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그걸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최근에 자주 생각했다. [제2의성] 1권을 다 읽었다고 했더니 책을 좋아하는 친구 몇이 축하한다며 알은 척을 해주는 것도 좋았고, 이 책을 읽는 중이라고 했더니 여기에선 임현과 강화길이 좋았어, 라고 또다른 책을 읽는 트친(이자 알라딘 친구)도 말을 걸어온 거다. 여러 작가의 작품집을 놓고서 나는 누가 좋았는데 너는 누가 좋았구나,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 너무 좋다. 책 친구들 정말 좋네, 내 주변에 책 읽는 사람들이 많아서 참 좋아, 했다. '내 주변엔 책 읽는 사람들이 없어서 책에 대해 이야기나눌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여럿 있는데, 나는 어떻게 어떻게 살다보니, 이제 책을 좋아하는, 계속 끊임없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주변에 남겨놓게 됐다. 금요일 퇴근 무렵에도 한 친구가 자신이 읽은 책을 내게 추천하며, 이거 너무 재미있어 읽어봐, 하더라.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읽어보라 추천해주는 거,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아 난 그거 그 부분이 좋아' 라고 해주는 거, 이미 읽은 책에 대해서 '나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거, 그게 너무 좋아서 나는 이렇게 계속 알라딘에 있는가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알라딘에 있겠구나, 생각도 했다.
이 책, [2017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도, 다정한 나의 책벗이 읽어보라 말해 읽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임현'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지, 읽고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며 읽어보라 권했다. 사실 어느 해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서는, 다른 친구들과 '이제 더이상 이 작품집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얘길 했던 터라, 그 후에 다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는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다정한 책벗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니, 내가 거부할 수가 없었지.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이 작품집을 읽게 됐다.
그러나 친구가 나와 얘기하고 싶어한, 그러니까 나로부터 많은 얘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한 '임현'의 작품 <고두>를 읽고서는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그냥 .. 글쎄, 이게 왜 상을 받은건지 모르겠다고,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서도 '모르겠네' 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편에 실린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을 읽고서는 '아, 역시 이 작품집은 안읽겠다고 했던 내 결심대로 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내가 이 책을 읽은 걸 후회했다. 그건, 이 작품이 엉망이라거나 못써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나의 상황 때문에 그랬다. 나라는 인간. 그러니까 나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읽으면 그냥 넘길 수도 있었을 작품이겠지만, 나처럼 괴롭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너무 힘들어서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고 숨이 막혀왔다. 작품 내내 너무 긴장을 해서 쉬고 싶었다. 쉬고 싶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아 그만두고 싶다, 쉬고 싶다..한거다. 이건, 남자들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감상이란 생각도 했다. 내가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내가 소설을 읽을 때 이렇게 읽으면 안되는데, 내가 너무 소설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니, 모든 소설에 다 그렇진 않았다. 어떤 소설에 유독, 그러니까 그건 작가가 그렇게 한 거겠지만, 나를 던져버려서, 그 안에서 그냥 내가 살아버려서, 이런 상황의 소설에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소설이 끝나기까지 고통스러워지는 거다. 스포일을 할 순 없으니까 대략 짧게만 얘기하자면,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에는, 어릴 적에 친삼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가 훌쩎 나이들어 자신의 딸이 8살에 성조숙증 진단을 받고 거기에 온갖 신경을 쓰는, 결국 정신과까지 가서 약을 받아먹어야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게다가 그 삼촌의 중학생 아들이 얼마간 함께 하게 되면서 8살 딸과 함께 있는 걸 보는동안 신경줄이 타들어가는 그런 .. 아 .. 진짜 졸라 힘들어 ㅠㅠ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어. 소설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던 거다. 그냥 던져버릴 걸 읽지말고 ㅠㅠ
