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내 인생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그 남자를 다시 사귀었을 것이고.. 어휴... 이미 지나온 게 어쩌면 다행일런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공부좀 열심히 할 걸, 이라고 후회해봤자 그 시절이 되면 안할거야.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공부의 중요성을 알지. 내 인생의 이 타이밍에 공부가 재미있고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거라면, 어차피 시간을 돌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만약 그 때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그 젊은 시절에 그 남자를 사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에게 치명적인 과거가 생기진 않았겠지만, 어쩌면 나는 유약한 어느 남자와 벌써 결혼한 채로 힘들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남자와 그런 연애를 해봤기 때문에, 그 다음의 내 연애는 확 더 좋아질 수 있었고. 내가 당신을 과거에 만났다면 그건 그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내가 당신을 현재에 만났다면 역시 그건 그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랬다면 나는 지금에 와서 당신과 인연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그때 만났던 것, 그리고 지금 만나는 것, 이 모두가 다 그대로의 의미를 가진 것일 거다. 


늘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시간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놓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지금 이 시간이 현재이지만 바로 과거가 되는 것처럼, 이 과거를 나중에 떠올리면서 그때 이랬다면 혹은 그러지 않았다면, 하게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더 묻게 됐다. '지금 이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까?' 라고. 이건 후회한 적 있던 나의 과거가 내게 준 선물이다.




아침에 엄마가 동태찌개를 끓여줬는데 완전 살이 실한 동태를 한덩어리 줘서 행복이 넘쳐흘렀다. 엄청 흡입했지. 엄마 사랑해. 엄마도 날 사랑해... 

그런데 또 배고프다.

고디바 쵸콜렛은 아까 먹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넓은 운동장에 나가서 보건 체조를 했다. 나는 보건 체조가 좋았다. 물구나무서기 같은 동작도 없었고, 체조를 하면서 매우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운동장은 산허리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런 까다락에 운동장 한쪽 가장자리는 곧장 아래쪽 골짜기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었다. 운동장 맞은편 경치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곧장 칸첸중가 산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듬성듬성 솟은 작은 봉우리들밖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근처에 있는 히말라야 산에까지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따금 산봉우리가 유난히 찬란한 아침노을을 받아 샛노랗고 발갛게 빛날 때면 나는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나머지 팔 벌려 뛰기를 하는 다른 아이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 앞으로 불려 나갔다. (p.96)

아뿔싸, 알고 보니 내 그림 솜씨는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한 달 뒤 워먼은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부러진 팔이 다 나아서 학교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같은 축구부원으로서 물론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예전 친구랑 다시 단짜긍로 지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이 세계에서, 나는 정신적 소유권을 가질 의욕을 조금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남자애들 틈에서 친한 친구를 바꿔 가면서 그럭저럭 지냈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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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8-01-2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았다.좋은 시간이었고 지금도 좋은 시간이 흘러간다. . 이 문장 아 참 좋아요 좋아서 필사 함 해 보았어요♥랩걸에도 인간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나아간다. . 라는 멋있는 말이 있었어요 어떤 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본능적으로 가게 된데요^^

다락방 2018-01-26 10:21   좋아요 1 | URL
클래비스님,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결국 제가 지금 사는 삶은 제가 원했던 삶인거죠. 저도 원하는 바가 있다면 사람은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삶과 아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니어도, 근사치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한 이유겠죠. 헤헷.
원하는 게 있다면 그 방향을 향해 우리 뚜벅뚜벅 나아갑시다!

transient-guest 2018-01-2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의 완숙함을 갖고 다시 20대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자나 남자나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그 이유랄까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후회되는 과거의 일이 몇 개는 있어요. 근데 나머지는 후회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다른 좋은 계기가 되었거나 더 나쁜 일을 피한 경우가 많아서 사실 50-50입니다. 과거를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있을까요?

김생민의 영수증은 이미 배워야할 철학을 처음 몇 주간의 방송에서 다 봤고 지금은 계속 반복이라서 안 봅니다. 일단 절실함을 전제로 하지만,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할 때, 김생민씨의 approach는 좀 무리가 있어요. 다만 그 정신에서 정말 필요하지 않은 소비를 줄이거나 다시 한번 고민하는 등 도움되는 면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미 그 프로그램을 보면 피로감이 높더라구요..-_-:

그나저나 너무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시사잡지, 거기에 Moonlight이 전면에 떡..ㅎㅎ 잘 볼게요...

다락방 2018-01-26 10:24   좋아요 1 | URL
아, 트랜님 맞아요.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해요. 지금의 완숙함을 가지고 시간을 돌린다면 저는 공부도 더 열심히 할테고 그 남자를 선택하지 않을테고...그렇지만 시간여행이 아니라 단순히 시간을 돌리는 거라면, 과거의 저는 그런 선택을 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겠죠. 그때는 그 나름으로 잘한 줄 알지 않았을까요... 공부 안한 게 제일 후회가 돼요 ㅠㅠ

김생민 영수증은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더이상 듣지도 보지도 않고, 몇 번 들은 걸로 재미는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역시 그 와중에 도움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저는 절실함을 가진 사람이 원했으므로 김생민이 솔루션을 내주는 것에 대해서는 응 그렇구나 하긴 하지만, 제가 그런 삶을 살 순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비요정.... 음..요정은 아니구나. 어쨌든. 김생민의 추천삶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그냥 패쓰하는데, 간혹 그런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저보다 더 적게 버는데 저보다 더 저축 많이 하는 사람, 그리고 노동은 중요하다, 뭐 이런 얘기들. 그러면 그런 말들은 순간순간 저를 자극하기는 해요. 위로도 받고요.


사실 저는 그 표지 때문에 보낸 게 아니라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책읽기 부록 때문에 보낸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