그 뒤의 최은영과 강화길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 뒤의 작품들도 다 최은미 작품 같은 분위기일까봐 쉽게 다음으로 넘어가지질 않았다. 그렇게 읽기를 멈춘 채로 나는 오늘 혼자 일자산에 갔다. 따뜻한 목폴라를 입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털모자를 눌러쓰고, 이소라와 심규선의 노래를 들으면서, 천천히, 일자산의 정상을 향했다. 정상에 오르면 앉을 수 있는 벤치며 나무가 있는데, 보통 정상에 도착해서는 바로 다시 내려오곤 했다. 나는 운동이 목적이지 쉬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나무벤치에 앉아서, 사람도 별로 없는 터라, 가만히, 나무들이며 하늘을 바라보고, 계속해서 노래를 들었다. 이소라가 다시 부른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를 반복해 들었고, '심규선'의 <오늘>을 반복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앉아서 그냥 내 앞에 펼쳐진 풍경들만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고, 날은 찼고, 그런데 해는 눈이 부시고, 하늘은 파랬다. 얼마만큼을 앉아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있다가 천천히 다시 산을 내려왔다. 노래는 계속 흘렀고, 가만히 앉아있던 고요한 시간이 참 좋았노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수수 기억들이 쏟아졌다. 와르르 무너지듯, 좋았던 기억들이 차고 넘쳤다. 그렇게 혼자 웃었다. 아, 그 때도 좋았지, 그래, 그 때도 좋았어. 그렇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좋은 기억들에 계속해서 혼자 웃었다. 누가 본다면 혼자 웃는다고 미쳤다고 하겠네, 라는 생각도 그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렇게 좋았던 기억들 때문에 웃다가, 왈칵 눈물이 났다. 왜 좋았던 기억들이 눈물을 불러낼까. 추웠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다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혼자 산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냈던 좀 전의 분위기와, 좋았던 기억들과, 그러다 눈물을 불러낸 순간까지, 이 책들 속에서 다 만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엮이기 시작했다.
'김금희'의 <문상>에서 '송'은 희극배우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찾아갔다가 자신이 일전에 사귀었던 '양주임'의 소식을 듣게 된다. 헤어진 지 일 년이 되었는데, 송은 희극배우로부터 양주임이 '이민을 간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송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양주임에 대해 희극배우가 알고 있다는 것에도 분노했고, 게다가 이민까지 간다니, 이게 뭐야, 하다가 그는 집으로 돌아가며 양주임에게 전화를 건다. 몇 번이나 받지 않던 양주임은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송은 '너 이민가니?'라고 차마 묻지도 못한 채로 그 소식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를 고심하는데, 그때 양주임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래, 연극은 잘되어가고?"
기차가 역에 섰을 때 송은 여기를 떠나느냐는 질문을 그렇게 바꿔 물었다. 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송은 내려올 때처럼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밖을 보았다. 가락국수 부스는 셔터가 내려지고 간판의 불도 꺼져 있었다. 마치 상자를 봉하듯 완전히 봉합되어 있었다.
"걱정이야, 마지막 장면에서 독창을 해야 하거든. 어디 이민이라도 가야지 싶다니까."
양은 수백 명의 시선이 오직 자기에게만 꽂힐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자꾸 울고 싶어진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는 양의 목소리가 담담하고 심드렁해서 그때서야 송은 희극배우가 농담을 잘못 전했음을 깨달았다. (문상, p.115-116)
어차피 헤어진 사이이고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이이지만, 그러나 이민을 간다는 것은 더 멀어진다는 것 같아 좀 서러웠다. 송보다 괜히 내가 더 서러웠다. 이민을 가든 안가든, 안보는 사이인데. 그러니 이민을 안가든 무슨 상관이람. 그런데 그게 또 그게 아니잖아. 네가 너이고 내가 나인 이상, 우리가 우리'였던' 때가 있어서, 그냥, '으응, 사람1이 멀리 가는 구나'가 잘 안되잖아. 그렇지만 내가 그걸 너한테 물을 수는 없지. 너 혹시 이민 가니? 라고.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렇지만 너가 이민간다면.... 묻지 못하는 사이, 송은 그것이 농담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정말 이민을 간다는 게 아니라, 이민이라도 가고 싶을 정도로 떨린다는 말. 나는 갑자기, 좋았다. 서러움이 사라져버렸어. 물론 우리는 지금 그랬던 것처럼 헤어진 연인이라, 다시 만나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민을 가는 건 아니래. 아 뭔가 마음이 너무 이상하다. 나는 양이 이민을 가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이민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송하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나는 그냥 좋았던 거다. 그래도, 이 하늘 아래에 있으면, 우리가 스쳐가며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찌질한 생각을 해보다가, 아니야, 상대는 나랑 스치듯 안녕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 라는 생각도 하다가, 지방으로 놀러갔다 돌아온 내게, 언젠가 데이트 하던 남자가 '우리 이제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거네' 라고 했던, 조금은 낭만적인 기억까지 불쑥 떠올랐다.
그리고 '백수린'. 백수린의 이름을 보고서는, 아 [폴링 인 폴] 아닌가, 했다. 그 책 사두었는데, 그 책 내 책장에 꽂혀 있는데, 하고. 사두고 안읽었으니 나는 백수린을 이 책으로 처음 만나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작품집을 몇 권 읽었던 내가 그 전에 만났을런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왜곡되고 나는 많은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백수린'은 <고요한 사건>에서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린다. 재개발 지역에서 살던 일, 재개발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싸우던 일, 그 속에서 혼자 고고하던 것, 그런 자기를 친구로 받아들여주었던 그 동네의 토박이 친구들. 그리고 다른 진학으로 조금 멀어진 친구들과, 그 동네에 유독 많았던 길고양이들. 길고양이를 돌보던 아저씨가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걸 보고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도와달라 말하는데, 아버지는 그저 들어가 쉬라고만 말한다. 거기에 실망했던 것. 집으로 뛰어오는 길에 보았던 길고양이의 죽음. 내내 방안에 있다가 그 고양이를 묻어주겠다고,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이건 묻어줘야 겠다고, 그렇게 아빠와 엄마 몰래 깊은 밤에 혼자 조용히 몸을 움직이는데, 아직 고양이 시체가 거기 있는가 하고 유리창에 이마를 가만히 대었는데,
"세상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버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눈. 자국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았던 눈송이. 그토록 숨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고요한 사건, p.155)
삶은 결코 단편적이지 않고 단순하지도 않아서, 폭력을 보고 들어왔고, 고양이의 죽음을 보았고, 아버지에게 실망했고, 무기력한 기분으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밤에 결정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다. 우리가 어떻게 그 장면에 있어서,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 방금전까지 너의 기분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떠올려봐, 그런데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라고 물을 수 있을까. 삶은 이런 것이라니까. 초라하고 처참하고 비극으로 물든 것 같았다가 갑자기 찬란해지는 것. 혹은 그 역이 성립되는 것.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가만히 대고, 그 처참한 기분 속에서 아름다운 장면을 맞닥뜨린 이 순간에, 내가 일자산 정상에 있었던 몇시간 전이 떠올랐다. 그 때의 내가 지금 이 책속의 결정적인 장면과 겹치는 것 같았다. 생을 통틀어 몇 개 되지 않을 슬픈 일을 안고, 그렇게 고요히 산의 서늘함을 즐겼던 것. 날이 추운데도 햇빛은 눈이 부셨던 것. 오늘의 고요한 내가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을 읽은 거다. 삶이 책 속으로 들어가고 책이 삶 속으로 들어오는 구나. 그래, 내려가는 길도 그랬다. 그 고요함을 한참 가만히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가 산을 내려가는 길. 기쁜 일들, 좋았던 일들이 밀려들었다가 종국에 눈물이 났던 일. 삶이 이런 식으로 희극과 비극을 왔다갔다 하는 것.
그렇게 최은영까지 왔다. '최은영'의 <그 여름>. 여름이란 단어 앞에 언제나 설레이는데 '그 여름' 이라고 하면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 그 여름이라고 했을까. 그 가을이나 그 겨울, 혹은 그 봄이라고 하지. 왜 하필 그 여름이란 말인가.
이런 우연이 아니었다면 서로 얼굴도 모르고 지냈으리라고 수이는 웃으며 말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이경은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이경의 귓가에는 수이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 여름, p.216)
그 여름, '이경'과 '수이'는 연애를 시작했다. 열여덟이었다. 열여덟. 자신의 성정체성을 수이를 만난 후에야 알게된 이경은 수이에게 빠져들고,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이는 취업하고 이경은 대학생이 되면서 그들은 서울로 가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런 이경은 사는 모습이 다른 수이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면서 그런 스스로에게 당황하게 되고, 그러면서 '은지'라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속절없이 끌리게 된다. 나에겐 애인이 있는데, 수이라는 애인이 있는데, 그런데 은지에게 너무 끌리고 너무 은지 생각이 나고 은지를 기다리게 된다. 은지를 기다리는 자신이 미워서, 야속해서, 수이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이경은 앓는다.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다. 수이가 옆에 있는데 다른 사람을 꿈꾸는 자신이 욕심이 많은 것 같아서 미칠 것만 같다. 자신이 수이를 배신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은지에게 가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수이와의 연애는 삶의 일부가 아니었다. 수이는 애인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함께 있을 때 가장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이일 것이었다. 그 가정은 모순적이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그 여름, p.253)
아, 그래, 이거였다. 이것은 적확한 표현이었다. 내가 당신하고 헤어진다면, 나는 당신과 헤어졌을 때 가장 잘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잃는 것이었다. 가장 정확하게 나를 읽는 사람을, 가장 정확하게 나를 아는 사람을, 가장 정확하게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을, 당신하고 헤어지면, 당신이 가장 잘 위로해줄 수 있는데, 당신하고 헤어진다면 당신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는 없는 이 아이러니. 어떻게 이렇게 적확할 수 있을까. 이 상실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좋았던 기억들로 헤죽헤죽 베실베실 웃다가 종국엔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 순간이, 바로 최은영의 소설 속에 그대로 나와있었다.
당신하고 헤어지면 그런 나를 가장 잘 위로해줄 당신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일은 어떤 일일까.
이경은 수이에게 헤어지자고 한다. 수이는 그 말을 들어준다. 이경은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일을 가져올지 알까.
"수이야."
"이제 네가 날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그 말을 하고 수이는 오래 울었다.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말을 이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여름, p.263)
이제 당신이 날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당신도 오래 울었을까.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말을 이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을까. 이경은 수이와 헤어지고 은지와 연애했지만 짧게 끝났다. 잘 되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은지에게 매달려도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안 될 줄,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다. 허기가 져서 밥을 먹었다. 김치볶음밥을 해먹겠다고 부엌에 나왔는데, 엄마가 끓여둔 김칫국이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 김칫국을 퍼서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는 김칫국은 맛있었다. 음~ 맛있어, 아, 맛있네~ 연달아 말하며 먹노라니, 엄마가 그만하라 하셨다. '나 오늘 저녁 안먹을라고 결심했는데, 너 왜그렇게 맛있게 먹어. 아무소리도 내지마. 나 자꾸 먹고싶잖아!' 하셨다. 알겠다고 하고서는 내가 또, 나도 모르게, '아 완전 맛있어' 해버렸고, 엄마는, "너!!!!!!!" 하셨고, 나는 깜짝 놀라서, "아, 엄마, 엄마 자극하려고 한 건 아니고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온거야" 했다. 사실이었다. 그 말이 진실이었어.
일요일에 낮잠 자는 걸 너무 좋아해서 잠이 오면 언제나 잠과 싸우지 않고 그대로 포기한 채 잠을 잤었는데, 그러다보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월요일이 피곤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래서 아까는 잠이 쏟아지는데, 기를 쓰고 잠과 싸워 이겼다. 그러면 오늘 밤에는 일찍 잘 수 있을까? 그렇지만... 오늘 늦게 일어났는데...흐음.....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마주보면서 송은 희극배우의 나이가 몇이더라, 생각했다. 자기보다 많게는 열 살쯤 많을 것이다. 자기도 십 년이 지나면 저렇게 되어 있을까, 다시 생각했다. 저렇게 불안하고 우울하게 안정감 없게 외롭게 가진 것 없게 내쳐진 채 나쁘게, 살게 될까.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문상,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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